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아는 사람이야?2021.09.14.
이브니아는 몸에 깊이 밴 습관 때문에 채 동이 다 트지 않은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밤새 달려 새벽 늦게 수도에 도착했으니, 베고 있던 베개에 채 주름도 가지 않았을 정도로 몹시 짧은 수면이었다. 너무 잠을 못잔 탓에 머리가 묵직했다. 이브니아는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고 멍하니 누워 화려한 천장을 쳐다보았다.
‘이브니아 아르빌.’
오늘부터 당분간 그게 제 이름이었다. 아르빌 남작 영애. 겔렌지크의 오랜 가신인 아르빌 남작은 얼마 전 병으로 죽은 딸의 신분을 선뜻 아라드에게 팔아넘겼다. 겔렌지크를 떠나오기 직전에 다급히 이뤄진 일이었다. 신분 높은 대귀족이 평민 연인의 신분을 그런 식으로 세탁해 체면을 지키고 동시에 다른 귀족들로부터 연인을 보호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녹사병을 앓아 나중에 가서는 늘 눈동자가 붉었던 아라드의 친모처럼 감출 수 없이 출신이 티가 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나만 믿으라고 했잖아.]
이브니아에게 새로운 신분을 선물한 아라드는 몹시 뿌듯해했다. 마치 이로써 두 사람의 관계가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것처럼. 만일 어릴 적의 이브니아였더라면 정말로 이렇게 아라드의 아내가 되어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이브니아는 이 신분 세탁이 영원한 사랑의 맹세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라드가 원해서 쥐여준 것, 그가 원한다면 또 언제든 거둬갈 수 있는 것이니까.
‘보호라니. 우습지도 않지.’
정작 그의 보호가 필요했을 때 외면당했던 이브니아에게는 이 모든 게 시큰둥했다. 다른 목적이 생겨 수락하긴 했지만, 애초에 아라드가 자신을 황궁 연회에 데려가는 것은 장난 같은 일에 불과했다. 더 큰 책임이 필요한 일이 닥쳤을 때 그가 또다시 외면하지 않으리란 믿음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마음이 번잡해서 그런지 잠이 안 오네.’
다시 잠을 청해보려 애쓰던 이브니아는 결국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귀족들은 이런 이른 아침에 깨어나지 않는다. 이 저택의 고용인들은 이브니아가 귀족 영애라고 알고 있으니 아침 일찍부터 바깥을 활보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터였다. 하지만 아침 노동이 몸에 익은 이브니아에게는 깨어나 할 일 없이 방 안을 서성이는 게 이상했다. 잠든 라넬리에게 이불을 꼼꼼히 덮어 준 후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커다란 숄로 몸을 감싼 채 방을 나섰다.
“앗, 벌써 일어나셨군요.”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던 저택의 집사가 이브니아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이브니아는 우아한 귀족 영애처럼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며 당당히 말했다.
“잠자리가 바뀌니 잠이 오지 않네요. 산책이나 할까 하는데.”
“들고 다니실 수 있도록 머그잔에 따듯한 우유라도 데워드릴까요?”
“그래 줄래요?”
집사가 빙그레 웃었다. 몹시 친절한 태도였다. 그 태도에 용기를 낸 이브니아가 슬쩍 부탁했다.
“혹시 겔렌지크에서 편지가 오면 내게 가장 먼저 보여줄 수 있을까요?”
라넬리의 병을 알게 된 햄프턴이나 셀비가 아라드에게 편지를 보내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미리 막을 요량이었다.
“겔렌지크 저택에서 공작님께 깜짝 선물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아주 중요한 일이니 공작님께 편지를 가져가기 전에 꼭 내게 먼저 보여줘요.”
이브니아는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즐거운 장난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집사, 아돌프 테일이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르빌 양.”
