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기연 쇼핑 (4)2020.12.03.
‘누구지? 설마 추격자인가?’
동굴 안으로 들어서려던 천화의 몸이 경직되었다. 설마 사람인가? 가끔 그가 꺼내놓은 식량을 먹어치우기 위해 짐승들이 들어오기도 했기에 꼭 사람이라는 법은 없었지만 천화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타박 타박 안에서 들려온 기척은 사람의 그것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소리를 치거나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직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지만, 잘못 움직일 경우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을 뒤로 빼내며 도망칠 준비를 했다. 내공만 충분하다면 당장 익힌 무공이 없더라도 누구든 상대해볼 만했지만 이제 그가 모은 내공은 고작해야 10년치의 내공이 조금 안되었기에, 일류급의 무인만 만나더라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다. 단순히 칼싸움이라면 자신이 있고, 내공 대결로 가지 않도록 유도할 수 있지만, 일류급의 고수는 ‘검기’라는 사기적인 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주인님. 그러기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제 말을 듣고 힘을 취하셨으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그 땀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라도 알아차릴까 잔뜩 긴장하며 물러서고 있을 때, 혈마검이 재잘거릴 기회를 잡았다는 듯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타다다닷-!! 그때, 상대가 혈마검의 말소리를 들은 것처럼 이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분명 검을 쥐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일진데.
‘젠장!’
땅을 박차는 소리에 천화도 몸을 돌렸다. 발소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동굴 밖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거리가 조금 있었기에 들키지 않고 도망칠 가능성은 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복잡하게 내부가 연결된 동굴을 주변에 보아두었기에, 거기까지만 가면 충분히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가지고 있는 내공을 모두 무형보로 돌리며 땅을 박차기 시작한 천화의 몸이 폭발적인 속도를 내며 거처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기다려요!!”
“……?!”
그때, 여린 미성이 그의 귀를 잡아챘다.
‘여자?’
여성의 목소리. 하지만 여기서 멈추는 바보짓을 해서는 안 된다. 당장 이 세계에 자신이 아는 여성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무림인 중에는 여성 고수들도 제법 많았기에, 여성이라고 얕보고 멈추었다가는 호되게 당할 수 있었다.
‘목소리만 여성스러운 걸 수도 있어.’
게다가 무공 중에는 특이하게 남성도 여성처럼 만드는 것들도 있지 않던가? 막상 돌아보면 수염 덥수룩한 배 나온 아저씨일 수도 있었다.
“너, 이따 두고 보자.”
[아, 아니. 제가 뭘 잘못했다고……!]
때문에 천화는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혈마검에게 잔뜩 으르렁거리면서. 실제 녀석이 무엇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괜히 녀석의 탓인 것만 같아서 화가 나는 것이다.
“잠깐만……!”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로 같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후우, 후우……! 따돌렸나?”
아무리 천화라 해도 부족한 내공과 경공으로 고수를 따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기척을 감추고, 시야를 현혹시켜 도망치기는 했지만 완벽히 따돌렸다 자신할 수 없을 만큼. 차라리 그것보다는 상대가 혼자라면 무공의 약점을 파악하여 쓰러뜨리는 것이 더 빠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아직 삼류급도 되지 못하는 상태로는 상대가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승부가 날 수도 있었기에 회피한 것이다. 그녀 혹은 그가 혼자라는 보장도 없었고.
“근데 여긴 어디야?”
미리 탐험해두었던 동굴의 길들은 모두 지났다. 그러나 어쩐지 안심이 되지 않아 더 깊숙한 안까지 들어와버렸다. 그래도 소지품 창에 식량이 넉넉했으니 이곳에서 놈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길을 되짚어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일단은 이곳을 확인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혹여나 추격자가 여기까지 쫓아올 경우, 어디로 도망치거나 숨을지도 미리 파악해두어야 하니까.
“넓네.”
얼떨결에 들어온 그 동굴은 꽤나 커다란 곳이었다. 아직 초입을 살폈을 뿐이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훑은 곳들은 정말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가 생활할 수 있는 고시원 같은 방이었던 것에 반해, 이곳은 100평이 넘는 전원주택 같은 느낌이랄까?
“꽤 괜찮은 걸 발견할지도 모르겠는데?”
때문에 기대가 되었다. 이만한 동굴을 차지했다는 것은, 이곳을 터전으로 잡은 인물의 수준 또한 높았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생각해 보라, 아무리 이곳에 동굴이 많다 한들 아무 동굴이나 차지할 수 있겠나? 적어도 그 동굴의 주인이 살아있는 동안은 일종의 서열에 따라 동굴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만큼이나 거창한 동굴을 차지하고 있는 이라면 본신의 무공 또한 대단했을 터. 천화는 살짝 기대를 품고서 안으로 진입했다. 까앙!!!
