<3> 솔직한 건 용기가 필요한 일2021.05.14.
라넬리는 아이치고 참으로 의젓하고 인내심이 뛰어났다. 어른들이 대화하는 내내 조금 꼼지락거리긴 했지만, 시선을 끌만큼 칭얼거리거나 안달 내지도 않고 얌전히 기다려 주었다.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아이가 비로소 입을 연 것은, 집사가 이브니아를 겔렌지크 공작저의 부지 내에 있는 고용인용 독채로 안내해 준 후였다. 안내를 마치고 떠나는 집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라넬리는 이브니아의 치맛자락을 꾹꾹 당겼다. 이브니아가 허리를 숙여 딸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엄마, 엄마.”
“응? 왜?”
“아까 그 아저씨 말이에요. 이만큼 크고 멋진 아저씨.”
긴장이 풀린 이브니아는 아이의 눈에도 아라드가 멋져 보이는가 싶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분은 공작님이셔.”
“공장님?”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를 자신 없이 제 입으로 내뱉어보는 라넬리의 발음을 이브니아가 차분하게 웃으며 교정해 주었다.
“공작님.”
“아아, 공작님.”
“그래. 그분이 왜?”
“공작님은 엄마를 좋아해요, 아니면 싫어해요?”
“응……?”
이게 무슨 질문일까. 평범한 질문 같기도 했지만 물어보는 상황이나 라넬리의 눈빛에 조금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쉽게 대답하기 애매한 물음이었다. 낯선 사람이 엄마를 싫어한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는 건 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될 테니까. 이브니아가 어떻게 대답해줄지 고민하며 잠시 머뭇거리자, 답답했던 모양인지 라넬리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공작님이 엄마를 사탕 단지처럼 쳐다봤거든요.”
이브니아에게서 보다 빠른 대답을 구하려 붙인 사족이 오히려 그녀의 말문을 더 막아버렸다. 라넬리가 말하는 관용어의 뜻은 이브니아도 알고 있었다. 아이는 지금 할머니가 종종 하던 말을 따라 하는 것이다. 마을 아이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뛰어다니는 것을 엄마 옆에서 집안일을 돕던 라넬리가 몹시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노라면 할머니가 깔깔 웃으며 ‘사탕 단지 바라보듯 한다’고 말하곤 했던 것이다.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으면 상냥하게 대해줘야지, 어째서 공작님은 엄마에게 못된 말을 해요? 찰스도 우리에게 언제나 못되게 굴어서 아무리 우리를 사탕 단지 보듯 바라봐도 함께 놀기 싫은걸요.”
“음, 그러게…….”
이브니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라넬리의 말에 동조해 주었다. 하지만 아이가 무엇을 보고 아라드가 자신을 ‘사탕 단지 보듯’ 바라봤다고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라드는 내내 고압적인 태도를 고수했고, 심술 맞은 얼굴로 픽 웃은 게 아니라면 단 한 번도 상냥한 미소를 짓은 적이 없었다. 이브니아는 오히려 라넬리가 그런 그의 위압감에 두려움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른인 자신도 아라드가 두려웠으니 아이에겐 오죽 두려웠겠는가. 그런데 라넬리에게서 무서웠다는 말은커녕 ‘엄마를 사탕 단지 보듯 봤다’는 말을 들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구태여 라넬리의 생각을 고쳐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아이가 아라드와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아이들에겐 모든 걸 곧이곧대로 말해주기보단 정서적인 충족감을 안겨주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이브니아는 라넬리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며 미소 지었다.
“우리 라넬리는 친구 사귀는 법을 잘 아는구나? 라넬리는 상냥한 게 좋다는 걸 아는데 공작님은 아직 잘 모르시나 봐. 그래도 우리를 이곳에 머무르도록 허락해 주셨으니 속마음은 정말 친절한 분이실 거야.”
“왜 그러면 공작님은 속마음과 반대로 행동해요?”
“원래 어른들은 속마음을 솔직하게 내보이는 걸 부끄러워한단다.”
“어째서요?”
“솔직한 건 용기가 필요한데 어른이 될수록 용기가 부족해지거든.”
실제로는 아라드가 용기가 없어 솔직하지 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솔직하게 이브니아를 싫어한다는 내색을 한 것일 터였다. 그는 속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는 사람이니까. 모든 사람이 그의 발아래 있고, 그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브니아는 그저 아이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었다. 엄마의 말에 라넬리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님은 그렇게 크고 용감해 보였는데 용기가 부족해요?”
