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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28/118)

<28>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2021.08.10.

16548826462056.png“훔친 물건이 아니에요!”

1654882646206.jpg“변명은 필요 없어.”

이브니아는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주장했다. 역시나 셀비는 그 말을 믿어주진 않았다. 하녀들은 어디선가 그럴듯한 나무 궤짝을 가져왔다. 평소 입지 않는 옷가지들을 정리해 놓는 용도로 쓰이는 물건이었다. 이브니아는 몸을 잔뜩 웅크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궤짝을 보고 덜컥 겁이 나서 저항했다.

16548826462056.png“이러지 마세요, 하녀장님!”

하지만 우악스러운 손들이 이브니아를 붙들고 궤짝으로 욱여넣었다.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힌 이브니아는 몹시 저항하다가, 문득 사람들 틈에서 잔뜩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라넬리를 발견했다.

16548826462056.png‘라넬리……!’

이브니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라넬리는 엊그제부터 이 저택에 새로 고용된 보모의 곁에 있었다. 충격을 받았는지 아이는 입을 헤벌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이브니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저항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라넬리를 쳐다보았다. 라넬리의 상처 입은 얼굴을 보자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됐는데.

16548826462072.png“엄마! 엄마!”

라넬리가 울면서 이브니아에게 달려오려고 하자, 보모가 그런 라넬리를 붙잡았다.

1654882646206.jpg“안 돼. 가지 마. 착하지.”

16548826462072.png“놔 줘요! 엄마! 우리 엄마예요!”

라넬리가 몹시 저항했다. 이브니아는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동안 이브니아는 속수무책으로 나무 궤에 끌려 내려가 억지로 눕혀졌다. 이브니아는 마지막으로 셀비에게 애원했다.

16548826462056.png“모든 게 오해예요.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어요. 부디 제게 이러지 마세요!”

지금까지는 아무리 그래도 아라드의 이름과 7년 전 두 사람의 추억을 들먹이진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너무 소중해서 더럽히고 싶지 않다는 그런 감성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과거 어리석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무참히 꺾여버린 사랑의 기억을 사람들 앞에서 털어놓기가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도둑으로 몰려 벌을 받는 것이 과거에 아라드에게 선물 받은 물건임을 증명하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엄마가 불명예스러운 일로 벌을 받게 되는 것을 보는 라넬리가 받을 상처에 비하면 자신의 수치스러움이 무슨 대수일까. 이브니아는 뒤늦게 실토했다.

16548826462056.png“주인님께 오래전에 선물 받은 물건이에요! 주인님이 오시면 분명 알아보실 거예요! 제 말을 믿어주세요, 하녀장님!”

1654882646206.jpg“네가 아주 머리를 굴리는구나, 지독한 것.”

셀비가 코웃음 쳤다.

1654882646206.jpg“주인님이 오셔서 네 잘못을 두둔해주길 바라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셀비는 이미 자신의 확신에 매몰되어 있었다. 이브니아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16548826462056.png“하녀장님, 그건 주인님께서 7년 전에……!”

1654882646206.jpg“이브니아에게 재갈을 물려라.”

16548826462056.png“잠깐! 제 말을! 제…… 읍! 으읍!”

이브니아는 재갈이 물린 채 궤짝에 갇혀버렸다. 궤짝 문이 닫히고 셀비가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브니아는 주먹으로 벽을 마구 두드렸다. 피가 나도록 주먹질을 하다가 뼈마디가 아파서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마구 벽을 치며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억눌린 소리가 궤 안에 가득 퍼졌다.

1654882646206.jpg“시끄러우니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곳으로 옮겨라.”

셀비의 목소리가 두꺼운 나무 벽 안으로 먹먹하게 스며들었다. 이브니아는 곧 궤가 들려 어디론가 옮겨지는 걸 느꼈다. 움츠린 몸이 이리저리 흔들려 머리와 등허리, 무릎이 쿵쿵 찧었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그녀는 재빨리 재갈을 풀어내 버리곤 계속해서 벽을 치며 소리쳤다.

16548826462056.png“주인님을 불러주세요! 셀비! 저는 훔치지 않았어요! 주인님께서 제가 결백하다는 걸 아실 거예요!”

틈새로 희미하게 들어오던 빛이 사라졌다. 어두운 곳으로 옮겨진 것 같았다. 그녀가 든 나무 궤를 옮긴 사람들이 성의 없이 그녀를 바닥에 쿵 내려놓았다.