[끄아아악!!! 잘못했습니다. 이제 안 까불게요!!]
그 전에, 일단 위기를 틈타 헛수작을 부렸던 혈마검에게 응징부터 해주고서.
“흠, 로또이긴 하지만 절정급 무인의 비급까지는 나왔다고 한 거 같은데…….”
천화는 기억을 더듬으며 안쪽으로 진입했다. 당시 자신도 기연 동굴에 몇 번 도전했지만 번번이 꽝만 걸렸었다. 하지만 일부는, 절정급 무인의 안배를 얻으며 급속도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였었지. 결과적으로 그 덕에 특정 무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무공을 발견하고, 성장시켜 갈 수 있었지만 그래도 절정급의 무공 비급이라도 발견한다면 큰 수확이었다.
‘특정 문파에 귀속된 게 아니라면 그야말로 금덩어리지.’
특히나 연고가 없는 절정 무인의 비급쯤 된다면 그야말로 부르는 것이 값일 테니까. 무림인에게 돈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있으면 무엇보다 편리한 것이 돈이었다. 하다못해 당장의 무공 성취가 낮더라도 낭인이나 표사, 표두 따위를 고용하여 호위무사로 써먹으면 될 일이었다. 절정급 무인 하나만 호위로 거느리고 있어도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의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응?”
그렇게 횃불을 밝히며 안으로 들어가자 묘하게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벌써 누가 다녀간 건가?”
이미 곳곳에서 사람의 흔적이 보이는 것이다. 기연들이 많은 곳으로 알려진 까닭에 간혹 도굴꾼들이나 다른 이들의 무공을 탐낸 무림인들이 찾기도 하는 곳인 만큼, 누군가 먼저 발견하고 챙길 것들을 챙겼다 해도 사실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쉬울 뿐. 그러나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 중에는 괴짜들도 많아서, 진짜 비급은 숨겨두거나 어설픈 침입자들을 퇴치하기 위한 장치 따위를 마련해두기도 하는 것이다.
“흠, 예의 없는 놈이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원래 이 동굴의 주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의 유골이 보였다. 하지만 제 멋대로 흩어져 있는 것이, 침입자가 그의 비급을 찾기 위해 마구 헤집어 놓은 것으로 보였다.
“사파나 도굴꾼쯤 되는 건가?”
거기서 천화는 약간의 정보를 얻었다. 무림인들 중 이렇게 고인의 유산을 훼손해가며 챙기는 이들은 사파 이외에 별로 없었고, 설령 유골을 뒤지더라도 다시 한곳에 모아두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순수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파나 도굴꾼의 소행일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놈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놈이 살아있다면, 이제 겨우 삼류의 문턱에 고개를 내민 자신보다는 내공 수준이 높을 것이 분명했기에 경계심을 유지하며 주변을 살폈다. 놈이 남긴 흔적, 그리고 고인이 남긴 유산 중 남은 것이 없는지를 빠르게 훑어갔다. 휘익- 그렇게 내부를 뒤적거리던 천화가 어느 순간 황급히 몸을 돌렸다. 딱히 기척이 들린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감각이 무언가를 경고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분명 살기였는데…….’
이를테면 살기 같은 것. 무형의 살기만으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수준까지는 아닌 듯싶었지만 누군가 지켜보는 느낌과 함께 명백한 적의를 읽어낸 것이다. 능력치 중 감각 수치가 더 높았다면 보다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겠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기에 천화는 표정을 굳혔다. 살기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어쩌면 도망치는 것이 옳은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기에 한 선택이었다.
‘있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미묘하게 움직이는 바람 소리. 상대도 은밀하게 움직이는지 크게 기척이 나지는 않았지만 무신지로를 통해 갈고 닦은 그의 감각은 고작 수치만으로 모든 것이 표현되지 않을 만큼 뛰어났으니까.
[흐흥. 재미있는 놈이네요.]
“……?”
그때, 혈마검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뭔가 보이는 것일까? 슬쩍 눈길을 주자 녀석이 붉은 기운을 슬쩍 일렁거리며 말을 보탰다.
[육신은 곯아터지기 직전인데 내공으로 버티는 것 같습니다. 사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것이, 시체 같은 걸 먹으면서 버틴 모양인데요?]
피를, 생명력을 먹어치우는 놈이라서인지 동류의 존재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지?”
믿기 어려운 초현실적인 감각이었지만 천화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기현상들이야 무신지로를 플레이하면서도 많이 겪어보지 않았던가? 천화가 슬쩍 다시 묻자 갑자기 혈마검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정면! 옵니다!!]
