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내 딸일 리 없어2021.07.27.
끔찍한 시간이었다. 이브니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열은 자꾸만 높아만 갔다. 아라드는 열심히 천을 적셔다가 그녀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며 열을 식혔지만, 상처가 감염되었는지 좀처럼 열이 떨어지질 않았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라드는 저녁 무렵 계곡 수위가 낮아져 그를 찾으러 온 기사들에게 구조될 때까지 이브니아를 끌어안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약을 먹였으니 열이 내릴 겁니다. 상처의 감염은 크지 않았습니다. 다만, 원래도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던 모양이라 버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의사가 아라드의 눈치를 살폈다. 아라드는 침대에 누워 고요한 얼굴로 잠든 이브니아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뺨은 여전히 열로 인해 상기되어 있었다.
“열이 내리지 않으면?”
“……내리길 바라야겠죠.”
아라드는 이를 부득 갈았다. 걱정과 분노에 차서 의사에게 무슨 수를 써서든 이브니아를 살려내야 할 거라고 화를 내려다가, 울고 있는 라넬리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엄마…….”
라넬리는 이브니아의 옆에 앉아 소리도 없이 커다란 눈물방울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숨죽여 우는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 맞은지, 이브니아를 못마땅해하는 하녀장 셀비까지도 이브니아를 가엾게 여길 정도였다.
“아가, 엄마가 쉴 수 있게 나가 있을까?”
셀비가 아라드의 눈치를 보며 라넬리를 밖으로 데려갔다. 아라드는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갈 곳 없는 분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문득 그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히사르의 존재가 스쳤다.
“그 개자식……!”
분노의 방향이 잡혔다. *** 지난밤 내린 비 때문인지 지하 감옥은 짙은 흙냄새와 쾌쾌한 곰팡내가 섞인 불쾌한 공기로 가득했다. 히사르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나무 의자를 끌고 와 앉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라드는 밧줄에 묶인 채 지하 감옥 바닥에 던져진 히사르를 향해 상체를 조금 굽혔다. 비에 젖은 옷을 입은 채 추운 지하에 방치되었던 히사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주인님……!”
그가 애원했다. 아라드가 싸늘하게 물었다.
“이브니아에게 무슨 짓을 했지?”
“아, 아무 짓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짜증 난다는 듯 고개를 꺾으며 관자놀이를 짚은 아라드가 몸을 일으켰다. 퍽!
“허억!”
둔탁한 발길질 소리와 함께 히사르가 몸을 움츠렸다. 명치를 얻어맞은 그가 곧 숨이 넘어갈 듯 꺽꺽거리며 거품을 물었다.
“그래,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도 좋겠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아라드가 다시금 발을 들었다. 퍽!
“크헉!”
“어차피 무슨 말을 하든 결과는 똑같을 테니까.”
한참 동안 지하 감옥에 발길질하는 소리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라드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벌레를 밟아 죽이듯 감흥 없이 히사르를 팼다.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이었다. 이 행위를 광기에 맡겨버리고 물러서면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았기에, 그는 이곳에 오기 직전 마나를 안정시키는 데 시간을 쏟았다. 아라드는 잠시 발길질을 멈췄다. 지금까지는 히사르의 맷집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일 뿐이었다. 그는 잘 차려입은 겉옷을 벗어 옆에 있던 기사에게 건네곤 손목의 커프스단추를 풀었다.
“건강한 게 마음에 드는군.”
웬만해선 죽지 않을 테니. 아라드의 히쭉 웃는 얼굴을 본 히사르의 표정이 꺼멓게 죽었다. 히사르는 지금 이 순간이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뱀처럼 기어 아라드의 발치에 이마를 박았다.
“드, 드릴, 드릴 말씀이……!”
아라드는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히사르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그가 주먹을 드는데, 히사르가 눈을 질끈 감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 여자의 비밀을!”
아라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히사르는 찰나, 아라드가 자신의 말에 흥미를 가졌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재빨리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 여자의 비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발……!”
아라드가 그를 돌바닥에 내던졌다.
“억!”
히사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넘어지면서 팔꿈치 뼈가 돌에 부딪혀 부러진 것 같았다. 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신음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아라드에게 애원했다.
“제, 제가 이브니아의 비밀을 말씀드리는 대신, 모,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하아.”
아라드의 입에서 느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히사르의 앞에 주저앉아 그의 머리칼을 움켜잡아 거칠게 들어 올렸다.
“컥!”
“아직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히사르는 뺨을 강타하는 충격에 눈앞이 순간적으로 까매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이 젊은 공작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화가 난 걸까. 이브니아 때문에? 이브니아와 휘말려 함께 죽을 뻔했다더니, 그것에 대한 분노인가? 이브니아는 그가 가지고 놀다 버린 노리개 따위가 아니었나? 뭐가 됐든 이 모든 건 다 이브니아 때문이었다.
‘그년만 없었어도……!’
히사르는 꺽꺽거리며 원망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머리를 굴려야 한다. 머리를 굴려야 해. 하지만 계속되는 고문에 도무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히사르는 아라드의 분노가 이브니아에게 닿길 바랐다. 적어도 이브니아를 함께 끌어내리고 싶었다. 혼자 죽을 순 없었다.
“이브니아가! 쿨럭! 데려온 애가 주인님의 애랬어요! 켁! 커억!”
순간, 구타가 멈췄다. 히사르는 입안이 터져 흐르는 피를 삼키며 다급하게 외쳤다.
