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살려는 드릴게 (1)2021.01.17.
천화가 발목을 살짝 베어버린 까닭에 중심을 잃고 서로를 향해 쓰러진 두 흑우들의 몸이 서로 겹치듯 쓰러졌다. 푸욱! 그 위로 혈마검이 꼬치를 꿰듯 박혀들었다. 츠츠츠츳. 게걸스럽게 놈들의 피를, 생명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이걸로 혈마검도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할 수 있겠지.
“이제 둘뿐이네?”
씨익. 그사이 천화는 복부에 잘려나간 창날이 틀어박힌 상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이 괴물아!”
“허어. 사람한테 괴물이라니, 실례라고?”
홀로 남은 흑우는 차마 창대를 뽑아내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칠 뿐이었다. 그것을 뽑아내는 순간, 과다출혈이 일어날 테니까. 하지만 주무기인 창마저 잃어버린 녀석이 천화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천화는 그대로 달려가 놈의 안면을 후려쳤고, 놈은 대자로 뻗으며 전의를 상실했다. 이미 금창약 따위로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이니, 그대로 두기만 해도 알아서 숨이 끊어질 터. 천화는 놈을 괴롭히는 대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중인 호랑과 설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법 잘하고 있는데? 확실히 재능이 있단 말이야.”
그곳에서 설영은 흑겸살광을 상대로 꽤나 선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력으로 익힌 혈마신공을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고작 원류검법만으로 놈에게 잘 버텨내고 있었다. 일류의 끝자락쯤 된다면 혈마검을 쥐지 않은 설영의 전력과도 비슷할 텐데 말이다.
“단점이 명백하긴 해서 다행이군.”
아마도 사슬겸을 사용하는 녀석의 단점이 명백하기 때문이 아닐까? 흑겸과 연결된 쇠사슬에까지 충검의 묘리를 섞지 않는 이상 남들보다 많은 내공을 소모해야 하는 데다, 흑겸을 투척용으로 사용할 때마다 설영이 외려 적극적으로 쇠사슬을 휘감아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하도록 만드는 탓에 제대로 승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투척과 사슬을 이용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흑겸을 직접 휘두르는 편이 나을 터였다.
“슬슬 놈도 알아차린 것 같지만.”
그것을 호랑도 깨달았는지, 다시 흑겸을 제 손으로 회수했다. 이대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 것인지, 천화가 수하들을 모조리 처치한 것을 확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놈의 전투 방식이 변할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해보였다.
“쥐새끼처럼 잘도 피해 내는군. 그럼 이것도 피할 수 있는지 보자!”
타닷! 흑겸을 오른손에 쥔 호랑이 직접 설영을 베어갔다. 우우웅! 심지어 검기, 아니 겸기까지 피워올리면서. 이렇게 되면 내공이 부족하고, 무공에 대한 이해가 낮은 설영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일류 수준에서는 아직 초식에 의존해 검기를 피워올리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는 이상 검기만을 일으키거나 무공에 맞는 내공심법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검기를 쏟아내는 것이 어려운 까닭이다.
“투수, 와인드 업……. 던집니다!”
쐐애애액- 바로 그때, 천화가 끼어들었다. 마치 야구에서 투수의 동작과 같은 자세를 취하더니 무언가를 냅다 집어던진 것이다. 내공까지 실어 던진 것이기에, 삼류라 해도 그 위력이 만만치가 않다.
“어딜!”
까앙!! 그러나 호랑은 쇠사슬을 감은 왼주먹을 휘둘러 가볍게 그것을 튕겨냈다. 허나 그 순간, 막고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천화가 던진 것은 암기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큭?!”
왕만두. 그것도 속이 꽉찬 왕만두였다. 주먹에 부딪히는 것만으로 가볍게 터져나간 만두의 속이 호랑을 뒤덮었다. 크기조차 주먹만 한 놈이었기에 머리와 눈, 입에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고 호랑의 몸이 멈칫거렸다. 워낙 당황스러운 물건이었기에, 사실 그 안에 독이 있는 것은 아닌지 깜짝 놀라 내부를 살펴본 것이다. 당연히 뭔가 있을 리는 없지만, 틈은 이미 만들어졌다. 그 틈을 노리고, 약속한 듯 설영의 일격이 날아들었다.
“원영비격!”
