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싸우는 데 비겁한 게 어디있어? (3)2021.01.07.
취권. 그것은 중국 영화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남은 전승이 없기는 해도, 무신지로에도 역시 취권이라는 개념은 존재하는 것이다. 술 한 잔을 걸친 듯, 근육이 이완되고 비틀거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이 무공은, 아주 기본적인 움직임을 표현한 기본 초식 이외에는 초식이랄 만한 것이 거의 없는, 마치 무초식의 무공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력이 형편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초반에 따라 할 수 있는 초식이 없어 숙련도를 올리기가 까다로울 뿐, 제대로 익혀낼 수만 있다면 기상천외한 투로를 이용해 아주 위력적인 힘을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취권이었으니까.
‘그래서 무형보와도 잘 맞고.’
비틀 이 정도 술에는 끄떡없는 천화였지만 죽엽청 한 병을 원샷으로 들이켠 까닭인지 적당한 정도로는 취기가 올랐다. 취한 모습을 따라 할 뿐, 취할 필요는 없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실제 술을 적당히 들이켰을 때 가장 큰 위력이 나는 것이 사실이니 어쩌겠나. 그 힘을 제대로 이용하기 시작한 천화는 다리가 풀린 듯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불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나운 기세가 당장이라도 천화를 베어낼 듯 점점 범위를 넓혀갔다.
‘육성검은 너무 교과서 같단 말이지.’
교과서 같다는 게 나쁜 의미는 아니다. 정직하지만 오히려 인간미 없을 만큼 너무 정확해서 허점과 사각을 모르는 무공인 까닭에, 사정거리 안으로 대책 없이 들어섰다간 누구라도 난자 당하고 말 터였다.
‘빈틈이 없다면, 만들면 되지만!’
천화가 이류 수준만 되었더라도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취권. 취권이 가지는 변칙과 변화라면, 빠르고 빈틈없지만 정직하게 질러오는 고불의 검을 감당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오랜만이라 제대로 될지 모르겠네.”
짬짬이 익혀두긴 했지만 아직 숙련도가 낮아 제대로 펼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인물의 취권에는, 또 천화의 취권에는 특별한 것이 있으니까. 자신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와라!”
비틀거리는 천화를 보며 고불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친다. 언뜻 보기에는 선공을 양보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아직 성취가 높지 않아, 완벽한 육성검의 공간을 만들어내려면 선공보다 후공을 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즉, 고불이 작정을 했다는 소리. 히죽 웃으며 호통 치는 그를 바라본 천화는 망설임 없이 무형보를 펼쳐 고불에게 달려들었다.
‘더, 더, 더……. 지금!’
주정뱅이 걸음처럼 제 몸을 가누지 못하듯 도도거리며 앞으로 쏠리는 천화의 몸뚱아리가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순간, 고불의 검이 떨쳐졌다.
“성류낙하!”
일격도 아닌, 세 번의 연격이 한 호흡 만에 펼쳐지는 섬뜩한 공격이었다. 극성에 이르면 일곱 번의 연격이 동시에 펼쳐지는 무시무시한 초식. 풀썩.
“?!”
그러나, 천화는 기상천외한 움직임으로 그것을 피해냈다. 아니, 이걸 회피 동작이라고 볼 수는 있을까? 한창 달려들다가, 그대로 술에 취해 잠이 든 것처럼 제 자리에 거꾸러진 것이다. 파바밧! 멈춰설 것까지는 예상을 했기에 거리가 짧지는 않았지만, 바닥에 쓰러질 것까지는 상상도 못했기에 세 번의 검격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때, 고불이 당황하는 틈을 이용해 천화가 몸을 휘돌렸다. 퍼억! 상체와 허리 힘만을 이용해 몸을 살짝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다리를 풍차처럼 돌려 회전시킨 것이다. 윈드밀. 소위 비보이라 불리는 댄서들이 사용하던 기술이 무공의 일부로 화(化)하는 순간이었다.
“큭?!”
덕분에 로우킥처럼 날아든 발차기를 얼른 발을 들어 방어해낸 고불이 인상을 구기며 검을 내리쳤지만, 천화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전신에 힘을 주어 회전을 멈추고 검을 피해내더니, 그 상대로 팔을 쭉 뻗어 몸을 밀어올리며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듯 발차기를 날린 것이다. 휘청. 덕분에 힘의 축이 무너진 고불의 몸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일류 고수는 노름으로 딴 게 아니다. 고불은 진심으로 천화를 베어버릴 기세로 몸이 흔들리면서도 다시 검을 떨쳐냈고, 천화는 그대로 몸에 힘을 풀며 다시 바닥에 누워버렸다.
