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2)2021.01.12.
전음인가? 아니다. 전음과는 또 다른 묘한 음성이었다. 전음 역시 기로 소리를 실어 상대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거의 비슷하긴 했지만, 기라는 매개를 통해 전달이 되기 때문에 소리에 약간의 잡음이 끼거나 흐릿하게 들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아주 깔끔하고 완벽하게 기를 통제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허나,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귓가에 속삭이듯 또렷하고 부드럽게 들렸다.
[어허, 집중해. 집중!]
덕분에 순간적으로 설영의 자세가 흐트러졌지만 천화의 호통에 금방 회복했다.
‘놀랄 만하지. 나도 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씨익.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는 설영을 보며 천화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지금 천화가 사용하고 있는 능력은 전음이나 다른 무공 따위가 아닌 ‘시스템 기능’ 중 하나인 것이다. 바로 귓속말. 친구 추가가 된 대상에 한하여 거리와 상관없이 대화할 수 있는 기능으로, 삼류 무인이 되면서 해금된 기능 중 하나였다. 본래는 NPC에게 사용할 수 없는 기능이었지만 행동제약이 사라지면서 혹시나 하고 설영과의 대화 중 사용해본 적이 있는데,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설영은 워낙 순간적인 일이고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그저 천화가 조용히 가까이에서 이야기한 것쯤으로 생각하고 넘겼었지만. 반대로 시스템의 보조를 받지 못하는 설영이 천화에게 귓속말을 보내지는 못하지만, 설영은 전음을 직접 사용할 수 있으니 상관없다.
‘혹시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찾기 쉬워졌고.’
설영이 어디에 있든, 대략적인 지역 정도는 친구 목록에서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친구 추가 시스템도 무제한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자신을 동료 이상의 감정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대상 중 최대 10명까지만 설정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또한 선별하여 추가하면 그만인 데다, 경지가 오를수록 친구 목록에 둘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증가하니 문제는 아니었다.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원류검법의 힘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거야? 팔만 휘두르지 말고 상황에 맞춰서 힘의 축을 바꿔야지!]
[손목, 팔꿈치, 팔 전체, 허리와 몸 전체까지! 회전이 일어나는 축이 무엇이 될지 생각을 하라고!]
[그렇지! 이번엔 발끝과 손목! 그 다음은…….]
그렇게 천화의 훈수가 시작되었다. 원류검법은 원을 그리듯 회전하는 검의 원심력에서 그 힘이 파생되는 검법이지만, 중심이 되는 축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에 강점이 있는 것이다. 상대와 맞서는 거리와 시간에 따라, 또 검을 휘두르는 각도와 상대하는 초식에 따라 다른 회전을 발생시켜 방어하고, 회피하고, 공격하는 것이 요체였기에 더욱 무서운 무공이었다. 반면 지금까지 설영이 펼친 것은, 그저 하나의 원을 그리기 위해 크게 크게 동작을 들어가는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동작이 크고 뻔해지고, 상대에게 맥을 끊기게 된 것.
“흡?!”
천화가 그것을 짚어주자 설영의 움직임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더 많은 원을 그려낼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원류검법의 특징을 알아차리고 처음부터 회전을 차단해내던 상대였지만, 한순간에 몇 개의 원을 동시에 그려내기 시작하자 감히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게 된 것이다.
“가라! 설영몬!!”
“……!!”
한 번, 두 번. 설영의 회전을 허용한 순간부터 힘의 균형이 급격히 무너졌다. 이전까지는 압도적이라 할 만큼 상대의 도법이 설영을 무력화시켰지만 이제는 함부로 무기를 맞대는 것조차 꺼려할 만큼 빠르고 강맹한 초식 연결이 이어졌고, 조금 더 지나자 반대로 상대를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윽!”
천화의 장난기어린 외침에도 설영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주위의 소음조차 잊을 만큼 무아의 지경에 빠진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상대하는지,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잊을 만큼 집중을 유지한 채 본능에 내맡겨 검을 떨쳤고, 상대의 전신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갔다.
[야, 그만!!]
무아는 깨달음의 경지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그대로 나를 잊고 무공을 펼치다 보면 크든 작든 깨달음을 얻어 더 높은 경지로 발돋움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생사대적이 아닌 이상 무아에 든 상대를 배려하며 최대한 버텨주는 것이 무인끼리의 예의나 다름없었다.