검으로 원을 그리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크든 작든 포물선의 형태를 이루어야 했으니까. 허나 원영비격의 초식은 쾌검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상대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원의 그림자뿐. 그만큼 빠르고 다발적인 공격을 쏟아낸 탓에, 호랑은 처음의 기세와 달리 수비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겸이라는 무기는 수비에 적합한 놈이 아니었다. 검보다 짧다는 점에서는 더 빠르게 휘둘러 방어할 수 있지만 힘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방향은 정해져있으니까. 기형 병기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공격적인 위치를 점해야 하는데, 수비만 하고 있으니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수세에 몰리는 형국인 데다 설영 역시 기회라 여겼는지 검기를 뽑아내 휘몰아치고 있었으니, 잘만 하면 이대로 승리를 굳히는 것도 가능해 보일 정도였다.
‘그럴 리가 없지.’
허나 천화는 알고 있었다. 호랑이 여기서 포기할 리가 없다는 것을. 기회를 노리는 듯한 놈의 눈빛부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이야!]
“흑월만천!”
콰과과광!!! 예상대로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녀석이 한순간 힘을 폭사시켜 흑빛 겸기를 쏟아낸 것이다.
“흥! 나도 알거든?”
그에 맞춰 설영 역시 혈마검법 상의 초식으로 검세를 전환했다. 잔혼비검. 일류 끝자락에 다다른 인물인 만큼 굉장한 내공을 자랑하는 그였지만, 내력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원류검법이 아닌 혈마검법이라면 충분히 맞설 만한 것이다. 내공의 양과 폭발성이라면 혈마신공을 따라올 만한 무공이 천하에 몇 없으니까.
“아니, 이걸?!”
비장의 한 수가 가볍게 가로막히자 호랑이 크게 당황했다. 이런 적이 없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당연히 초승달 모양의 겸기가 상대를 난자하고 목을 잘라내야했음에도 끄떡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설영을 발견하자 당황한 호랑의 손이 어지러워졌다. 섬뜩. 그 순간, 호랑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생사를 다투는 결투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은 미친 짓이었지만, 지금의 행동은 그의 의지와 관계가 없었다. 생존 본능. 그리고 공포.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섬뜩한 살기가 날아온 까닭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간 것이다.
“?!”
하지만 고개가 돌아간 방향에 있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천화. 고작 삼류 무인이 이런 살기를 내뿜는다고? 설마 자신이 감지하지 못하는 기인이 은신해있기라도 한 것인가? 눈동자가 흔들렸고, 몸이 뻣뻣해졌다. 휘릭- 그 순간, 다시 원을 그리려던 설영의 초식이 변화했다. 귀혈참. 호랑이 틈을 보이는 순간, 그것이 함정이 아닌 천화가 무슨 수를 쓴 것임을 확인한 순간 다시 혈마검법으로 돌아온 것이다. 단 일검이지만 그만큼 폭발력이 집중된 참격이 놈의 가슴을 쪼개갔다.
“컥!!”
외공을 익힌 것일까? 호신강기까지는 아니지만 묵직한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그뿐이다. 베어진 가슴에서 폭포수 같은 피가 뿜어졌고, 설영은 혈마의 후예답게 그것을 피하거나 꺼려하지 않은 채 따라붙었다. 필사의 힘을 다해 흑겸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호랑의 허리를 잘라낼 듯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까앙!!! 상처를 입으며 힘이 빠진 것일까? 호랑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오히려 내지른 흑겸이 튕겨 나가며 맨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폭사하는 살의에 찬 눈빛. 생사결에 임하는 무인답게, 설영이 싸늘하다 못해 섬뜩한 눈빛으로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이젠 죽었구나. 호랑의 눈이 질끈 감겼다. 빠악!!
“컥?!”
허나 꼭 감은 두 눈에서 불이 번쩍거렸다. 어느새 다가온 천화가 그의 몸을 잡아끌더니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
“야, 그만해.”
후웅! 덕분에 설영의 참격은 허공을 갈랐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끝장을 보겠다는 듯, 재차 검을 떨친 것이다. 골육양단세. 뼈와 살을 분리시킨다는,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초식이 천화가 붙잡은 호랑을 노려갔다.
“어휴, 이놈의 집안은 피만 보면 눈이 돌아간다니까.”
쩌엉!! 하지만 그 역시도 천화에게, 혈마검에 막히고 말았다. 오랜만에 펼친 혈마신공과 촌각을 다투는 혈투, 그리고 뒤집어 쓴 핏물까지. 여러 요소들이 더해지며 순간 설영이 이성을 잃어버렸지만, 혈마기를 일으켜 부딪히자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혈마기가 서로 공명하며 설영의 정신을 깨운 것이다.