“이게 무슨!”
몸을 웅크렸다가, 용수철처럼 튕겨일어난다. 그 반동까지 이용해 매우 빠른 속도로 몸을 일으키는 천화의 손에는 어느새 혈마검이 들린 상태였다. 까앙!! 혈마검처럼 절세의 보검은 아니지만 나름 명검인 고불의 검이, 충검을 사용한 것도 아니건만 단번에 이가 나갔다. 크게 당황하며 물러서는 고불을 따라붙은 천화가 두 번의 연격을 더 떨쳐냈지만, 고불은 이를 악물며 그것을 버텨냈다. 검이 상하는 것은 가슴 아팠지만 심장이 꿰뚫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세 번의 공격을 막아내며 몸을 웅크리던 고불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 다시 검을 떨친 것은 그다음이었다.
“유성참!”
떨어지는 유성과도 같은 빠르고 묵직한 일격. 동작은 크지만 회피해 내기는 만만치 않다. 근육을 쥐어짜낸 듯 거력이 실린 데다, 저걸 어설프게 피하려 드는 순간 어떻게 변화를 일으킬지 알기 때문이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각도로 꺾여 허리를 자르려 들 테니까. 휘익- 그럼에도 천화가 택한 것은 횡이동이었다. 가볍게 오른쪽으로 몸을 피하는 순간, 예상대로 90도 각도로 꺾인 고불의 검이 허리를 자르려 들어왔다.
“읏차!”
그 순간 천화가 넙쭉 절을 하듯 엎드렸다. 등허리를 쓸 듯 고불의 검이 지나가는 순간, 허리를 튕겨 뒷발을 차올렸다. 원 투. 머리와 다리의 위치가 뒤바뀌고, 차올려진 발뒷꿈치가 차례로 고불의 머리를 때렸다. 내공으로 아주 약간 신체 능력을 향상 시켰을 뿐이지만, 머리가 울리자 고불도 주춤거리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한 바퀴 돌아 일어나며 훅을 한 방! 후웅!!
‘치는 척하다가 돌려차기!’
그러나 주먹은 뻗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상체만 돌리며 회전력을 더하더니, 발차기로 그의 관자놀이를 찍어버린 것이다. 카포에라. 무술 수련을 금지당한 노예들이 춤의 형식을 본떠 만들어낸 위력적이고도 유연한,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현대의 무술이 천화의 몸을 통해 재현된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변칙적인 움직임이 취권이랑 딱이니까.’
고인물들이 취권이라는 무공 같지 않은 무공으로 절정 이상의 고수들까지도 상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카포에라라는 현실의 무술을 접목시켰기 때문이었다. 취권을 통해 무공화되고, 위력과 속도가 증폭된 상태로 펼치는 카포에라는 그 자체로도 위협적이지만, 천화가 익힌 무형보의 존재는 보법의 부재라는 약점마저 그 힘이 극대화 된 것이다.
“큭.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긴 임마. 한창 재미들렸을 때 내 취권에 당한 무림인만 해도 4열 종대 앉아번호로 연무장 2바퀴다. 짜샤!’
히죽 관자놀이를 가격 당해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고불이 마구 검을 떨치며 천화의 접근을 막으려 들었지만, 이미 그의 검에서 정교함은 사라진 상태였다. 까앙 깡! 시야까지 흐려졌는지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는 고불에게 천화가 한 다음 행동은 다음 아닌 돌팔매였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돌멩이를 한 손 가득 주워들더니 허공을 난도질하는 고불에게 집어던진 것이다.
“!!”
검 끝에 걸리는 감각에 화들짝 놀란 그가 눈을 부릅뜨며 정신을 집중했지만, 다음 순간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보다 더 심했다. 촤악!
“윽!”
왠 액체가 자신에게 뿌려진 것이다. 설마 독일까? 어쩌면 천화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고 사문의 비전과 보물들을 강탈하기 위해 보낸 자객 같은 것이 아닐까? 주마등처럼 오만가지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곧 그 액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술?’
액체를 뒤집어 쓴 자신의 온몸에서 주향이 가득 피어올랐으니까.
“이게 무슨 짓……!!”
고불도 술은 좀 하는 편이니 그 정도에 취할 리는 없다. 오히려 관자놀이를 얻어맞으며 흔들렸던 방향감각도 어느 정도 돌아왔기에 본능적으로 수비 초식을 펼치며 천화의 위치를 찾았지만, 이번에도 천화는 그의 예상을 가볍게 벗어났다.