“겁쟁이 호랑이 이야기 알지? 사납고 무서워 보였던 호랑이가 사실은 겁쟁이였다는 이야기 말이야. 그렇게 크고 무시무시한 호랑이도 용기가 부족할 때가 있단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
알고 있는 동화 이야기를 듣고 단번에 이해한 라넬리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별안간 눈을 반짝이며 수줍게 말했다.
“그런데 엄마, 공작님 눈도 나랑 같은 예쁜 연두색 눈이었어요!”
“아냐, 그건 노란색이야.”
움찔 놀란 이브니아가 냉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숨기던 비밀을 간파당한 당혹스러움에 섬뜩했던 탓이었다. 말을 뱉고 나서야 당혹스럽고 민망한 표정을 짓는 라넬리를 보고 아차 하며 다시금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라, 라넬리가 보기엔 그렇게 보였구나. 엄마가 보기엔 달라 보였는데. 다음에 공작님을 뵈면 다시 자세히 봐 보자.”
그러고는 황급히 대화 주제를 옮겼다.
“자, 그럼 이제 그만 숙소를 구경해 볼까?”
집사가 안내해 준 곳은 저택의 부지 내에 있는 작은 독채였다. 커다란 겔렌지크 대저택의 부지는 무척 넓고, 또 많은 건물이 있었다. 본관과 별관뿐만 아니라 기사들의 생활 공간, 고용인들의 생활 공간이 따로 있었고, 여러 잡다한 쓰임에 맞게 지었다가 방치된 시설들도 꽤 많았다. 이브니아와 라넬리에게 숙소로 주어진 곳은 7년 전에는 정원사 노부부가 지내던 독채였다. 원래 이 독채는 어느 대의 공작부인이 취미 공간으로 지은 건물로써 실용성보다 심미성을 추구하여 꾸며져 있던 곳이었다. 그런 곳을 아픈 아내를 돌보던 정원사에게 선대 공작이 대여해 준 것이다.
‘그분들은 잘 계실까.’
이브니아는 이곳에서 지냈던 키가 아담하고 몸매가 통통한 정원사의 아내를 떠올렸다. 그녀는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고 곧잘 투덜대긴 했지만, 태생이 부지런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픔 몸을 부산스레 움직이며 이 작은 집을 정성스레 관리해 고용인들을 초대하곤 했다. 이브니아도 그때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 독채가 그녀의 기억 속엔 무척 안락하고 따스했던 장소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정겹던 장소가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왜 여기가 비어 있는 걸까. 일을 그만두셨나?’
토마토와 양상추, 무화과 따위가 소담하게 자라던 앞마당은 텅 비어 있었고, 거미줄이 더덕더덕 붙은 현관 지붕은 100년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그동안 건물을 창고로 썼는지 지저분한 창문 안으로 천장까지 쌓여 있는 가구도 보였다.
‘꽤 오래 비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가 이곳을 내게 준 건 화풀이겠지.’
이브니아가 추측하기로 아라드는 이런 곳을 숙소로 내어주면 그녀가 질색하며 당장에 도망쳐버릴 거라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브니아는 생활력이 아주 강했고, 그 넘치는 생활력을 딸에게 물려주기까지 했다. 아라드는 정말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모녀가 살던 고향 집이 70년쯤 전에 지어졌을까 싶은, 무척 오래되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건물이었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곳은…….
“여기 너무 좋아요, 엄마!”
“그렇지? 쓸고 닦으면 꽤 근사해지겠는걸.”
모녀는 명랑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 천장이 너무 예뻐요!”
“저건 캐송이라는 거야. 장인들이 조각한 나무 패널을 붙여 천장을 장식한 거지.”
“저런 건 처음 봤어요! 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요!”
“멋지지?”
아라드가 봤다면 분통이 터졌을 화기애애한 대화가 끝없이 오고 갔다.
*** 한편, 아라드는 이브니아와 헤어져 집무실에 돌아온 후부터 계속 일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늘 끼고 다니는 반지를 빼서 만지작거리다가 거칠게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노크와 함께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아라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투덜댔다.
“애도 있는데, 그 먼지 구덩이가 괜찮다던가?”
“…….”
할 말이 있어 들어왔던 집사는 대뜸 짜증을 내며 선수 친 아라드 때문에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잠시 기다렸다. 아라드는 한참을 투덜대고 나서야 그에게 “왜?” 하고 물었다. 점잖게 서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집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브니아 말입니다.”
의자에 깊이 몸을 묻은 채 옆을 보고 있던 아라드가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집사를 쳐다보았다.
“못 견디겠다고 하던가? 나더러 도와달라고 밖에서 호소하고 있나?”
“……무슨 일을 시키면 좋을지 하녀장이 곤란해하더군요.”
