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폭풍 전야 (94/118)

<94> 폭풍 전야2022.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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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룻밤 사이, 소문이 무섭도록 빠르게 퍼졌다. 겔렌지크 공작이 약혼녀인 에리트리아 후작 영애와 케르치 가문의 장남을 지하 감옥에 가뒀다는 것을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 황제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사실 또한.

16548842307007.jpg“치정문제 때문이라죠?”

16548842307007.jpg“그 출신 모를 여자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군요.”

16548842307007.jpg“세상에, 여자에 눈이 돌아 이런 일을 만들다니…….”

만나는 사람마다 아라드의 다음 행보를 궁금해하며 쑥덕거렸다.

16548842307007.jpg“아무리 권세 높은 겔렌지크 공작이라고 해도…….”

16548842307007.jpg“그렇죠? 제 발에 도끼 찍은 거나 다름없지 않겠어요?”

아라드와 뜻을 같이 해왔던 귀족들도 이 상황에선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 일로 인해 겔렌지크 가문이 타격을 받으면 얽혀 있는 사업에 얼마나 문제가 될지 염려하며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도 아라드가 왜 이렇게까지 판을 키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16548842307007.jpg“고작 여자 문제로 망하는구나.”

16548842307007.jpg“그것도 평민 여자 하나 때문에.”

16548842307007.jpg“이야. 겔렌지크 공작이 그렇게 하나밖에 모르는 로맨티시스트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누군가 저급하게 킬킬거리며 비꼬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아라드가 뒤늦게 후회하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힘이 되어줄 이들을 불러 모으려 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재판을 앞두고 겔렌지크 공작 저택에서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

16548842307037.png“…….”

아라드는 이브니아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16548842334041.png“라넬리가 갓 태어났을 때 만들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며 이브니아가 내놓은 것은 손가락 두 마디나 될까 싶은 앙증맞은 아기 손도장이 찍힌 테라코타였다.

16548842334041.png“점토에 라넬리의 손을 눌러 찍어서 구워냈어. 남겨 두고 싶더라고. 정말 조그마해서 신기했거든.”

16548842307037.png“…….”

아라드는 한참 동안 라넬리의 손도장을 바라보다가, 행여나 부서질까 무척 섬세한 손길로 그것을 매만졌다. 가느다랗고 작은 손가락 마디마디, 심지어 손바닥 주름까지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아라드는 한참 동안 그것을 들여다보고 만지작거리다가, 이브니아가 가져온 아기 옷을 들어보았다. 라넬리가 갓난아기일 때 입었던 옷이었다.

16548842307037.png“인간이 이렇게 작을 수가 있나?”

믿기 힘들다는 듯 얼빠진 아라드의 표정에 이브니아가 작게 웃었다.

16548842334041.png“안아 들었을 때 이만했어.”

그녀가 팔꿈치 근처를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아라드의 손으로 한 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길이였다.

16548842334041.png“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지. 보드랍고 연약했어. 정말이지…… 아름다운 아기였어, 라넬리는.”

갓 태어난 라넬리를 봤을 때를 떠올리는 이브니아의 얼굴에 환희가 깃들었다. 아라드는 그런 이브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브니아는 자신이 보고 느꼈던 것들을 최대한 자세히 아라드에게 설명해 주었다. 아이가 언제부터 옹알이를 시작했는지, 무슨 단어를 처음으로 웅얼거렸는지, 이빨이 나기 시작했을 땐 얼마나 귀여웠는지.

16548842334041.png“상상이 가?”

16548842307037.png“모르겠지만 알 것도 같아. 더 이야기해 줘.”

아기가 얼마나 어여뻤을지, 이브니아에게 어떤 기쁨을 줬는지 아라드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추측했다. 이브니아의 얼굴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감정들이 그의 마음을 벅차게 했다. 아라드는 라넬리를 처음 봤던 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16548842307037.png“네 옆에 붙어 있던 라넬리를 처음 봤을 때, 너무 작다고 생각했어. 툭 건들면 부서질 모래 인형 같았어.”