“으악!!!”
제대로 시야를 확보하자마자 쏟아지는 한 움큼의 모래들. 검을 휘두르는 정도로는 막아낼 수 없는 그것들이 눈알에 부딪히고 얼굴에 달라붙은 것이다. 모래 뿌리기! 이미 이것은 무인들의 비무라고 보기 어려웠다. 뒷골목 개싸움에서도 치사하다고 손가락질 당할 만한 행동이었지만, 정작 그것을 행한 천화는 아무 반성이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없었다.
‘죽이려고 칼부림하는 마당에 지형지물 좀 이용한 게 어때서?’
아니, 진심으로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돌멩이가, 모래가 뭐 어때서? 자기들은 독을 뿌리고 암기까지 던져대는 마당에? 당장 고불만 하더라도 이번 비무에서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전 비무들에서는 비도 형식의 암기를 사용하기도 하지 않았나? 따지고 보면 암기의 형태만 다를 뿐이지, 돌멩이든 모래든 다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크윽.”
불의의 일격을 당한 고불이 얼른 물러나며 눈을 비벼보지만 제대로 닦일 리가 없다. 미리 뿌려둔 술에 모래가 달라붙으면서 오히려 더 달라붙기만 할 뿐이었다.
“계속할 겁니까?”
그때, 물러서는 고불의 뒷목에 서늘한 기운이 닿았다. 단 세 번의 도약만으로 그의 등 뒤에 돌아간 천화가 혈마검을 들이댄 것이다.
평범한 보법을 밟거나 그저 달려온 것이라면 소리를 통해 그 움직임을 예측했겠지만, 천화의 무형보는 그 형태가 일반의 것과 판이하게 달랐기에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졌소.”
여섯 번째 비무의 승자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다 맞으면서 크는 거지!’
자신 있던 육성검을 사용하고도 패배하자 실의에 빠진 듯 고불의 고개가 푹 숙여졌지만, 천화는 빙긋 웃어보일 뿐이다. 비무 같지 않은 비무에 주변에서 야유를 쏟아붓고 있음에도 마치 환호하는 관중에게 호응하듯 손을 흔들어주며, 엉망이 된 고불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비겁한 수에 당한 것 같아 보이겠지만 이 비무는 그에게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신지로에서도 그가 이런 식의 전투를 수없이 겪은 뒤, 제대로 각성하기 시작하니까.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낭인왕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어차피 있을 차후의 일들을 미리 겪게 해주는 예습일 따름이었다.
‘크으, 비무 몇 번으로 낭인 생활 몇 년치는 줄여주는 것 같은데? 이 정도면 혜자네, 혜자야!’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소. 많이 배웠소이다. 무공 이름이…….”
“취권이요.”
“취권……. 진정 취한 사람의 몸놀림 같더군. 덕분에 조금은 알 것 같구려. 싸움에는 왕도가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감탄하고 인정하고 있는데 왜 이를 가는 것처럼 보일까? 역시 기분 탓인가!
“그럼 정산을 해볼까요?”
“정산? 아, 그렇지. 여기서…… 받으시겠소?”
“에이, 보는 눈들이 있는데. 제 방으로 가시죠.”
이번 비무의 보상으로 금전 뿐 아니라 영약과 기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지 망설이는 고불에게 천화는 가볍게 답변했다. 만약 그가 가진 것을 잃고 싶지 않아 한다면 으슥한 곳으로 끌고가거나 그런 곳을 지날 때쯤 전력을 다해 암수를 펼칠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아직은 고불이 그 정도까지 타락하진 않았을 뿐더러, 천화에게는 든든한 호위무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혈마검을 쥐지 않더라도 비슷할 것 같은데. 아니, 설영이 조금 밀리려나? 그래도 단숨에 결판이 나진 않을 테니까 여차하면 내가 나서도 되고.’
설령 암습을 가한다 해도 이겨낼 자신이 있기에, 천화는 씨익 웃으며 고불을 인도했다. 받아야 할 물건은 그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봇짐 속에 들어있었지만 견물생심이라고, 누군가 그것을 보거나 소문이라도 퍼트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무림에서는, 좋을 일일수록 아는 사람이 적어야 좋은 법이다.
“이걸로 할게요.”
그렇게 객잔으로 돌아온 천화는 방문이 닫히자마자 자신의 보상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