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닐퍼드 백작가 (45/118)

<45> 닐퍼드 백작가2021.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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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드의 몸이 휘청했다. 이브니아의 눈빛이 너무 단단해서 도무지 파고들 틈이 없어 보였다.

16548830507446.png“당신이 하라는 건 뭐든지 할게. 용서를 바라지도 않을게. 떠나지만 마.”

1654883050745.png“그게 얼마나 우스운 말인지 알면서.”

그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브니아를 붙잡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그녀에게 변명할 기회도, 용서를 구할 기회도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아라드는 필사적으로 이브니아를 설득했다.

16548830507446.png“라넬리에게도 아버지가 필요해. 그 애를 위해서 뭐든 다 해줄 수 있어. 내가 가진 것들 다 그 애에게 물려줄 수 있어. 그걸 누리는 건 라넬리의 정당한 권리야.”

1654883050745.png“하녀에게서 본 자식이고 결혼 전 생긴 혼외자야. 날 바보 취급하지 마, 아라드. 너희 세계에서 라넬리가 어떤 대접을 받을지 나도 이젠 모르지 않아.”

16548830507446.png“나도 로다이크야. 하지만 문제없이 공작위를 승계받았어.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라넬리를 지킬 수 있어.”

1654883050745.png“그래서 네 아버지는.”

감정이 북받쳐 오른 이브니아는 한차례 깊은 심호흡을 하고선 말을 이었다.

1654883050745.png“네 어머니를 세상에서 지웠잖아. 그 대단한 겔렌지크 저택에 사랑하는 여자의 초상화 한 장 걸지 못했잖아.”

16548830507446.png“…….”

1654883050745.png“네 어머니는 일찍이 돌아가셨지만,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난 어떻게 숨길 건데. 지금처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와서?”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1654883050745.png“내 출신이 밝혀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네가 준 그 새로운 이름과 네 영향력을 구명줄처럼 붙잡고 살아갈 순 없어.”

16548830507446.png“…….”

1654883050745.png“그러다 네가 변덕이라도 부려 시혜를 거두면 우린 가장 두렵고 슬픈 방식으로 버림받아야 하는 거잖아. 저항도 할 수 없이.”

16548830507446.png“그렇지 않아. 그러지 않을 거야.”

이브니아가 고개를 저으며 아라드를 밀쳐냈다.

1654883050745.png“한 번으로 족해, 아라드. 그걸 또 당하고 싶진 않아.”

슬프고 미약한 손짓이었다. 하지만 그 손짓에 아라드는 저항 없이 무너져 내렸다.

16548830507446.png“이브니아…….”

1654883050745.png“우린 세계가 달라. 그리고 감히 내 앞에서 다시는 라넬리를 지킨다는 말 따위 하지 마.”

아라드를 내려다보는 이브니아의 눈빛이 사나웠다.

1654883050745.png“넌 7년 전, 라넬리를 죽였어.”

16548830507446.png“난…….”

아라드가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브니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켜켜이 쌓여 지금까지도 부지불식간에 제 목을 조르는 분노를 피를 토하듯 토해냈다.

1654883050745.png“라넬리에게 네 자리는 없어.”

16548830507446.png“…….”

1654883050745.png“그 애가 널 좋아하는 건, 네가 자길 죽이려고 한 걸 모르기 때문이지.”

16548830507446.png“……!”

1654883050745.png“좋은 추억으로 남아줘. 부디. 라넬리가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널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배려야.”

아라드는 몹시도 그리워했던 신비로운 청보랏빛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16548830507446.png“내가 다…… 망쳤네.”

그가 힘없이 웃었다. 아니, 울었다.

16548830507446.png“내가 망친 거였어.”

절망감에 고개 숙인 그의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져 바닥에 얼룩을 만들었다.

16548830507446.png“아무것도 모르고 괜히 당신만 원망했어.”

1654883050745.png“…….”

16548830507446.png“억울했겠다, 이브니아.”

1654883050745.png“…….”

16548830507446.png“미안해.”

이브니아가 가만히 손을 들어 아라드의 뺨을 감쌌다. 그가 고개를 꺾어 그녀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이브니아의 손이 젖어 들었다. 그녀는 애처롭게 흔들리는 아라드의 어깨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를 끌어안는 대신 그의 턱을 당겨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젖은 두 사람의 눈이 복잡하게 얽혔다. 수많은 원망의 말을 쏟아낼 수도 있었다. 그간의 모든 고생, 아팠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밤을 새워도 부족할 만큼 많은 말들이 이브니아의 가슴 속에 얹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유일하게 꺼내놓은 원망은 딱 하나였다.

1654883050745.png“내 이야기를…… 한 번만 들어줄 순 없었을까.”

16548830507446.png“…….”