“멈추라니까!”
까강!!! 허나 천화는 다급하게 그들의 비무에 끼어들었다. 아직 설영이 무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다급히 앞을 가로막으며 혈마검으로 설영의 검을 막아선 것이다.
“아……!”
그제야 설영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쉬움의 눈빛, 그리고 원망의 눈초리로 자신의 도약을 가로막은 천화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흥을 깨버린 천화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정신 안 차려? 누구 죽일 일 있냐?”
무아에 든 것까지는 좋았으나, 검기까지 뿜어내며 폭주해버린 탓에 상대를 죽일 뻔한 것이다. 그 증거로 설영의 검이 땀에 흠뻑 젖은 상대의 목에서 두 치가량밖에 떨어지지 않은 채 멈춰 있었다. 스윽 천화 역시 입가에 살짝 흐르는 피를 닦아내었다. 혈마검을 이용해 혈마기로 설영의 검기를 막아냈다지만 그 충격이 내부를 때리면서 작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워낙 내공 수위가 낮아 금방 회복하고 말겠지만 아슬아슬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졌습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간신히 상황을 파악한 설영이 뒤로 물러나며 사과를 하자, 상대도 몸을 추스르며 패배를 인정했다. 사실 일찌감치 패배를 시인하며 비무를 멈출 수도 있었지만, 무인으로서 다른 무인의 성장을 응원하기 위해 억지로 내공을 짜내 버텨주고 있던 것이다.
‘비무를 하다 보면 목숨을 취할 때도 있긴 하지만, 아직은 안 되지.’
허나 천화가 직접 나선 것은 그가 고마워서라거나 살인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무가에서 죽고 사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니, 비무에서 목숨을 잃는다 해도 누군가 복수를 하려 할 수는 있겠으나 남들에게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그 증거로 당장 이 공터만 하더라도 하루에 한두 명쯤은 늘상 죽어나가는 공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천화가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더 잘 팔기 위해’서다.
‘누군가 죽어나가는 꼴을 보면 망설여질 테니까.’
남은 일류 무인들과 설영의 비무가 끝난 이후, 본격적인 계획을 실행할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계속해야지?”
“응? 계속? 으흠. 미안한데 깨달음을 좀 정리할 시간이 필요…….”
“에헤이. 그게 막 눈 감고 떠올린다고 떠오르는 건 줄 알아? 그럴 때일수록 더 실전을 겪어야 하는 거야. 몸으로 깨달은 거니까 몸으로 익숙해져야지!”
“그……런가?”
어쨌든 비무가 일단락되자 설영은 더 이상의 비무를 멈추고 숙소로 돌아가 참오하기를 원했지만, 천화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굳이 설영이 밀어붙인다면 막을 도리는 없지만 교묘한 말빨로 설득해낸 것이다. 생각해 보면 마찬가지로 강호초출인 데다 자신보다 무공까지 약한 천화가 그런 것을 알 리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천화 덕분에 깨달음을 얻은 것이기도 하기에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다시 시작된 비무. 아직 내공은 충분했기에 설영은 즉시 다음 비무에 임했고, 이번에는 귓속말을 이용한 천화의 조언이 없이도 손쉽게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방랑검객과의 비무를 펼치기 전까지, 설영 스스로가 가늠하더라도 혈마검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이길 수 없다고 여기던 상대였으니까. 그런데 아주 잠깐 무아지경에 빠진 것만으로 이제는 수월히 이길 수 있게 되었다.
“좋아. 계속 해볼게.”
덕분에 이제는 설영이 자발적으로 나서 비무를 청했다. 개중에는 조금 어려움을 겪은 상대도 있었지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천화의 목소리 덕분에 어떻게든 비무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천화는 다시 목돈을 거머쥐게 되었고.
‘진짜 천재인가?’
