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3)2021.01.14.
삼류무인이면서 이류무인들을 가볍게 때려잡는 천화와, 제법 명성을 얻은 일류고수들까지 가뿐히 제압하는 설영. 두 사람의 소문은 주변 일대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특히 천화의 무위에 대해 의혹을 제시하며 시비 걸던 이들이 천화 한 명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고, 설영과 비무를 위해 모여든 일류고수들이 입을 모아 천화가 삼류 수준의 내공을 지녔음을 공증하면서 소문은 날개 돋친 듯 퍼져나갔다.
“정말 이거 괜찮은 거야?”
“걱정 말라니까. 오히려 쫓기는 입장에서 이런 일을 벌이고 다닐 거라고 생각 못하는 법이야.”
그렇게 두 사람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쫓기는 입장이던 설영이 부담스러워했지만 천화는 걱정 말라는 이야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당장 혈견을 끌고 오지 않는 이상, 그들이 달아난 혈마의 후예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 일부러 혈마나 그들을 쫓는 이들에 대한 정보도 수소문하지 않았기에 지금 그들은 전혀 연결점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슬슬 혈견들의 유통기한도 끝날 때고.’
물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혈견을 이끌고 이곳에 나타나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혈견은 피 냄새를 기억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대신 추적 능력이 활성화되어 있는 제한 시간이 10일가량으로 아주 긴 편은 아니기에, 그들을 찾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일 가능성이 컸다. 오히려 혈견들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의 결백을 증명해주는 역할을 할지도 모르지 않나? 때문에 천화는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명성이 올라가고 한쪽에 벌려둔 전낭에 은자가 가득해질수록 누군가를 기다리듯 조금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이제 나타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정말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굳이 이곳에 머물며, 파격적인 보상을 내걸어 소문이 나도록 유도한 것도 모두 한 사내를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무인들을 상대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뭘봐? 꺼져!”
흉흉한 기세를 뽐내며 공터로 들어서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흐, 흑겸살광?”
“히익! 도망쳐!”
“저 미친놈이 여길 왜 온 거야?”
“쉿!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괜히 불똥 튀기 전에 멀어지자고.”
흑겸살광. 귀주성에서는 꽤나 유명한 흑도의 인물이었다. 사파에 속한 이들의 손속이 매섭기로 유명하지만, 그중에서도 광적으로 살인을 즐긴다 하여 붙은 별호답게 평상시에도 진득한 살기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놈이 공터에 들어서자 이류 이하의 무인들과 구경꾼, 도박꾼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괜히 구경을 한답시고 남아 있다가 된서리를 맞을까 염려한 것이다. 그나마 남은 이들은 일류급의 무인들이었지만, 그들이라고 자신이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흑겸살광이라면 악명도 악명이지만 그 실력 자체가 일류의 끝자락에 닿았다 평가되는 인물이니까. 여기 있는 이들이 피해를 감수하고 동시에 덤빈다면 제압 할 수 있겠지만 그럴 사람도, 이유도 없었다. 때문에 모두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몸을 빼낼 기회만 재고 있었다.
“오, 살쾡이 왔냐?”
“…….”
그때, 정적을 깨고 나온 목소리에 주위가 더욱 싸늘해졌다. 천화가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손을 흔들며 그를 맞이한 것이다.
흑겸살광이라는 별호를 유치하게 바꾸어 말하면서.
‘진짜 친구인가?’
‘근데 뭐가 저렇게 분위기가 살벌해?’
‘X알 친구, 뭐 그런 건가?’
‘풉. 근데 진짜 듣고 보니 살쾡이처럼 생기긴 했네.’
순간, 공터에 남은 이들이 천화와 흑겸살광 호랑을 오랜 친구라 착각할 정도였다.
“어……. 나를 아나?”
심지어 호랑의 입에서도 살기어린 험악한 말 대신 의문어린 물음이 튀어나왔을 정도다.
“아니! 초면이야!”
꿈틀 하지만 이어진 천화의 해맑은 대답에 혈압이 치솟았는지 이마를 비롯한 전신에서 힘줄이 꿈틀거렸다.
“감히 이 흑겸살광 님을 조롱하다니……!”
파앙! 급격히 끌어올린 내공에 주변 땅들이 터져나갔다. 그 모습에 각을 재던 일류 고수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몸을 빼낸 것이다. 그들과 함께 싸워줄 만큼의 의리나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죽여주마! 위로금으로는 유품 정도만 받아주지!!”
휘익! 분노한 호랑이 전력을 다해 들고 있던 검은 낫을 집어던졌다. 그를 지금에 있게 한 흑겸이 천화의 머리를 찍을 듯 날아갔다.