16548826462056.png“악!”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충격에 비명을 지르며 이브니아는 몸을 움츠렸다. 곧 인기척이 사라지고 사위가 몹시 조용해졌다. 창고 같은 곳에 갇힌 모양이었다. 아무리 소리를 쳐도 그녀의 목소리는 아무에게도 닿지 못했다.

16548826462056.png“라넬리……. 라넬리…….”

이브니아는 라넬리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꼈다. 궤 안은 어둡고 비좁았다. 벌써 숨이 콱콱 막혔다. 다리를 제대로 펼 수도, 몸을 돌려 누울 수도 없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몸 여기저기가 저리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갇혀 있게 될까. 라넬리에겐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모든 게 다 원망스러웠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셀비. 의문의 팔찌와 펜던트의 존재. 동굴에서 아무 생각 없이 펜던트를 주머니에 넣어버렸던 스스로의 행동. 그러다가 분노가 자꾸만 한 방향으로 고였다. 애초에 제 분수에 맞지도 않는 그런 값비싼 펜던트를 쥐여준 아라드. 라넬리에게 몹쓸 병을 물려준 아라드.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돌아섰던 아라드. 그렇게 켜켜이 고인 분노는 그러나 아라드에게 머물지 않고 결국에는 그녀 자신에게 고스란히 흡수되었다.

16548826462056.png‘달콤함에 취해 그의 마음을 의심도 없이 믿어버린 내 탓이야. 내가 어리석었던 탓이야. 다 내 잘못이야.’

이브니아는 자신을 찢고 부쉈다. 산 채로 관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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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시각 아라드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시가를 입에 물고 있었다.

16548826526964.png‘피곤하군.’

눈이 뻐근해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 지압했다. 새벽에 급한 연락을 받고 수몰 지역에 다녀오느라 몹시 피곤했다. 다행히 그가 직접 나와 진두지휘하자 생각보다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는 신속히 피해 복구를 할 수 있도록 체계를 확실히 잡아놓고 재난당한 영지민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줄 것을 명령했다. 아라드는 영지민을 아꼈고, 그것을 충분히 표현할 줄 알았다. 그는 꽤 사랑받는 영주였다. 눈 주변을 마사지하던 아라드가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갑자기 픽 웃었다.

16548826526964.png‘뭐 하고 있으려나.’

저택에 두고 온 이브니아가 생각났던 것이다. 돌아가면 그녀가 있다. 그 사실이 그를 벅차게 했다. 피해지역과 저택의 거리가 꽤 멀어서 보좌관이 하루 쉬고 가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지만, 아라드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브니아를 생각하면 이런 피로쯤이야 별것도 아니었다. 빨리 가서 라넬리가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라넬리와 자신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브니아를 보고 싶었다. 이브니아의 떨떠름한 표정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났다.

16548826526964.png‘그나저나 무슨 말로 저것들을 안겨주면 좋을까.’

아라드는 맞은편에 산처럼 쌓인 상자들을 쳐다보았다. 밖에 나온 김에 이브니아와 라넬리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어서 고르다 보니 저렇게 많이 골라버렸다. 보좌관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상점을 죄다 털어 왔을지도 몰랐다. 아라드는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고르는 게 이렇게 재밌는 일이라는 걸 아주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

16548826526964.png‘분명 받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후일을 생각하지 않고 욕심껏 골랐는데, 부담스러워할 테니 처음부터 전부 안겨주진 못할 터였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하나씩 하나씩 안겨주는 게 좋을 것이다.

16548826526964.png‘내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했으니 그걸 요긴하게 써먹어야 해.’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세 개쯤 들어달라고 억지를 부려 볼 것을. 그런데 그때, 갑자기 마부가 마차를 세웠다. 빨리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나는데 마차가 서자 아라드는 자기도 모르게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16548826526964.png“무슨 일인가?”

1654882646206.jpg“죄송합니다, 공작님. 마차 한 대가 구덩이에 빠져 길을 막고 있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길 여기저기가 엉망이었다. 밤이 깊어 사위가 어두워지자 상대 마차의 마부가 구덩이를 미처 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혀를 찬 아라드가 창을 열고 말을 탄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16548826526964.png“가서 도와줘.”

