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황궁 파티 (41/118)

<41> 황궁 파티2021.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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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829368924.png‘기선 제압을 하다니.’

아라드는 자신이 나서기도 전에 이브니아가 귀족들을 손쉽게 기선 제압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이브니아는 그녀에 대해 제멋대로 떠드는 사람들을 피하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을 택했다.

16548829368924.png‘하긴,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지.’

아라드는 얌전해 보이는 이브니아가 결코 보이는 것보다 여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기서 자신만이 그걸 알고 있다는 것에 우월감을 느꼈다. 이브니아의 야무진 뒷모습이 멋지다고, 역시 그녀는 멋진 사람이라고 아라드는 생각했다.

16548829368924.png‘저들은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나를 떠본 걸 텐데.’

아라드는 제 눈치를 보며 다가오고 싶어 하는 사람 만큼이나 저를 아니꼽게 쳐다보며 멀찍이서 혀를 비수 삼아 자신을 자극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저들에게 이브니아는 이름도 잘 들어보지 않은 어느 한미한 남작 가문의 여식에 불과했다. 그런 그녀가 나라의 몇 안 되는 큰 기둥 중 하나인 겔렌지크 공작의 옆에 섰다는 것에 반발심이 들 터였다. 자신들은 다가갈 수조차 없는데, 자신들보다 대단치 않아 보이는 이브니아가 그를 차지하고 있는 게 못마땅한 거였다.

16548829368924.png‘여전히 피곤한 곳이라니까.’

이래서 늘 오고 싶지 않았다. 이런 수도의 사교 파티 따위. 하지만 지금은 이브니아가 있다. 제 옆에서, 제 파트너로. 아라드는 이 상황이 꿈만 같아 자꾸만 비식비식 웃음이 나는 것을 애써 꾹 눌러 참았다.

16548829368943.jpg“수도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누군가 드디어 아라드에게 용감히 다가왔다. 영지가 가까이 있어 평소 자주 왕래하는 던모어 백작이었다. 그는 가면처럼 매끈하게 웃으며 모든 사람이 궁금해하고 있을 질문을 던졌다.

16548829368943.jpg“공작께서 수도에 연인을 데려오셨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혹시……?”

16548829368924.png“다들 그녀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군요. 소개해드리죠. 내 연인인 아르빌 양입니다.”

아라드가 직접 이브니아를 연인으로 소개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이브니아가 배운 대로 우아하게 백작에게 인사했다.

16548829368955.png“이브니아 아르빌입니다.”

16548829368943.jpg“아, 윌리엄 던모어입니다. 겔렌지크 공작께서 도대체 어떤 분을 데려오셨나 했는데,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16548829368955.png“감사합니다. 백작님도 근사하시네요.”

16548829368943.jpg“하하. 겔렌지크 공작을 옆에 두신 분이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정말 상냥하시군요.”

던모어가 너스레를 떨며 편히 이야기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대화에 끼고 싶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16548829368943.jpg“저는 빌 클렌퍼드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 로지 클렌퍼드죠.”

16548829368943.jpg“처음 봬요, 아르빌 양. 도대체 어떻게 공작님께 선택받은 건가요? 정말이지 궁금하네요.”

그 말에 아라드가 말을 정정해 주었다.

16548829368924.png“선택은 내가 받았죠, 부인. 파트너로 함께 가줄 수 있는지 그녀에게 얼마나 조른 줄 아십니까.”

16548829368943.jpg“어머.”

늘 무뚝뚝하게, 심지어 황제에게조차 반항적으로 굴며 날카롭게 굴던 아라드가 웃으며 그런 말을 하는 것에 클렌퍼드 부부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16548829368924.png“날 정말 애태웠죠. 그러니 아르빌 양을 너무 지루하게 하진 말아 주십시오. 다음을 거절당할까 초조하니까.”

아라드가 스스럼없이 이브니아의 어깨를 끌어안아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 다정한 행동과 눈빛에 몇몇 사람들이 채신없이 입을 헤벌리고 이브니아와 아라드를 번갈아 보았다. 이브니아는 뒤쪽에서 제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쑥덕이는 소리를 들었다.

16548829368943.jpg“말도 안 돼.”

16548829368943.jpg“거짓말. 어떻게 그를 거절할 수가 있어.”

16548829368943.jpg“공작님께서 졸랐대.”

16548829368943.jpg“그런 일이…….”

이브니아는 제 옆에서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싱글싱글 웃고 있는 아라드를 묘하게 쳐다보았다. 이 넓은 곳에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를 두고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그의 몸짓 한 번에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16548829368955.png‘이렇게까지 주목받는 사람이었구나.’