이렇게 되자 설영도 천화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혈마검이 인정한 천재, 아니 초천재라더니 그 말이 실감나기 시작한 것이다. 전음과 같지만 다른 그 수법을 어떻게 사용한 것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확실히 천화의 수준은 아직도 삼류 초입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삼류 무인이 일류 고수들의 싸움에 훈수를 두어 승부를 뒤바꾼다?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일단 믿지도 않겠지만, 그 사실이 증명되기라도 한다면 어마어마한 파장이 일어날 소리였다. 그 정도라면 천고의 기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남의 싸움에 훈수 둘 때는 한 수 더 높은 경지에서 바라볼 수 있다지만, 삼류와 일류 사이에는 몇 수라고 하기 어려운 까마득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제 더는 없는 건가?”
그렇게 중간에 운기까지 해가며 내공을 회복한 설영은 몇 번이고 비무를 거듭했다. 공터에 자리한 모든 일류 무인들을 꺾는 데 성공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덕분에, 천화도 설영에게 빌려준 금자 10냥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번다더니, 딱 그짝으로 설영이 번 돈은 고작해야 보상금조의 은자 이삼십 냥이 전부였기에 억울할 만도 했지만, 어쩌겠나.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을!
“그럼 이제부터 파티다!”
결국 설영은 땀에 흠뻑 젖도록 비무를 펼쳐 번 돈으로 겨우 첫 달 이자 정도를 벌어들이는 것에 만족해야 했고, 천화도 미안했는지 객잔으로 돌아가 요리를 마음껏 주문해 먹고 마셨다.
“또?”
그리고 다음 날. 천화는 날이 밝자마자 설영을 데리고 다시 공터를 찾았다.
“으흠.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아무리 돈이 좋아도 같은 상대를 여러 번 패배시키는 건…….”
천화의 억지에 따라오기는 했지만 설영의 표정은 영 좋지 않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상대를 조롱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우위가 명백한 상대를 연거푸 패배시키는 것은 무인으로서의 명예를 짓밟는 일처럼 여겨진 까닭이다.
“무슨 소리야?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니라 쟤들이 덤빌 건데.”
“응?”
그러나, 천화의 생각은 설영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푸욱 푸욱. 공터 한편에 자리 잡은 천화가 두 개의 깃발을 바닥에 꽂았다. [비무행. 삼류무인. 천화. 도전 비용 은자 1냥. 승리 시 5배 금액 보상. 이류 이하면 누구나 환영!] [비무행. 일류무인. 설영. 도전 비용 은자 3냥. 승리 시 5배 금액 보상.] 바로 비무행 깃발이었다. 어제까지는 그들이 이 깃발을 꽂은 이들에게 도전해왔지만 이제는 도전자에서 도전을 받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다만 별호는 적어 넣지 않았다. 별호라는 것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인간 수레’나 ‘이놈 아저씨’ 따위를 적어 넣을 수도 없지 않은가?
‘뭐, 어차피 별호를 적는 건 이름을 날리려는 의도일 뿐이니까.’
반드시 넣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게다가 그런 것쯤은 가볍게 덮어버릴 문구가 그 다음에 적혀 있었으니 말이다. 승리 보상이 무려 5배. 대신 도전 비용은 천화만 이류 무인의 수준으로 잡았을 뿐, 일반적인 동급 무인들의 것과 다르지 않았기에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무패행진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한 번쯤 돈에 혹해서 도전해 볼 수 있을 만큼.
“이거…….”
미리 상의가 된 것은 아니었기에 설영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표정을 회복했다. 확실히 이렇게 적어 넣으면 도전자가 더 늘어날 테니까. 자신의 뜻이 아니라고는 해도 천화가 보상 금액을 보태줄 것 같지는 않지만, 설영 역시 이곳에서 비무를 행하며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잡았다.
“자, 쌉니다. 싸요. 삼류 무인에게 은자 1냥으로 도전하고 5냥 받아가세요! 이 정도면 거저입니다. 거저!”
잡상인 같은 천화의 저렴한 호객행위만 아니었다면 실력에 자신 있는 멋진 무인의 모습처럼 보였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천화가 적어 넣은 문구와 목청 높인 호객 행위 덕분에, 그들의 앞으로 무인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비무가 거듭될수록 전낭에는 은자가 가득해졌고, 무패를 기록하며 돈을 쓸어담는 두 사람의 소문이 이웃 마을과 도시로까지 마구 퍼져나갔다. 모든 것이 천화의 계획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