16548826526999.jpg“예.”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상대편 마차에 달라붙었다. 장정 여럿이 힘을 합치니 단번에 문제가 해결되었다. 상대편 마차를 타고 있던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와 감사 인사를 하겠다며 아라드가 탄 마차 문을 두드렸다. 아라드가 시큰둥하게 창을 열어주었다.

1654882646206.jpg“저희 쪽엔 사람이 없어 아주 애를 먹고 있었는데 도와주셔서…… 앗, 겔렌지크 공작님 아니십니까?”

그제야 아라드는 어둠 속에 선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 자정이 한참 넘은 새벽. 며칠간 저택을 비우는 줄 알았던 아라드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귀가했다는 소식에 고요히 잠들었던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저택에 대낮처럼 불이 켜지고 고용인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1654882646206.jpg“다들 하품 그만하고 똑바로 서라.”

셀비가 고용인들의 행동거지를 단속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먼저 나와 옷매무새를 두 번 세 번 확인하던 햄프턴이 알은체를 했다.

16548826556285.png“셀비, 나오셨군요.”

1654882646206.jpg“주인님께서 예정보다 일찍 오시는군.”

16548826556285.png“일이 잘 해결된 모양입니다.”

셀비는 머리가 헝클어지진 않았는지 한 번 더 손으로 쓸어보며 확인하곤 꼿꼿하게 섰다. 그녀는 햄프턴이 걱정스레 자기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 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멀리서 아라드가 탄 마차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 뒤로 정체 모를 삯 마차가 함께 따라왔다. 그걸 보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1654882646206.jpg“손님인가.”

마차는 현관 앞에서 부드럽게 멈췄다. 아라드가 마차에서 내리자 햄프턴이 공손히 그를 맞이했다.

16548826556285.png“오셨습니까, 주인님.”

16548826526964.png“그래. 마차 안에 있는 물건들을 내 방에 옮겨두도록 하게.”

16548826556285.png“예, 알겠습니다.”

16548826526964.png“그리고 손님이 왔으니 방을 내어드리게.”

16548826556285.png“예.”

아라드는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고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가 저택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16548826462072.png“공작님!”

어디엔가 숨어 있던 라넬리가 아라드의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1654882646206.jpg“아니, 저 애가! 어디서 나왔지?”

셀비가 기겁하며 라넬리를 잡아채려 했다. 하지만 라넬리가 비명을 지르며 셀비의 손을 피해 아라드의 다리에 콱 매달렸다. 그러곤 절박하게 소리쳤다.

16548826462072.png“공작님! 공작님, 도와주세요!”

아라드가 자세를 낮춰 라넬리와 눈을 마주쳤다.

16548826526964.png“도와달라니? 시간이 늦었는데 지금까지 안 자고 대체 무슨 일이냐. 이브니아는?”

아라드는 그제야 라넬리의 눈이 몹시 울어 퉁퉁 부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브니아가 궤에 갇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내내 울었던 라넬리는 지치지도 않는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아이가 손을 들어 셀비를 가리켰다.

16548826462072.png“저 아주머니가 우리 엄말 가뒀어요! 공작님, 엄마 좀 찾아서 꺼내주세요!”

용감하게 쏟아낸 라넬리는 그제야 와앙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아라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일어서자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셀비를 집어삼켰다.

16548826526964.png“이게 무슨 말이지?”

셀비는 섬뜩한 불안감을 느꼈다.

1654882646206.jpg‘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어. 뭘 불안해하는 거야?’

애써 당혹감을 달랜 셀비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당당히 말했다.

1654882646206.jpg“주인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브니아가 주인님의 집무실을 뒤지는 걸 제가 잡아냈죠. 이브니아의 소지품에서 도둑질의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셀비는 품에서 펜던트를 꺼냈다. 이브니아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이브니아를 몰아갈 때 썼던 자신의 팔찌는 이미 숨겨버린 지 오래였다. 셀비는 펜던트를 아라드에게 건네주면서 강경하게 말했다.

1654882646206.jpg“그렇게 행실이 나쁜 하녀를 저택에 둘 순 없습니다, 주인님. 제가 벌을 내리긴 했지만, 한 번 그런 짓을 한 사람은 또…….”

그러나 셀비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펜던트를 건네받은 아라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가 싸늘하게 물었다.

16548826526964.png“이브니아는 어디 있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셀비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아라드가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위협적으로 명령했다.

16548826526964.png“이브니아를 데려와,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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