수도에 온 후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은 게 있어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새삼스럽게 그가 커 보였다.

16548829368924.png“내게 반한 얼굴인데. 그렇게 무방비하게 넋을 놓으면 안 되지.”

아라드가 허리를 숙여 이브니아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이브니아는 몇몇 이들이 그런 그의 다정한 모습에 감탄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시선이 더욱 집요하게 쏠리는 것을 느끼고 아라드를 살짝 밀어냈다.

16548829368955.png“사람들이 다들 우리만 보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정신이 없어서.”

16548829368924.png“즐겨. 잘 보이고 싶은 거야. 당신과 내게.”

아라드의 말이 맞았다. 이브니아도 사람들의 노골적인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16548829368955.png“어째서 이렇게까지…….”

16548829368924.png“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가 집게와 엄지손가락의 간격을 아주 약간 벌렸다.

16548829368924.png“황제, 그 한 사람만이 나보다 고작 이만큼 더 높이 앉았을 뿐이라고.”

16548829368955.png“……!”

이브니아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아라드가 황제를 높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에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아라드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16548829368955.png“말조심하세요, 공작님.”

기겁하는 그녀를 보며 아라드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16548829368955.png‘불경죄로 처형당할 게 걱정되지도 않나.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브니아는 그가 종종 짓는 특유의 오만한 미소가 그에게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새롭게 깨달았다. 그건 그에게 오만한 얼굴이 아니라 당연한 얼굴이었음을. 오만은 주제넘게 잘난 척하는 걸 말하는 건데, 그는 한 번도 주제넘은 적이 없었다. 잘난 척이 아니라 잘난 거였다. 이브니아는 제가 지금 어떤 사람을 기만하고 있는지 깨닫고 조금 두려워졌다.

16548829368955.png‘잘…… 도망칠 수 있을까?’

그녀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본 아라드는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정한 손길로 쓸어 넘겨주며 다독이듯 말했다.

16548829368924.png“피곤하겠지만 조금만 참아. 황제 폐하께서 등장하고 첫 춤을 추고 나면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 말에 이브니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16548829368955.png‘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로언을 찾아야 해. 어떻게 아라드를 따돌리지.’

그런데 때마침 시종 하나가 아라드에게 다급히 다가왔다.

16548829368943.jpg“폐하께서 부르십니다, 공작님.”

16548829368924.png“폐하께서? 왜 연회장으로 오시지 않고?”

아라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종이 시선을 내리뜨고선 아라드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피했다.

16548829368924.png“파트너를 놓고 갈 수 없으니 연회장에서 뵙자고 전하게.”

시종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16548829368943.jpg“따로 급히 할 말이 있으시답니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이브니아는 지금이 기회라는 걸 알고 아라드의 등을 떠밀었다.

16548829368955.png“폐하께서 급히 부르신다면 당연히 가 봐야죠. 나는 괜찮으니 어서 가 보세요.”

16548829368924.png“뭐가 괜찮다는 거야? 여기 혼자 있겠다고?”

16548829368955.png“혼자 있을 수 있어요.”

시종이 그런 이브니아에게 고맙다는 듯 빙긋 미소 지었다. 아라드가 고개를 잘게 저으며 속삭였다.

16548829368924.png“분명 별일 아닐걸.”

16548829368955.png“저 때문에 폐하의 부름을 거절하게 할 순 없어요, 공작님.”

이브니아가 단호히 그를 밀어냈다.

16548829368924.png“이브니아.”

16548829368955.png“어서.”

아라드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시종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이브니아를 발코니로 데리고 나갔다.

16548829368924.png“좋아. 그렇게 내가 가길 원하는 것 같으니 갔다 오지. 대신 여기서 커튼을 치고 가만히 있어. 그렇게 하면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야. 금방 돌아올 테니까.”

16548829368955.png“응.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브니아가 믿음직스럽게 대답하곤 아라드의 등을 떠밀었다. ***

16548829368924.png“급한 일이 맞나?”

아라드가 시종의 뒤를 따라가며 의심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시종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16548829368943.jpg“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라드는 분명 별일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16548829368924.png‘하여튼 늙은이 매번 이렇게 날 가만 안 놔두지.’

늘 그를 두고 건방지다며 못마땅해하면서도 황제, 헨리 튜드는 아라드를 귀찮게 하곤 했다. 아라드는 헨리의 처소가 있는 동궁으로 바삐 걸어갔다. 뒤에 두고 온 이브니아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헨리의 처소에는 아라드 말고도 초대된 손님이 더 있었다. 헨리가 귀여워 마지않는 조카, 세레나 에리트리아였다. 그녀는 화려한 금발부터 크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큰 키, 늘씬하고 길게 뻗은 팔다리가 전체적으로 화려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차를 마시며 앉아 있던 세레나가 아라드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일어났다.