“아이고, 손목이야. 나 죽네!!”
“아, 미안.”
얼른 검을 멈추는 설영과 엄살을 피우는 천화. 실제 손목이 시큰거리는 충격이긴 했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미안하면 현상금 반띵?”
“뭐?”
설영을 낚기 위한 장난스런 표현이었을 뿐. 타닷 그 말과 함께 천화가 재빨리 호랑의 몸에 손가락일 찔러넣었다. 상대의 혈도에 내공을 불어넣어 신체 기능에 이상을 일으키는, 점혈이라 불리는 수법이었다. 점한 것은 마혈. 짚는 순간 상대의 몸을 마비시키는 혈도였기에, 호랑은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괜히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좀 특별한 수법으로 점혈을 했거든. 뭐, 괴로워지는 게 취향이라면 말리진 않을게!”
점혈은 일반 무공과 다른 개념적인 기술이었다. 따라서 요령만 안다면 삼류 무인 이상의 내공 운용 능력이 있는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는데, 그렇다 보니 사람에 따라 어떤 혈도를 점하는지 등에는 차이가 있었다. 꼭 같은 혈도를 내공으로 틀어막지 않더라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혈도가 수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천화가 즐겨 사용하던 점혈법은 조금 특별했다. 혈도에 대한 이해와 고인물 특유의 연구 정신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독문의 점혈법. 그것을 이용해 점혈을 해두었기에, 도중에 상대가 점혈을 풀어버리거나 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았다.
“음……. 좋아, 하지만 싸운 건 나인데 절반은 너무하잖아? 2할을 줄게.”
“2할이라……. 나쁘지 않네!”
순진하게도 천화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우물거리던 설영이 내놓은 제안에 천화도 흔쾌히 승낙했다. 2할만 되더라도 금자 1냥은 족히 될 테니 훌륭하지 않은가?
“영차.”
협상을 마친 천화가 설영을 대신해 호랑을 들쳐메었다. 천화보다도 덩치가 큰 까닭에 짊어진 것인지 깔린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지만, 무려 금자 5냥짜리 귀중한 몸이니 어쩌겠나. 게다가 내공을 이용해 근력을 증가시키자 큰 부담은 없었다.
“부지런히 가면 한 삼 일이면 도착하지 않을까? 그럼 출발~.”
그대로 공터를 떠나, 유가장이 있는 위곡현을 향해 즉시 이동을 시작했다. 이곳에 더 머무를 이유도 없거니와, 시간을 끈다면 호랑의 수하들이 그들의 숙소를 습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차피 떠날 채비야 진작부터 해둔 상태였기에 천화는 망설임 없이 마을을 나섰다. 금자 5냥이, 아니 유가장이 있는 위곡현 쪽으로 방향을 잡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놈의 독문무기인 흑겸과 쇠사슬은 녹여 팔면 제법 돈이 될 테니 소지품창에 챙겨둔 상태였다. @
“여기 오리고기랑 소면 두 그릇, 만두 세 접시. 빨리! 아, 술은 아무거나 시원한 놈으로 먼저 한 병 줘!”
천화가 객잔에 들어서자마자 점소이에게 큰 소리로 주문하며 자리를 잡았다. 쿠웅 허나 활기찬 목소리와 달리, 객잔의 분위기는 순간 싸늘해졌다. 자리를 잡은 천화의 옆자리에 흉악한 외모의 거구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자리 잡은 곳이 의자도 아닌 땅바닥이라는 점. 그것도 짐짝처럼 널브러졌다는 것이 좀 특이했지만 말이다.
“오늘은 여기서 묵자. 이대로면 밤에 노숙을 해야 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노숙은 딱 질색이거든.”
“흠, 그래.”
무신지로에서도 지겹게 노숙을 했었기에, 천화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닌 이상 노숙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설영은 썩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걷느라 그녀 역시 꽤 땀을 흘리고 먼지를 뒤집어썼으니, 씻고 쉴 수 있다는 것만 하더라도 기뻐해야 마땅한 일임에도 말이다.
“천화, 그…….”
“응?”
“아냐. 아무것도.”
이유는 간단했다. 설영의 기감에 무언가 석연찮은 기운들이 걸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