1654883050745.png“지금에 와선 무의미한 생각인 걸 알지만 늘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날 괴롭혀.”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아라드를 떠나버렸다. 뒤에 남은 아라드는 바닥을 내려치며 오열했다. 그의 울부짖는 소리에 달려온 집사가 깜짝 놀라 그를 부축했다.

1654883059466.jpg“괜찮으십니까, 주인님?”

그런 아돌프를 밀어내는 아라드의 눈이 붉은색으로 깜빡였다.

16548830507446.png“이브니아……! 이브니아!”

1654883059466.jpg“아르빌 양을 불러다 드릴까요?”

16548830507446.png“그녀를 데려와. 당장, 데려와서 도망가지 못하게 가둬.”

그의 손안에 가려진 붉은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이브니아와 아라드의 연애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아돌프는 그의 싸늘한 목소리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지금 아라드의 앞에 이브니아를 데려다 놓아선 안 될 것 같다는 강한 생각이 들었다.

1654883059466.jpg‘위험한데.’

하지만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이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1654883059466.jpg“예, 알겠습니다.”

아돌프는 눈을 질끈 감고 경비병을 호출했다. 그사이 잠시 이성을 되찾은 아라드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를 악물었다.

16548830507446.png“젠장.”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밖을 향해 소리쳤다.

16548830507446.png“다들 해산해!”

가서 이브니아를 붙잡으라는 명령을 전달하려던 아돌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4883059466.jpg“예? 하지만 방금…….”

16548830507446.png“실언했다.”

아라드는 눈을 질끈 감고서 벽에 기대앉았다. 이 상태로 이브니아를 다시 보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 같은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그나마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아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16548830507446.png“사람을 붙여. 어디로 가는지, 누구랑 함께 있는지, 무사한지만 확인해.”

1654883059466.jpg“예, 알겠습니다.”

안도한 아돌프가 아라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아라드는 자신을 잠식하는 광기에 맞서 오래도록 싸웠다. 절망감을 안고서 감정을 다스리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 이브니아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뺨 위로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무성의하게 슥 닦아냈다. 이 눈물의 이유를 그녀는 알지 못했다.

1654883050745.png‘다 털어놓으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수없이 해본 상상 속에서 아라드에게 분노를 쏟아낼 때면 묘한 쾌감까지 느끼곤 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막상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어 속이 시원하진 않았다. 감정의 덩어리가 너무 커서 이브니아는 그것을 직면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일단 외면하는 것을 택했다.

1654883062546.png“우리 어디 가요, 엄마?”

심상치 않은 이브니아의 분위기에 라넬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는 연신 아라드가 있는 저택을 돌아보았다. 이브니아는 라넬리에게 최대한 웃어 보이려 노력했다.

1654883050745.png“엄마 친구네 집에 갈 거야. 닐퍼드 자작님 기억하지?”

1654883062546.png“네.”

1654883050745.png“거기서 며칠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갈 거란다.”

밤마다 언제 집에 가냐고 물었던 라넬리는 막상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1654883062546.png“공작님한테 인사도 못 했는데…….”

1654883050745.png“공작님은 바쁘셔.”

1654883062546.png“하지만…….”

1654883050745.png“공작님이 엄마에게 대신 인사 전해달라고 했어.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지내라고 하셨어.”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라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니아는 행여나 아라드가 보낸 사람이 저와 라넬리를 붙잡아 갈까 봐 불안해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약속대로 로언이 근처에 마차를 댄 채 기다리고 있었다.

16548830653067.jpg“늦는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이브니아.”

1654883050745.png“미안해요. 일이 좀 생겼거든요.”

16548830653067.jpg“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언이 겉옷을 벗어 이브니아의 드러난 맨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브니아의 눈가에 남은 눈물의 흔적을 꼼꼼히 닦아냈다.

16548830653067.jpg“뭐가 묻었네요.”

1654883050745.png“아…….”

16548830653067.jpg“실례했어요. 조금 거슬려서. 어서 타십시오.”

로언은 이브니아와 라넬리를 마차에 태우곤 마차를 출발시켰다.

16548830653067.jpg“오랜만이구나, 라넬리. 못 본 새 많이 컸어.”

1654883062546.png“안녕하세요, 아저씨.”

1654883050745.png“자작님이라고 불러야지, 라넬리.”

이브니아가 호칭을 정정해 주곤 로언에게 오늘 겔렌지크로 떠나려던 계획이 바뀌었음을 이야기해 주었다.

16548830653067.jpg“그래요. 내 집에서 편히 쉬도록 해요. 아무래도 그가 사람을 붙인 것 같긴 하지만, 나를 어쩔 수는 없을 겁니다.”

1654883050745.png“……고마워요. 이 은혜, 꼭 갚을게요.”

16548830653067.jpg“별말씀을.”