16548829368943.jpg“공작님.”

16548829368924.png“에리트리아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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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드가 거만한 동작으로 세레나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저를 보자마자 가까이 다가오려는 그녀를 쌩하니 지나쳐 시종을 밀어내고서 직접 핸리의 침실 문을 퍽퍽 두드렸다.

16548829368924.png“폐하.”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고 헨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황제의 위엄을 내려놓고 보면 살집이 붙기 시작한 중년의 남자였다.

16548829368943.jpg“내 방문을 그런 식을 두드리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지. 오랜만이네, 공작.”

16548829368924.png“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급히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16548829368943.jpg“급한 건 내가 아니라 자네처럼 보이는데. 빨간 머리들이 성격이 급하다는 속설이 자네를 보면 딱 들어맞아. 자네 때문에 다른 빨간 머리들이 피해를 본다는 생각, 해 본 적 없나?”

아라드는 이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하고서 속으로 투덜댔다. 헨리가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확인하며 아라드를 힐끗 바라보았다.

16548829368943.jpg“공작은 늘 그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군. 내 생일 연회에라도 모습을 드러내서 생사 확인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잔소리의 시작이었다. 아라드는 애써 인내심을 발휘하며 딱딱하게 대답했다.

16548829368924.png“제 얼굴을 잊지 않으시고 매번 이렇게 따로 불러주시니 황송할 뿐입니다.”

16548829368943.jpg“그렇게 황송하면 종종 들르게.”

16548829368924.png“지고하신 폐하의 시간을 어떻게 제가 사사로이 축낼 수 있겠습니까.”

16548829368943.jpg“짐보다도 바쁜 공작이 친히 방문해 준다면야 내 쪽에서 시간을 내야지.”

그 뼈 있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아라드는 과감히 대화 방향을 틀어버렸다.

16548829368924.png“그나저나 정말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런 아라드를 헨리가 건방지다는 듯 쳐다보며 혀를 쯧 찼다. 하지만 이내 인자하게 웃으며 아라드를 약 올렸다.

16548829368943.jpg“허리띠를 붉은색으로 맬지 푸른색으로 맬지 고민이 되어서 말이야. 늦기 전에 연회장에 가야 할 텐데 도무지 고를 수가 있어야지.”

그러더니만 아라드가 고르는 시늉을 하기도 전에 보란 듯 푸른색 허리띠를 선택했다.

16548829368943.jpg“근데 아무래도 이게 좋겠어.”

16548829368924.png“…….”

16548829368943.jpg“참, 세레나와 인사는 나눴나?”

헨리가 허허 웃으며 세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레나가 쪼르르 달려와 아라드의 앞에 섰다.

16548829368943.jpg“공작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던 도중이었어요, 폐하.”

헨리의 속셈은 뻔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세레나와 아라드를 중매 서고 싶어 안달 내고 있었다. 그가 아라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데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아라드가 세레나를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16548829368924.png‘파트너를 데려오면 이 짓을 안 할 줄 알았더니.’

아라드가 차게 식은 눈으로 세레나를 바라보았다.

16548829368943.jpg“조카에게 늘어나는 뱃살을 들킬 순 없으니 방에 가서 허리띠 바꿔야겠군.”

16548829368943.jpg“폐하도 참. 무슨 뱃살이 있다고 그러세요.”

16548829368943.jpg“네가 몰라서 그렇다, 세레나. 허리띠를 콱 졸라매고 있어서 티가 안 날 뿐이야. 공작과 함께 기다리고 있거라. 연회장에 함께 들어가자.”

아라드는 초조하게 연회장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16548829368924.png“별일 없으시면 저는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셨겠지만 제가 데려온 파트너가 기다리고 있어서 말입니다.”

그 말에 황제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16548829368943.jpg“정글에 떼놓은 어린애처럼 보살펴주려고 하는군. 이곳은 정글도 아니고, 그녀도 어린애가 아닐 테니 괜찮지 않겠나.”

역시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헨리가 아라드를 스쳐 지나가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16548829368943.jpg“어린 나이에 여행으로 견문을 익히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제 자네도 정착할 때가 되었어. 찰나의 즐거움과 인연은 그만 놓아주고 현실을 살아가게, 공작”

그는 그렇게 안쪽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16548829368924.png“…….”

아라드는 헨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었다. 그건 이브니아를 정리하라는 협박이었다. 아라드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16548829368924.png‘정작 이브니아의 마음도 확실히 얻지 못했는데 엄한 곳에서 난리군.’

그런 그를 세레나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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