16548842334041.png“모래 인형이라니!”

이브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16548842334041.png“아이들은 생각보다 강해, 아라드.”

16548842307037.png“그날 라넬리를 보자마자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인형인 줄 알았어. 당신, 손재주가 좋았었는데 이런 것까지 만들 줄 아는구나 싶었지.”

16548842334041.png“말도 안 돼!”

16548842307037.png“정말이라니까. 움직이는 걸 보고 어찌나 놀랐는지.”

이브니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환하게 웃는 이브니아를 보며 아라드가 홀린 듯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의 반짝이는 시선이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이브니아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뒤늦게 그런 그의 시선을 의식한 이브니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짓궂게 물었다.

16548842334041.png“왜 그렇게 바보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거야?”

그제야 자기가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라드가 멋쩍은 듯 소리를 내며 크게 웃더니 돌연 이브니아를 향해 상체를 바짝 숙였다.

16548842307037.png“좋아서. 더 들려 줘, 이브니아.”

숨결이 닿을 만큼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아라드의 지긋한 시선에 이브니아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16548842334041.png“왜 그렇게 쳐다봐……?”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분명 그녀는 그와의 거리를 벌리지 않고 있었다. 미묘한 공기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허락. 아라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브니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16548842307037.png“예뻐서.”

그러고는 눈매를 접어 사르르 웃는 그를 이브니아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아라드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 역시 전염이라도 된 듯 그의 미소를 따라 함께 웃었다. 그동안 왜 몰랐을까. 이렇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제가 웃을 때마다 마법을 부린 것처럼 반짝이는 눈빛을. 참지 못해 비집고 새어 나와버리는 저 미소를. 그의 온 몸짓에 벅찬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16548842334041.png“…….”

아라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이브니아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고양이가 주인의 손길을 즐기듯 그가 고개를 꺾어 그녀의 손에 뺨을 비볐다. 그런 그의 입술에 이번에는 이브니아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16548842334041.png“좋아해, 아라드.”

예고 없이 파고드는 고백에 동그랗게 뜨였던 그의 눈매가 예쁜 반달을 그렸다.

16548842307037.png“사랑해, 이브니아.”

그가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번쩍 안아 제 무릎 위에 앉히고는 빈틈없이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16548842307037.png“당신을 만난 후로 한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어.”

가슴을 열어 진심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16548842334041.png“내가 떠나 있던 그 오랜 시간 동안에도?”

16548842307037.png“말했잖아. 매일 당신을 찾아 헤맸어.”

이브니아가 아라드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에게서 나는 특유의 체향에 아라드는 순식간에 7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기억하는 그대로의 향기.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포옹, 손길. 아라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래 방황하다 비로소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사람이 내쉴 법한 안도감에 젖은 호흡이었다.

16548842334041.png“내가 갑자기 떠나버려서 원망스럽진 않았어? 내 사정을 몰랐었잖아.”

16548842307037.png“그런 마음도 없었다곤 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게 당신을 잊을 이유가 되진 못했어. 당신을 되찾고 나서 풀면 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을 뿐.”

16548842334041.png“…….”

16548842307037.png“그리움이 너무 커서 그것 외엔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

그가 이브니아의 목덜미에 기댔던 얼굴을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브니아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뺨을 쓸었다.

16548842334041.png“나는 네가 겪은 감정에 대해 미안해하지도, 부채감을 가지지도 않을 거야.”

아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48842307037.png“바라지 않아. 그건 당신 몫이 아니야.”

이브니아가 고개를 숙여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이처럼 그의 품에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조용히 지친 숨을 내쉬었다. 그간 누구의 앞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여린 모습이었다. 아라드는 그런 이브니아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16548842307037.png“미안함과 부채감은 내 몫이지. 내가 당신에게 갚아나가야 할 과제야.”