로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닐퍼드 가문의 저택은 황궁을 기준으로 아라드의 저택과 반대편에 있었다. 공작저보다 웅장하진 않지만, 대리석으로 지어진 백작저는 화사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브니아가 라넬리와 함께 저택에 들어가자, 소식을 듣고 마중 나와 있던 닐퍼드 백작부인이 이브니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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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830679188.jpg“오, 이브니아! 이게 얼마 만이니.”

1654883050745.png“잘 지내셨어요, 부인?”

닐퍼드 백작부인은 부드러운 인상의 로언처럼 인자한 분위기를 풍기는 귀부인이었다.

16548830679188.jpg“소문의 아르빌 양이 너였다니. 아까 황궁에서 보고 정말 놀랐지 뭐니.”

1654883050745.png“긴 사연이 있어요. 시간을 갖고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16548830679188.jpg“그래, 그게 몹시 궁금해. 그나저나, 이 아이가 그 아이구나.”

닐퍼드 백작부인이 자세를 낮춰 라넬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빙긋 웃었다.

16548830679188.jpg“안녕, 아가.”

1654883062546.png“안녕하세요, 부인.”

16548830679188.jpg“부인은 무슨. 할머니라고 부르렴. 네가 벌써 이렇게 컸다니.”

그녀가 고개를 들어 이브니아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16548830679188.jpg“만삭이 되어 기어코 나가더니, 애가 이렇게 클 동안 한 번을 방문을 안 했니?”

1654883050745.png“죄송해요. 감히 더 신세를 질 수가 없어서…….”

16548830679188.jpg“신세라니. 여러 번 나를 섭섭하게 하는구나. 넌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브니아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닐퍼드 백작부인이 이렇게 살갑게 대해주는 것이 고마운 한편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16548830679188.jpg“로언, 가서 이브니아에게 방을 안내해주렴. 시간이 늦어 피곤하겠구나.”

여전히 이렇게 로언과 저를 붙여두려고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로언이 기꺼이 집사가 해야 할 일을 맡아 이브니아를 이끌었다.

16548830653067.jpg“따라오십시오, 이브니아.”

이브니아는 라넬리의 손을 꼭 잡고 계단을 올랐다. 이곳 저택도 겔렌지크와 마찬가지로 2, 3층을 손님방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언이 그녀를 이끈 곳은 4층의 가족 공간이었다. 그것도 로언의 바로 옆 방.

1654883050745.png“제가 어떻게 이곳을 쓸 수 있겠어요.”

16548830653067.jpg“아까 어머님 말씀 들었잖습니까. 당신은 가족이나 마찬가지라고.”

1654883050745.png“하지만…….”

이브니아가 한사코 거부하자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정직하고 온순해 보이는 얼굴을 한 그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이브니아는 잘못도 없이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6548830653067.jpg“당신을 손님 방으로 내려보내면 어머님께서 저를 나무라실 겁니다. 제 입장이 난처해져요.”

1654883050745.png“자작님.”

16548830653067.jpg“부담 갖지 마십시오. 당신은 어머님의 은인인걸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이브니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좋아서 마구 꼬리 치는 개처럼 로언이 활짝 미소 지었다.

16548830653067.jpg“하녀를 시켜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드리라고 하겠습니다.”

그가 라넬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16548830653067.jpg“좋은 시간 보내렴, 라넬리.”

  *** 방 안에 라넬리와 둘만 있게 된 이브니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1654883050745.png‘진짜 도망쳤어.’

그녀가 아라드에게서 받아온 연구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목적을 달성하게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녀의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1654883062546.png“엄마, 욕실이 너무 예뻐요. 저기 안 가 볼래요?”

라넬리가 함께 방을 구경하자며 이브니아를 졸랐다.

1654883050745.png“라넬리. 혼자 보고 있을래? 엄마가 잠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이를 달래놓은 그녀는 다급히 연구 노트를 펼쳐보았다. 로이스턴의 익숙한 필기체로 적힌 연구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중간까지는 이브니아도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로이스턴과 함께 했던 여러 가지 시행착오의 과정까지도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이브니아는 게걸스럽게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마지막 과정을 알아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는데, 그중 한 장이 다른 페이지보다 둔탁하게 넘어갔다.

1654883050745.png“……?”

이브니아는 방금 넘긴 페이지를 손으로 잡아보았다. 두 장이 겹쳐 붙어 있었는데, 만져 보니 그 안쪽에 무언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1654883050745.png“뭐지?”

이브니아는 침대 옆 서랍장을 뒤져 페이퍼나이프를 찾아냈다. 그걸로 조심스럽게 두툼한 페이지를 갈라내자, 그녀의 무릎 위로 무언가 툭 떨어졌다. 이브니아가 눈을 부릅떴다.

1654883050745.png“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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