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아쉬워하고 계시잖습니까2022.02.01.
동료들과 함께 늑대 가면을 쓴 채 이브니아를 쫓던 브랜던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뛰어난 마법사였다. 이브니아의 몸을 휘감은 엄청난 기세의 마나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죽겠는데.”
그가 혀를 쯧 차며 자신의 안위를 염려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내뱉었을 뿐 두 다리는 정작 위험을 피해 도망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살갗에 오싹하게 돋아나는 전율을 느꼈다. 난생처음 보는 막강한 마력이었다. 한 사람에게 어떻게 저만한 힘이 내재 되어 있을 수 있단 말인지. 브랜던은 제가 느끼는 감정이 공포인지 희열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딱히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그게 뭐든 그를 흥미롭게 하는 감각이라는 것은 분명하니까.
“뭐야, 피, 피해!”
브랜던보다 뒤늦게 위험을 감지한 동료들이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브니아가 늑대 가면을 쓴 이들에게 손을 뻗었다.
“억!”
“흐악!”
동시에 사방에 퍼져 있던 브랜던과 동료들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땅으로 급격히 떨어져 내렸다.
“아아악!”
다들 빠르게 마법을 펼쳐 자신들의 몸을 보호하려 했지만, 누구도 저항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늑대 가면을 쓴 이들의 마법이 맥없이 파훼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기엔 그들이 제국에서 꽤 알아주는 실력 있는 마법사들이라는 것을 아는 브랜던은 이브니아의 실력에 몹시 흥분했다.
“아…….”
동료들과 달리 아무런 저항 없이 이브니아의 마법에 몸을 내맡긴 브랜던은 제 몸이 엄청난 속도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 뒤집히고 찰나, 정면에서 하늘이 보였다.
“욱!”
다음 순간 그는 땅을 향해 힘껏 내동댕이쳐졌다.
‘죽는다.’
그 생각과 동시에 쾅! 하는 소리가 먼저 들리고, 온몸에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다.
“컥!”
그가 육체에 가해지는 충격에 본능적으로 몸을 말았다. 하지만 브랜던은 이내 제가 느끼는 고통이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하……?”
흙바닥에 반쯤 파묻히다시피 떨어진 그가 번쩍 눈을 떴다. 죽지도 않았고, 기절하지도 않았다. 그가 이를 악물고 저릿한 몸을 일으켰다. 심지어 몸이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고 움직여지기까지 했다.
“으으…….”
“아흑……!”
주위를 둘러보니 동료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누구도 죽지 않고 낑낑대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들 고통스러워하긴 했지만, 살이 튀고 피가 튀는 모습들은 아니었다.
‘왜……?’
브랜던은 시시함을 느끼며 의아한 얼굴로 이브니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분명 마지막에 손속을 둔 것이리라. 왜 죽이지 않았을까. 이브니아는 애초에 사람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듯, 늑대 가면을 쓴 이들을 차분히 가라앉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기회를 주는 겁니다. 당신들이 도망쳐서 영영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기회를.”
이브니아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언제라도 당신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듯.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확고했다. 늑대 가면을 쓴 동료들이 반사적으로 브랜던을 쳐다보았다.
“대, 대장…….”
잔뜩 기죽은 목소리들이었다. 브랜던은 흙먼지를 가득 머금은 침을 바닥에 퉤 뱉어냈다.
“지랄.”
공포로 충만히 채워졌던 가슴이 빠르게 비워져 다시 공허해지는 것을 느낀 브랜던은 시시함을 넘어 이브니아에게 분노를 느꼈다. 기분 좋은 죽음이 될 수 있었는데.
“기회? 웃기고 있네.”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이따위 애들 장난 같은 짓을 하다니. 다음 순간, 그의 몸에서 검은 마나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순식간에 수십 개의 검은 칼날이 되어 이브니아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국 내에 그보다 빠르게 마법을 구현해낼 줄 아는 자가 없을 만큼 그는 민첩하게 마법을 구사해낼 수 있는 마법사였다.
“이브……!”
셰히르가 그 검은 칼날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것들이 이브니아를 덮치기 직전이었다.
“……!”
허를 찔린 이브니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 다가올 고통을 상상하며 조금이라도 몸을 보호하기 위해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
앞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이브니아가 감았던 눈을 떴다.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가 검을 든 채 이브니아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의 검에 부딪힌 브랜던의 마법 칼날들이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더니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졌다.
“누구……?”
처음 보는 사내였다. 그런데 늑대 가면을 쓴 이들이 이브니아보다 빠르게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술렁거렸다.
“겔렌지크의 기사 아냐……?”
“뭐야, 왜?”
“공작이 개입되어 있었나?”
그들의 말을 통해 이브니아는 저를 구해준 사내가 아라드가 보낸 기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브니아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늑대 가면을 쓴 이들이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대장, 아무래도 철수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일단 돌아가죠.”
그들이 조금 전보다 확고하게 브랜던에게 철수를 주장했다. 브랜던 일당은 그리 경직된 상하 관계가 아닌, 잔인한 놀이를 즐기는 사교 모임이었기에 그들은 브랜던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씩씩대는 그를 양쪽에서 붙잡아 끌고 가 버렸다. 도망치는 그들을 본 이브니아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기사에게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라드가 언제부터 제게 사람을 붙여 놓았던 건지 이브니아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어쨌든 그게 제게 도움이 되었으니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그리고 지금 그런 것을 따지기 전에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브니아가 셰히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봐야겠어요.”