잠시 생기를 머금었던 그의 금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지시해줘야 하나? 적당히 알아서 굴리라고 해.”
그의 눈이 경멸의 빛을 담고 가늘어졌다. 어떤 증오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애정과 구분되지 않기도 한다. 그 눈에 비친 증오의 빛이 그러했다.
“내게 그렇게 도도하게 군 걸 후회하도록.”
그녀가 후회하길 바랐다. 하루하루 돌이켜 후회하다가 7년 전 신기루처럼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그 날의 일까지 후회하길. 그러다 견딜 수 없어지면 안락한 생활을 염원하며 저에게 달려와 그 알량한 자존심을 내던지고 도와달라 청하길 바랐다. 상상 속에서 제게 도움을 요청하며 손을 뻗는 이브니아를 상상하는 아라드의 얼굴에 더 이상의 증오는 없었다. 그렇다고 증오가 식어 없어진 자리를 희열이나 오만함이 대신한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오히려 안도와 평온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만 가봐.”
“예, 알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집사가 나가고 아라드는 다시금 홀로 남았다. 과거를 더듬는 눈이었다. 그는 동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멍하게 이브니아를 생각했다. *** 용건을 마친 집사는 조용히 집무실에서 나왔다. 문을 닫으며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린 그는 주인의 뜻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젊은 집사 햄프턴은 선대 공작이 신뢰했던 전 집사의 아들이었다. 선대 공작의 타계 후 함께 은퇴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라드를 모시게 된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운 지 7년 정도 됐지만, 정작 아라드를 이렇게나 가까이서 보필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아라드의 기분을 섬세하게 살피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주인의 성미를 다 파악하지 못한 것에 그의 눈썰미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아라드는 비밀이 많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가끔은 종잡을 수 없이 신경질적이고 흉포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의 아라드를 햄프턴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그는 아라드가 언짢아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 여자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신 건가.’
꽤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않은가. 하긴, 누구라도 제 부모의 유산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 뺏으려 들면 마음에 들지 않긴 할 것이다. 가뜩이나 그 유산이란 게 이처럼 멋지고 상징적인 겔레지크 대저택이라면 더더욱.
‘주인님과 이브니아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대담한 여자지. 이곳에 눌러앉을 생각을 하다니.’
한없이 유순하고 얌전해 보이는 여자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게 햄프턴은 신기했다. 7년 전 그녀와 얽힌 불미스러운 일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처럼 추찹한 소문을 짊어지고 떠났던 여자가 선대 공작의 유언이 적힌 편지를 가졌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당당히 찾아와 아라드를 보겠다고 한 것이 더 대단했다. 그녀의 단호한 눈빛이 얼마나 단단하던지 그는 내심 감탄스러웠다.
‘단지 뻔뻔하다고만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어.’
심지가 굳어 보였다고 해야 할까. 그런 그녀에게 7년 전의 불미스러운 소문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은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니까.’
그는 쯧쯧 혀를 찼다. 왜 이브니아가 이곳에서 하녀로 일하겠다고 나섰는지 햄프턴은 들은 바가 없었다. 추측해보건대, 아라드는 이브니아가 받을 유산에 대해 공증인과 서류 작업을 해치울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게다가 이브니아 입장에서야 주인님과 싸울 자신은 없지만, 유산에 미련이 남아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라드가 신경질적인 것도 이해가 됐다. 햄프턴은 당장 하녀장에게 달려가 아라드의 말을 전해주었다.
“셀비, 주인님께 다녀오는 길입니다.”
저택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집사인 그가 하녀장보다야 직위가 높았지만, 그는 오랫동안 저택에서 일한 하녀장을 어른으로 대접해주고 있었다. 하녀장 셀비가 그에게 과자 따위를 슬쩍 챙겨주며 물었다.
“주인님이 그 여자에 대해 뭐라고 하시던가?”
“그녀가 여기서 일을 하겠다고 한 걸 후회하길 바라시더군요.”
“고된 일을 시켜 내쫓으라는 말인가?”
“그런 말로 들렸죠.”
햄프턴이 확신 없이 대답했다. 이브니아를 괘씸하고 뻔뻔하게 생각하는 셀비는 이브니아를 어떻게 입맛에 맞게 요리하면 좋을까 생각하느라 그러한 햄프턴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군. 잘 알겠네. 이런 품격 높은 저택에 그런 질 떨어지는 여자가 웬 말이냔 말이야. 옛 주인님을 유혹해 말도 안 되는 편지를 받아냈는지 몰라도, 내가 이곳을 지키고 있는 한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하녀장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떠났다. 안온한 밤이 무르익었다. 내일은 오늘과는 다른 하루가 펼쳐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