이브니아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황홀할 정도로 포근했다. 영영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싶을 만큼. 하지만 이브니아는 시간이 결코 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아라드는 내색하지 않고 숨기고 있었지만, 이브니아는 저택 밖에 주둔한 황실 기사단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아라드의 보좌관인 카셀이 그들과 대치 중이라는 사실도. 이브니아는 아라드의 등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16548842334041.png“그 말 지켜, 아라드. 언제까지고 내 옆에서 갚아나가겠다고 약속해.”

이브니아가 뭘 불안해하는지 눈치챈 아라드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를 토닥였다.

16548842307037.png“불안해하지 마, 이브니아.”

16548842334041.png“…….”

듬직한 말이었지만, 이브니아는 그게 약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없이 아라드의 옷 소매를 단단히 붙잡았다. ***

16548842334041.png‘약속을 받아둘 것을.’

이브니아는 아까 아라드에게 언제까지고 옆에 있겠다는 약속을 받아두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16548842334041.png‘이래서야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원망할 수도 없잖아.’

이브니아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원망을 눈빛으로 쏘아 보내며 아라드를 올려다보았다.

16548842334041.png“우릴 어디로 보내려는 거야?”

이브니아는 저택 후문 쪽에 세워진 마차를 보고 물었다. 데릴린과 라넬리가 선뜻 마차에 오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16548842307037.png“여기보다 안전한 곳으로 가 있어, 이브니아.”

16548842334041.png“에리트리아 양의 문제로 재판을 받는다고 들었어. 나도 관련이 있는데 어째서 나만 떠나라는 거야?”

16548842307037.png“이번 재판 이후로 당신이 치료사라는 게 밝혀질 거야.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

16548842334041.png“내가 증인인걸. 에리트리아 양과 그 일당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내가…….”

아라드는 이브니아에게 차마 평민인 그녀의 말이 귀족 재판에서 얼마나 무가치하게 여겨질지에 대해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이브니아에게 패배감을 선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재판에 함께 참석하지 않게 될 거라는 걸 미리 알려줄 수 없었다. 그는 잔인한 진실로 이브니아의 마음을 찌르는 대신 에둘러 설명했다.

16548842307037.png“황제는 애초에 공정한 재판을 할 생각이 없어. 증인 같은 건 아무 소용 없을 거야.”

이브니아가 불안하게 아라드를 올려다보았다.

16548842334041.png“거짓 없이 말해 줘. 넌 안전해?”

아라드가 걱정말라는 듯 씩 웃었다.

16548842307037.png“신분과 권력이 나를 갑옷처럼 감싸고 있지. 아무리 황제라도 내 목숨을 위협할 순 없어.”

그가 이브니아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16548842307037.png“하지만 나 대신 당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는 있겠지. 그러니 안전한 곳에 가 있어. 내가 안심할 수 있게. 당신은 거기서 라넬리와 어머니를 지켜.”

이브니아는 함께 남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라넬리를 지키라는 말에 움찔했다. 아라드의 말이 맞았다. 그녀에겐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16548842334041.png“아라드…….”

16548842307037.png“기다리고 있어. 곧 갈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이브니아는 그 말을 믿기가 힘들었다. 황제가 작정하고 아라드에게 불리한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어떻게 오래 걸리지 않고 이 일이 해결되리란 말인지. 불안감에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을 본 아라드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16548842307037.png“당신이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내 기사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 거기에 당신을 지켜줄 사람들이 있을 테니.”

16548842334041.png“나를 지켜줄 사람들?”

이브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그녀에게 아라드가 짧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곧 이브니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16548842334041.png“말도 안 돼…….”

16548842307037.png“이제 알겠지. 당신이 왜 재판에 와선 안 되는지.”

이브니아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차분히 아라드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가만히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16548842334041.png“약속해.”

아까는 받지 못한 약속. 그걸 지금 받지 못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16548842334041.png“무사히 내 곁으로 돌아오겠다고.”

아라드가 피식 웃었다. 그는 이브니아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16548842307037.png“그럴게. 눈 깜짝할 사이 모든 걸 끝내고 당신에게로 갈게, 이브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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