마음 놓이는 대답이었다. *** 준비할 게 많다는 핑계로 수도에 왔기 때문에 이브니아는 당장 그날 오후부터 며칠간 무척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살롱에서 온 상인들이 수많은 드레스와 악세사리 견본을 들고 방문했고, 이브니아는 눈앞에 디밀어지는 비단과 보석들에 질식할 것 같았다.
“아르빌 양, 이런 건 어떠세요?”
“너무 잘 어울리세요.”
“여기에 리본을 달면 어떨까요?”
결정해야 할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쯤 되니 준비해야 할 게 많다는 건 그저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브니아는 속성으로 틈틈이 예법과 춤까지 새롭게 익혀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가운데 다행인 점은, 라넬리가 바뀐 환경에 무척 적응을 잘하고 있단 거였다.
“엄마! 이것 좀 봐요!”
라넬리가 작은 티아라를 머리에 쓴 채 이브니아에게로 달려왔다.
“황녀님이 된 것 같지 않아요? 공작님이 사줬어요!”
이브니아와 아라드, 그리고 라넬리 세 사람은 상점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도의 공작저에 상인들이 직접 오고 갔지만, 사교 시즌엔 예약에 발목이 묶이는 상인들이 훨씬 많아 이렇게 직접 상점가를 돌며 물건을 사야 할 때도 있었다.
“라넬리, 목소리가 너무 커.”
이브니아가 주변 눈치를 살피며 라넬리에게 주의를 줬다.
“공작님께 이것저것 사달라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냥 잘 어울리기에 내가 사준 거야. 라넬리는 사달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아라드가 라넬리의 편을 들었다. 라넬리가 아라드의 손을 꼭 붙잡고 그 옆에 딱 붙어 서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공작님이 사준 거예요. 사 달라고 안 했어요.”
이브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라드를 찌릿 노려보았다.
“이래서 사나에게 라넬리는 맡겨두고 오자고 했던 건데.”
사나는 이브니아의 부탁으로 함께 수도에 와 있었다. 이브니아가 바쁠 때 사나가 라넬리를 돌보고 있었는데, 아라드는 자꾸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틈만 나면 라넬리를 동행하려고 했다.
“애가 낯선 곳에서 엄마와 떨어져 지내면 얼마나 외롭겠어.”
“누가 보면 제가 아니라 공작님께서 라넬리의 엄마인 줄 알겠네요.”
이브니아는 계속해서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아라드에게 예의를 갖춰 빈정댔다. 수도에 올라온 후로는 쭉 이런 식이었다. 이브니아는 행여나 구설수에 오를까 몸을 사렸고, 아라드는 보란 듯이 구설수에 오를 행동을 했다. 아라드는 이브니아가 자꾸만 다른 사람들을 곁눈질하는 걸 보며 피식 웃었다.
“너무 눈치 보지 마, 이브니아. 어차피 우리 소문은 다 퍼졌어.”
“하지만…….”
“겔렌지크 공작이 어느 남작 영애를 애인 삼았다더라, 둘 사이에 벌써 이렇게 큰딸이 있다더라. 아마 우리가 수도에 온 첫날 다들 알았을걸.”
이브니아는 아라드가 말하는 ‘다들’이 대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 수습하려면 역시 라넬리는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게…….”
라넬리에게 들리지 않도록 이브니아가 아라드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아라드는 그 말에 코웃음 쳤다.
“수습?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하다니.”
그러더니 별안간 사람들이 다 듣도록 라넬리에게 큰소리로 외치는 게 아닌가.
“라넬리, 아버지와 함께 간식 먹으러 갈까?”
아무것도 모르는 라넬리가 좋아하며 맞장구쳤다.
“좋아요, 아버지!”
“맙소사.”
이브니아는 이마를 짚었다.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게 자신의 착각이길 바라면서.
“가지.”
아라드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이브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브니아는 그 손을 잡지 않고 아라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쩌려고 이러세요, 공작님.”
“예의를 갖추거나, 공격하지 말거나 하나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라드가 찔린 옆구리를 문지르며 툴툴댔다.