“허억, 헉, 정원사가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 여자애가 주인님의 애라고……! 제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히사르는 어떻게든 아라드를 자극하기 위해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다.
“이브니아는 주인님의 재산을 노린다고 했어요! 그 여자애를 입적하면, 막대한 재산이 제 손에 떨어질 거라고, 그래서, 그래서 애를 숨기고 있었다고……!”
“…….”
그 말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아라드가 히사르를 버려두고 몸을 일으켰다. 기사가 아라드에게 깨끗한 천을 가져다주자, 그는 얼굴과 손에 튄 피를 느긋한 손길로 닦아냈다. 그가 피로 얼룩진 천을 히사르의 위에 툭 버려버리곤 돌아섰다.
‘사, 살았나……?’
히사르는 찝찔한 피 맛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안도하기도 잠시, 아라드가 놀이는 이것으로 끝내겠다는 듯 무심히 말했다.
“죽기 직전까지만 만져놔.”
그러고는 그가 뚜벅뚜벅 걸어나가자, 기사들이 히사르에게 달라붙었다.
“히익!”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 피를 깨끗이 씻어내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아라드는 이브니아를 눕혀놓은 방으로 향했다. 의사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핑계로 아라드는 그녀를 독채로 보내지 않고 저택의 호화로운 방에 데려다 두었다. 아라드는 제가 선물한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서 잠든 엄마의 곁에서 조용히 놀고 있는 라넬리를 보았다.
“공작님!”
라넬리가 아라드를 보고 반색했다. 아라드는 그런 라넬리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고는 이브니아의 행동을 흉내 내며 빙긋 웃었다. 이브니아였더라면 라넬리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기를 바라며 무슨 상황에서건 미소 지어주었을 테니까.
“엄마가 오래 잠들어 있어서 심심하겠구나, 라넬리.”
라넬리가 고개를 저었다.
“으응. 괜찮아요.”
아라드는 그런 라넬리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닮았다고 생각하면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특히 눈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무심코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 눈은 저주받은 눈이었다. 광기의 발현을 나타내는. 누구도 이걸 닮아서는 안 된다. 그는 라넬리의 눈이 자신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곧바로 부정했다.
“식사는? 밥은 먹었나?”
“엄마 일어나면…….”
아라드가 혀를 쯧 찼다. 늦은 시간이었다. 아직도 애가 밥을 안 먹었다니. 이곳에 들어올 수 없는 하틀랜드가 라넬리를 챙기지 않으니 애가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분명 보모를 알아보라고 했을 텐데.’
햄프턴이 요즘 정신을 어디에 빼놓고 사는지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가서 집사에게 먹을 걸 달라고 해라. 어서.”
그렇게 라넬리를 내보낸 아라드는 이브니아의 곁에 다가가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의 차가운 손이 닿자, 이브니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살짝 눈을 떴다. 아라드는 반색하며 허리를 숙여 이브니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정신이 들어?”
“…….”
이브니아는 대답 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잠이 든 것 같았다.
“아직도 열이 떨어지질 않다니.”
그가 옆에 있던 물수건에 물을 적셔 이브니아의 이마에 새로 올려주었다. 그동안 그걸 라넬리가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주변이 떨어진 물로 어수선했다. 그런데 그때, 이브니아가 갑자기 그의 손을 붙잡고 입술을 달싹였다.
“……드.”
아라드가 깜짝 놀라 그녀의 입가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뭐라고, 이브니아?”
“……들어줘, 아라드.”
“잘 안 들…….”
“내 말을 들어줘. 제발…….”
“…….”
“그렇게 돌아서지 마…….”
열에 들떠 현실분간을 하지 못하고 하는 소리 같았다. 아라드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약속했다.
“당신을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그런데 가느다랗게 뜬 이브니아의 눈이 글썽해졌다. 그녀는 끝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쳐내버렸다.
“넌…… 날 버렸어.”
아라드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제야 이브니아가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브니아는 몹시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시는…… 누구도…… 필요 없어…… 증오해, 아라드…….”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다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여전히 허공에 멈춰 있는 아라드의 손이 잘게 떨렸다.
‘증오한다고, 나를.’
버렸다니. 누가 누굴 버렸다는 건지. 아라드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브니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건 이브니아였다. 엄밀히 따지면 증오를 받아야 할 대상은 이브니아가 아니던가. 자신을 두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으니까.
[이브니아가! 쿨럭! 데려온 애가 주인님의 애랬어요!]
히사르의 외침이 떠올랐다. 아라드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 망할 자식.’
가증스러웠다. 끝까지 거짓말을 입에 담다니. 라넬리가 제 딸일 리 없다는 건 누구보다 그가 잘 알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병을 앓고 있었다. 선대 공작, 로이스턴 겔렌지크가 오랫동안 아라드에게 병명을 숨겨왔기 때문에 이 병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최근이었다. 하지만 그는 병의 정체를 알기 전에도 제가 애를 낳으면 이 정체 모를 병이 아이에게까지 옮겨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아라드는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브니아를 안을 때마다 임신을 피할 수 있는 약을 꼬박꼬박 복용했던 것이다.
‘라넬리가 내 딸일 리 없지.’
그가 복잡한 눈으로 이브니아를 내려다보았다. 아라드는 이브니아가 몰래 로이스턴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연인이 제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했다.
‘내가 어떻게 그 애를 받아들여. 다른 사람 애도 아니고, 아버지의 애를.’
이브니아가 임신을 고백했을 때, 아라드는 도저히 그 아이를 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그를 배신한 건 이브니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