*** 늑대 가면을 쓴 무리의 일부가 이브니아를 쫓고 있을 때 그들과 별개로 움직이던 다른 이들은 몇몇 로다이크들을 납치하고 있었다. 치료술사라고 불리는 이들의 치료로 로다이크들의 병이 정말 나았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마법 학회장 레지워스는 브랜던의 모임에 속해 있는 젊은 마법사의 보고를 받고 브랜던을 찾아왔다.
“치료를 받던 중인 로다이크를 잡아 왔다지?”
이브니아의 공격으로 온몸에 약간 깊은 수준의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은 브랜던은 붕대로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그는 학회장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붕대를 감은 몸에 가운만 대충 걸친 채로 있다가 레지워스를 맞이했다.
“이 일에 꽤 관심을 쏟으시는군요.”
브랜던이 시가에 불을 붙이고는 나른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짓눌린 상처가 쓰라렸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감각하게 천장을 바라보며 시가 연기를 내뿜었다. 레지워스는 그런 브랜던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곧 눈길을 거뒀다. 그는 브랜던에게 별말 없이 명령했다.
“잡아 온 로다이크들을 데려오게.”
곧 두 사람의 앞에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쓴 두 사람이 꿇어 앉혀졌다. 브랜던이 한 손으로는 시가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물건의 포장지를 벗기듯이 무성의하게 포로의 머리를 덮은 자루를 휙휙 당겨 벗겨냈다. 하나는 십 대 중후반쯤 될 만한 깡마른 소년이었고, 하나는 이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이들이 정말 치료를 받았다면 무슨 일을 당해도 눈 색이 멀쩡하겠죠.”
브랜던은 어떻게 하면 로다이크의 광기를 끌어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나폭주증은 마나의 흐름과 관계가 있었다. 가뜩이나 불안정한 로다이크들의 마나는 조금만 건드려줘도 손쉽게 폭주하곤 했다. 그는 무감정한 얼굴을 하고서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로다이크들의 앞에 불량스럽게 주저앉았다.
“사, 살려주세요…….”
어린 소년 쪽이 눈물을 글썽이며 브랜던에게 애원했다. 그 애처로운 눈빛을 브랜던은 혐오스럽게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과분한 걸 바라는군. 주제도 모르고.”
그가 한 손으로 소년의 머리통을 으스러트릴 듯 붙잡았다. 그의 손에서 검은 마나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시가 연기와 어우러졌다.
“제, 제발…….”
공포에 질린 소년이 사정했다. 하지만 곧 소년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눈을 까뒤집으며 발작을 시작했다.
“헉! 허억!”
브랜던의 검은 마나가 소년의 머리를 타고 흘러가 소년의 몸속에 흐르는 불안정한 마나를 마구 헤집기 시작했다. 브랜던의 날카롭고 공격적인 마나에 자극을 받은 소년의 검붉은 마나가 순식간에 폭주하며 요동쳤다. 레지워스는 소파에 앉아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의 시선이 소년의 눈동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흐음…….”
발작하는 소년의 눈동자는 그래도 꽤 오래 제 색깔을 유지했다. 하지만 레지워스가 흥미를 보이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을 때쯤, 결국 붉게 깜빡거리더니 완연한 붉은 색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으르르……! 크르륵……!”
광기에 잠식된 소년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몸을 요동쳤다.
“쯧.”
잠시 흥미로운 빛을 띠었던 레지워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흥미가 식은 것은 브랜던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한 마법사라서 뭔가 방법을 찾아냈나 했더니 역시 그냥 사기꾼이었나.’
그는 다른 로다이크에게도 똑같이 실험을 해보고는, 그 역시 얼마 버티지 못하고 광기에 사로잡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마법으로 그들의 심장을 꿰뚫어버렸다. 그는 급격히 흥미를 잃고 소파에 늘어져 버렸다.
“치워.”
브랜던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두 구의 시체를 들쳐 메고 사라졌다.
“역시 헛소문이었군.”
레지워스가 쯧, 혀를 차고는 신경질적으로 소파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브랜던이 나른한 얼굴로 목을 꺾으며 그런 레지워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꼭 그 소문이 사실이길 바라신 것 같습니다?”
“…….”
레지워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브랜던을 바라보았다. 브랜던이 레지워스를 떠보듯 히쭉 웃으며 말했다.
“저는 학회장님이 로다이크를 치료할 방법 따위 없길 바라는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지금 학회장님의 표정은 그 반대처럼 보이는군요.”
“헛소리.”
“아쉬워하고 계시잖습니까.”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 브랜던의 말에 레지워스가 그를 찌릿 노려보았다.
“감히 누구에게 오만불손하게 구는 건가.”
열 받은 레지워스의 표정에 브랜던의 눈빛에 죽었던 흥미가 살짝 스쳐 지났다. 그가 픽 웃으며 장난스럽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제가 어떻게 학회장님께 오만불손하게 굴겠습니까. 혼내지 마십시오. 기죽으니까.”
그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제 몸을 끌어안고 부르르 떨었다. 끝까지 장난스러운 태도였다. 하지만 레지워스는 브랜던이 제게 기어오를 생각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레지워스와의 싸움이 브랜던에겐 딱히 즐거움을 느낄 만한 일이 아니니까. 브랜던은 철저히 흥미와 자극을 위해 움직이는 자였다. 레지워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그 사기꾼들을 보게 되면 생포할 필요는 없으니 그냥 없애버리게.”
브랜던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럴 수 있다면야.’
이야기가 길어지는 게 귀찮아서 아직 레지워스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치료술사 중 하나가 사실은 무척 강한 마법사라는 사실과 겔렌지크 공작이 개입하고 있다는 두 가지였다. 브랜던은 돌아서서 나가는 레지워스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말 아쉬워하는 것 같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