“어쩌려고 이러긴. 영원히 라넬리를 숨길 순 없어.”
라넬리를 왜 못 숨긴다는 건지 이브니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곧 열릴 황제 폐하의 탄신연에 함께 참석하는 임시 파트너 아닌가. 그런 이브니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아라드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곧 새로운 겔렌지크 공작부인이 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못 견딜걸. 라넬리는 자연스레 알려질 거야. 그러니 이왕이면 내 친딸이라고 알려지는 편이 우리 모두에게 좋겠지.”
마치 미래를 약속하는 듯한 말이었다. 이브니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또 나를 순진하게 여기고 제멋대로…….’
아라드 같은 사람에게 사생아가 몇 명쯤 있다는 건 그리 흠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사생아를 죽인다고 해도 가벼운 가십거리로 치부될 것이다. 게다가 이브니아 또한 진짜 남작 영애가 아니니 지킬 명예가 없었다.
‘그러니 저렇게 가볍게 구는 거겠지.’
이브니아는 다정한 부녀처럼 앞서 걸어가는 아라드와 라넬리를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라넬리를 아라드에게서 떼어놓고 싶었다.
[그 애는 불행할 거야.]
사생아의 존재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제 자식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 하물며 다른 남자와 낳아왔다는 라넬리를 받아주겠는가.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는 그냥 지금 이 상황이 재밌는 것뿐이다. 사람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이브니아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심정이었다. 참 아이러니했다. 진실을 한 꺼풀 가렸을 뿐인데, 자신을 불행하게 하고 라넬리를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아라드가 이토록 순한 양처럼 모녀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브니아는 양의 탈 아래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잔혹한 늑대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빨리 로언과 만나야 하는데.’
이브니아는 살롱의 직원들이 나누던 이야기를 엿듣고 로언 닐퍼드가 이미 수도에 왔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라드의 눈과 귀를 피해 로언에게 몰래 연락을 취하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 황궁에서 마주치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걸까.’
너무 간절히 그를 생각한 까닭일까. 이브니아의 눈에 믿을 수 없게도 저쪽 건너편 길가에 익숙한 밀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로언?!’
부드러운 인상에 잘생긴 외모. 주변을 말랑하게 만드는 특유의 상냥한 미소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로언이 틀림없었다. 그는 일행과 함께 길가에 서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라드와 라넬리는 멀어져가고 있었고 로언은 바로 지척에 있었다. 이브니아는 아라드를 뒤따라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로언에게 정신이 팔렸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낀 걸까. 눈매를 둥글게 휘며 담소를 나누던 로언이 문득 눈을 들어 이브니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
그의 눈이 커졌다. 머리색처럼 색소 옅은 눈동자가 정확히 이브니아를 향해 있었다. 이브니아는 그가 자신을 발견했다는 걸 알았다. 로언은 이브니아를 알아보자마자 일행도 놔둔 채 허둥지둥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런데 마차 한 대가 두 사람의 시야를 가로막은 순간.
“이브니아. 어디에 정신이 팔려서 불러도 몰라?”
길을 되돌아온 아라드가 이브니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브니아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라드가 그녀의 시선이 닿았던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차가 지나간 자리에 로언이 아라드의 시선 끝에 멈춰 서 있었다. 그는 이브니아의 곁에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춘 채였다.
“아는 사람이야?”
아라드가 턱짓으로 로언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브니아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아뇨. 모르는 사람이에요. 마법사 배지를 달고 있기에 호기심이 생겨서 그냥…….”
아라드가 거만한 눈으로 로언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로언 닐퍼드로군. 마법사 등록을 마쳤다더니 그새 수도에서 어슬렁거리네.”
그러더니 이브니아의 손을 끌어 제 팔짱을 끼게 했다.
“가지.”
그렇게 말하고 걸어가면서도 아라드의 시선은 집요하게 로언을 향해 있었다. 마치 경고라도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