“어휴, 왜 눈에 띄게 까맣게 칠하고 지랄이야? 이럴 거면 저녁에 찾아오든가!”
그러나 천화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꺾어 흑겸을 피해냈다. 그 말처럼 백주대낮에 까맣게 칠한 겸 따위를 던져대니 발견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노릇인 것이다.
“흥!”
일류고수의 공격을 삼류 무인 따위가 피해낸 것이 가상한 일이었지만 호랑은 상관없다는 듯, 천화에게 달려들며 팔을 휘저었다. 흑겸과 연결된 쇠사슬이 출렁거리며 흑겸이 방향을 바꾼다. 사슬은 사슬대로 천화의 목을 조이기 위해 움직였고, 흑겸 또한 홱 방향을 틀어 천화의 심장을 찍어갔다.
“다 보인다니까.”
데굴. 이번엔 나려타곤이다. 고인물들 사이에서 ‘잘 쓰면 무적’이라 불리는 기술. 나려타곤을 두 번이나 연속으로 사용해 흑겸이 회전하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자 흑겸과 연결된 쇠사슬이 순간 꼬였지만, 호랑은 기술 좋게 다시 반동을 주어 힘을 되살렸다. 휘리릭 콰직! 쇠사슬에 감긴 것이 형편없이 부서졌다. 충검의 묘리를 섞어 흑겸과 사슬 전체에 내공까지 실은 까닭에, 평범한 힘으로는 저항할 수도 없이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거참, 사람 말 못 믿네! 너 친구 없지?”
그렇게 흑겸과 연결된 사슬이 박살낸 깃대를 천화가 재빠르게 잡아챘다. 호랑이 박살낸 것은 다름 아닌 비무행 깃발의 깃대였던 것이다. 그 옆에서 천화는 씨익 웃으며 부러진 깃대를 놈에게 집어던졌다.
“가소롭구나!”
퍼엉! 투척한 깃대가 호랑의 주먹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저 쳐낸 정도가 아니라, 힘의 차이를 보여주겠다는 듯 터트려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뭐? 그게 천화에게 되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겁을 먹을 이유가 없다.
“가라, 설영몬!”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까앙!!! 비산한 깃대의 조각들이 시야를 어지럽히는 순간, 천화의 곁에 있던 설영이 그에 맞서 달려나간 것이다. 호위무사의 역할을 맡아주기로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저자를 천화에게 맡겨두었다가는 혈마화를 해야만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으니까. 톡 톡
“미안, 아조씨. 일류급은 이 녀석 전담이라!”
천화가 홀로 굳게 선 설영의 비무행 깃발에 적힌 문구를 가리키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흑겸살광의 무위는 설영을 웃도는 수준이었지만,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사슬 겸(사슬낫)을 무기로 하는 이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는 미리 훈수를 두어둔 상태였으니까.
“아참, 걔 현상금 금자 5냥임!”
“뭐?”
거기에 천화가 응원 아닌 응원의 메시지까지 끼얹었다. 현상금 금자 5냥. 관에서 건 현상금은 아니었지만 흑겸살광이 죽인 이들 중 인근 마을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유가장의 막내가 있었기에 그만한 현상금이 걸린 것이다. 생사를 불문하되, 만약 살려온다면 추가금까지 지급하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럼에도 흑겸살광의 무위가 대단해 몇 개월째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천화는 놈을 잡을 계획이었다. 애초부터 한자리에 머물며 소문이 퍼지기를 기다린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니까.
‘감히 내 돈을 노릴 생각을 하다니. 어림도 없지!’
천화도 천화이지만, 흑겸살광 역시 어지간히 돈독이 오른 인물인 것이다. 아마도 오늘 그들을 찾아온 것 역시, 그들이 무패의 비무행을 거듭하고 있다는 소문 따위가 아닌 그들이 벌어들이고 있는 수북한 은자를 노린 것일 터였다. 그러라고 일부러 전낭을 크게 벌려둔 것이기도 하고.
“우리는 우리끼리 놀아볼까?”
그렇게 설영이 호랑을 상대하는 동안, 천화는 놈의 수하들에게 달려갔다. 놈만큼은 아니지만 살인귀의 곁에 붙어다니는 놈이니 하나 같이 흉악하기 짝이 없는 놈들인 것이다. 허나 천화와 설영을 어지간히도 얕본 것인지, 그래봤자 이류 끝자락의 수준일 뿐이었다. 천화로서도 충분히 겨루어볼 만한 수준의 무인들이라는 뜻. 그들이 사용할 충검은 위협적이지만, 이쪽에는 혈마검이 있었다.