“!!”
어두운 동굴 안쪽에서 허연 두 눈알이 번뜩였다. 핏발이 잔뜩 서있어 혐오스러운 모습이지만, 그것에 물러나기에는 녀석이 너무 빠르게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검기!’
그뿐이 아니다. 탁하지만 크게 넘실거리는 검기가 괴인의 손에서 번뜩이기 시작했다. 일류 고수쯤은 되어야 비로소 보일 수 있다는 검기. 내공을 유형화시킨 그 강력한 힘을 놈이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젠장. 버틸 수 있지?”
[그…… 가능은 합니다만……. 크앗?!]
쩌엉!!! 검과 검이 부딪혔다. 정확히는 검기가 솟아오른 놈의 검과, 혈마검 그 자체가 부딪힌 것이다. 천화 역시 약간의 내공을 사용하긴 했지만 아직 검에 불어넣을 정도는 아니었다. 놈의 공격을 버텨내기 위해 신체를 강화하고 맞부딪힐 힘을 만들어 냈을 뿐.
“쿨럭!”
그렇기에 검을 맞댄 여파는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경지로만 따졌을 때, 삼류도 되지 못한 초짜 무림인과 일류급의 무인이 격돌을 한 셈이니까. 천화는 속에서 올라오는 피를 왈칵 토해냈고, 그러면서도 상대를 놓치지 않고 똑바로 주시했다. 하지만 상대는 막아낼 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조심성이 많은 것인지 연속으로 몰아치는 대신 다시 거리를 벌렸다.
“퉤! 진짜 일류급이다 이거지?”
입안에 고인 피를 퉤 뱉어낸 천화가 전의를 불태웠다. 처음의 격돌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실력 파악이 목적이었으니까. 또한 혈마검이 검기를 맨몸으로 버텨낼 수 있는지에 대한 테스트이기도 했다.
“괜찮아?”
[윽, 좀 아프기는 한데 참을 만합니다. 주인님의 그 검에 비하면…….]
“좋군. 그럼 간다.”
그리고 확인되었다. 검의 재질 자체가 특수해서 검기를 막아낼 수 있는 것은 물론, 혈정에 응축된 혈마기가 저절로 풀려나오며 검기급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강화 효과까지 가져온다는 것을. 그렇다면 걱정이 없었다. 설령 상대가 일류 고수라 해도, 내공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검기까지 뽑아낼 수 있다고 해도.
“어느 쪽인지는 대충 알겠군.”
자신은 최강의 고인물이자 한때 고금제일인으로 불렸던 인물이니까. 눈알을 살살 굴리며 빈틈 노리는 놈에게 슬쩍 빈틈을 열어보이자 다시금 녀석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해주지 않는다. 내공 싸움으로 가는 바보짓은 필요 없었기에 천화는 이도류 아닌 이도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후웅!! 놈이 다가오는 순간 천화가 휘두른 것은 다름 아닌 횃불이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놈의 앞으로 휘두르자 움찔 몸이 떨리고 몸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꽤 오랫동안 어두운 동굴 안에만 있었는지, 녀석의 눈은 상당부분 퇴화되어 빛에 약한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첫 격돌에서 자신에게 다가올수록 미세하게 주춤거리는 녀석의 움직임을 보았기에 천화는 자신있게 횃불을 내질렀다. 경직된 놈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무형보를 이용해 오히려 놈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내디뎠다.
“캬악!!!”
괴성을 내지르며 다시금 검기를 끌어올리는 상대. 그러나 천화의 눈에는 그 경로가 훤히 드러났다. 놈이 보법을 밟는 방식과 거의 본능적으로 내지르는 검의 궤적을 통해 놈이 익힌 무공이 무엇인지 대충 가늠을 한 것이다. 고작 한 수를 겨루어보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아니지만 그 후보군을 추리는 것은 가능했다. 일단 일류에 오를 수 있는 무공을 추리고, 그중에서 비슷한 보법의 경로를 가진 문파를 추리고, 또 저 같은 검기공을 펼치는 무공을 추리니 몇 가지로 압축되는 것이다. 오직 고인물들만 할 수 있는 추리였지만 천화는 아무렇지 않게 해내었다.
“정파였네?”
푸확! 상대의 무공의 연원을 파악해내는 것은 물론, 그 약점과 파훼법까지 떠올리며 빈틈을 향해 혈마검을 밀어넣었다. 상대의 내공 운용이 꼬이게 만들고, 손발이 어지러워지도록 만들었다. 비록 힘과 속도가 부족해 옆구리를 베어내는 것에 그쳤지만 승부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