[흐흐. 이런 놈들의 피는 자극적인 맛이 있죠!]
혈마검 또한 천화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적당히 충검 정도로만 하자.’
[넵.]
원한다면 검기의 형태로도 힘을 일으킬 수 있는 혈마검이지만 천화가 요구한 것은 딱 충검 정도의 힘이었다. 그 이상은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일 뿐더러, 지난 지하수로 탈출 때문에 꽤 많은 혈정의 기운을 소진한 까닭이었다. 만약의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혈정의 기운을 남기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죽어라!!”
그런 의미에서 천화는 그들과 검을 섞어줄 생각도 별로 없었다. 뭐하러 힘을 써가며 저 따위 놈들과 놀아주겠나? 그냥 일방적으로 박살을 내면 그만이지!
“흑우들아, 귀찮으니까 얼른 끝내자.”
흑광삼우. 흑겸살광의 수하 셋을 싸잡아부르는 그들의 별호를 줄여부르며 천화가 가볍게 파고들었다. 놈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각기 검, 창, 도였다. 거리가 다르고, 투로도 다르고 쓰임도 다른 세 가지 무기를 절묘하게 떨쳐 합공함으로서 일류 고수까지도 상대할 수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 무시 못할 상대였지만, 적어도 천화에게는 흑우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쐐액- 가장 먼저 날아오는 것은 사거리가 가장 긴 창 쪽이었다. 그러나 이류 수준의 내공을 쓰고 있음에도, 고불이 사용하던 창술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의 찌르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안에 담긴 묘리와 창술에 대한 이해가 달랐으니까. 천화는 어깨를 비틀어 자세를 낮추며 가볍게 피해냈고, 놈이 여느 창수들처럼 창대를 튕겼지만 수준이 낮은 까닭에 그 반동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 정도면 뎀프시롤도 필요 없을 정도다. 서걱!
‘굳이 칼질을 하지 않을 이유도 없고.’
그 한 수로 놈의 실력을 완전히 가늠해낸 천화가 혈마검을 위로 쳐올렸다. 창대의 절반가량을 비스듬히 잘라내버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천화는 잘려나온 창의 반쪽을 잡은 뒤, 몸을 휘돌려 그것을 다시 정면의 창수를 향해 집어던졌다. 내공까지 가미된 근거리 투창! 적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지는 것을 발견했지만, 끝까지 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놈!!”
“썰어주마!”
좌와 우에서 각각 휘둘러오는 검과 도의 궤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각 가슴과 허리를 베어오는, 약속된 합격이었기에 피할 곳도 마땅치 않은 상태. 천화는 몸을 허리 아래까지 푹 숙이며 혈마검을 쳐올렸다. 그저 막아낸 것이 아니라, 정확히 검 끝으로 날아오는 검면을 아래에 위로 때려낸 것이다.
“엇?!”
그러자 횡베기에 불과하던 검 끝이 사나워졌다. 마치 거창한 초식처럼 허공에서 기묘한 변화를 일으키며, 동료를 향해 쏘아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검이 솟아오르면서 검을 휘두르던 놈의 몸도 살짝 떠올랐다. 자신의 검이 동료의 가슴을 베어낼 듯 날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동료의 도가 자신의 머리를 쪼개오고 있었다.
“머, 멈춰!!”
“크윽! 너도 멈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천화는 그저 쪼그려 앉아있을 뿐인데, 그 위에서 놈들이 검과 도를 휘두르며 서로를 베어가는 것이다. 억지로 멈추어서려 노력하는 듯싶지만, 반대로 서로 간을 보며 힘을 아끼고 있는 것이 천화의 눈에는 훤히 들어왔다. 자신은 멈췄지만 상대가 멈추지 않는다면? 베어지는 것은 자신뿐일 테니 말이다.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춰온 동료라지만, 자신의 목숨 앞에서는 한없이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원류일검.”
그때, 천화가 한 가지 약을 더 쳤다. 원류검법의 시작을 알리는 원류일검을 펼치며, 혈마검으로 큰 원을 그리듯 회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경로에는 놈들의 발목이 있었다.
“큭?!”
“으악!!”
따끔할 만큼 얕게 베어냈을 뿐이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온 정신이 힘 조절에 팔려있던 둘의 정신이 흐트러졌으니까. 푸확! 푸욱! 그 덕분에 힘 조절을 해야 할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렸다. 도가 얼굴을 베었고, 검이 심장을 베고 찔렀다. 동귀어진. 합공을 펼치려다 서로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고 만 두 흑우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