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빈 집은 털어야 제 맛! (1)2021.01.31.
“빈집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유가장을 털겠다고? 도둑질이라도 할 셈이야?”
천화의 말을 들은 설영은 순간 멍해짐을 느꼈다. 천화가 미친놈인 건 알았지만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상대가 사파라면 또 모르겠다. 나름대로 정파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인정된 사파라 해도,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는 악행들을 일삼다 보니 정파 무림인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그들이니까. 하지만 인정받는 정파 계열의 문파나 무림인을 공격하는 것은 크게 지탄을 받는 일인 것이다.
“에헤이. 도둑질이라니.”
“그치? 내가 잘못 들은 거지?”
특히 유가장처럼 평판이 좋은 곳과 척을 지었다가는 호랑처럼 현상금이 걸리거나, 그들과 친분이 있는 주변 문파들의 추격을 받고 사파 또는 악인으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는 것이기에 설영은 현실을 부정했다.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이 사태의 원흉을 제거하는 착한 일을 하려는 것뿐이지!”
“……대체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천화가 생글거리는 얼굴로 뒷말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기 전까지는.
“저렇게 큰 문파끼리 계속해서 싸움을 벌이면 양민들이나 주변에 돌아다니던 무림인들도 피를 보잖아? 그러니 이 한 몸 희생하여 그 원흉을 없애주겠다는 아주 갸륵한 마음씨일 뿐이라구?”
“하아……. 설마 호랑을 죽이려고? 그랬다가는 오히려 싸움이 더 커질 수도 있을 텐데?”
설영이 정문의 문고리를 잡는 천화의 손을 잡아채며 만류했지만, 천화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걔가 여기서 왜 나와?”
“그야, 호림이 흑천문까지 이끌고 여기에 쳐들어온 이유가 호랑을 구하기 위해서이니까?”
“에이. 순진하기는. 그놈은 아마 오히려 호랑이 죽기를 바라고 있을 걸?”
“뭐?”
천화의 설명은 설영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호림은 호랑이 오히려 죽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아까 못 들었어? 생사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놈을 두고 이미 해한 것처럼 얘기했잖아? 아마 살아있는 놈을 발견해도 지들이 죽일걸? 그래야 유가장을 꿀꺽할 명분이 생기니까.”
“어어……. 그럼 그 원흉은 대체 뭐야?”
“뭐긴. 보물이지.”
씨익 천화가 뭐 그런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파와 사파의 알력 다툼처럼 보일 뿐이지만, 혹은 의형제의 복수를 하려는 호림의 감정적인 대응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곳 위곡현에 대한 영향력과 상권을 장악하기 위한 다분히 실리적인 다툼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유가장 어딘가에 숨겨진 보물을 차지하기 위한 시비이기도 했다. 고인물인 천화이기에 알 수 있는 정보들. 애초에 천화가 이곳까지 걸음을 한 것도 고작 금자 10냥의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보물을 손에 넣기 위함이니까.
“하지만 도둑질은…….”
“괜찮아. 도둑놈 걸 도둑질하는 거니까, 의적쯤으로 해두자구!”
아무리 그렇다 해도 설영은 남의 것을, 또 이름난 정파의 세력인 유가장의 보물을 훔친다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허나 그렇게 따지면 천화도 할 말은 있었다. 공명정대한 척하지만 유가장도 알고 보면 꽤나 뒤가 구린 곳이기 때문이다. 세가 급의 문파도 아니고, 애초에 상단으로 일어선 상가도 아닌 고작 장원 수준의 문파가 이만한 재력을 가지기까지 어찌 깨끗한 일만 있을 수 있겠나? 대략적인 것이지만 유가장이, 유가장주가 뒤로 벌인 구린 일들을 몇 가지나 알고 있었고, 그들이 숨겨둔 보물 역시 무고한 인물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라는 걸 알기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나중에 설명해줄게. 슬슬 시간이 됐거든.”
“무슨 시…….”
콰과과광!!! 천화가 가볍게 장원의 정문을 열어젖히는 그때, 장원 내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전각 쪽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무언가 잔뜩 부서지는, 어쩌면 전각이 통째로 무너지는 것인지도 모를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아닛?!”
“지하 뇌옥 쪽이다!”
“흑겸살광이 탈출했다!!”
그 이유는 멀리서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가장의 무사들끼리 상황 전달을 위해 소리치는 소리가 정문까지 들려온 것이다. 흑겸살광 호랑의 탈출. 천화와 설영에게 당하기는 했지만, 근방에서 알아주는 고수이자 유가장주인 유몽헌과도 비견되는 수준의 무인인 그가 탈출하자 유가장의 무사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가자.”
지금이 기회였다. 유가장의 무사들은 호랑의 탈출에 당황할 테고, 반대로 흑월문의 무사들은 사기가 오를 것이며, 흑천문의 무사와 문주인 호림은 혼란스러워질 테니까. 당연히 잡혀있거나, 고문을 받았거나, 죽었을 것이라 생각한 호랑이 멀쩡히 탈출에 성공했으니 당장 유가장과 사생결단을 할 만한 명분이 부족해진 것이다. 호랑을 데리고 탈출하는 것에 집중할 것인가, 그와 함께 유가장을 칠 것인가, 그도 아니면 조용히 처리하고 유가장에 뒤집어씌울 것인가 판단해야겠지. 어느 쪽이든 쉬운 일은 아니기에 한동안 혼란이 절정으로 치달은 것은 분명했다.
[오른쪽에 세 명! 왼쪽으로 가십시오!]
천화도 설영도 딱히 은잠술 따위를 익힌 것은 아니기에 눈치껏 사람을 피해 이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흑천문이 담장을 넘은 사실을 확인한 이상, 두 사람이 맡고 있던 정문에서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따라서 둘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당장 확인하고 문제 삼을 이는 없겠지. 그런데 이런 곳에서 딱 마주쳐버리면 곤란해지는 것이다. 허나, 천화에게는 혈마검이 있었다. 주변의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는 혈마검이 눈치껏 방향을 인도해주었기에, 천화와 설영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장원을 빙 돌아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다.
“이쪽으로.”
거기에 고인물의 감과 경험에서 나오는 인도가 더해지자, 누구도 그들이 유가장 깊숙한 곳으로 잠입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다. 호랑이 탈옥을 한 까닭에 그나마 남아있었어야 할 무사들마저 대부분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전부 밖으로 나간 건가? 호랑이 탈출하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기감을 펼쳐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설영이 그제서야 다시 물었다. 시간이 됐다는 다소 두루뭉술한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마치 천화가 호랑의 탈출을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거? 별거 아니야. 점혈했던 게 슬슬 풀릴 때가 됐으니까.”
“자동으로 해혈이 된 거라고? 하지만 유가장의 무사들이 다시……. 아.”
그제야 설영도 떠올렸다. 천화의 점혈법은 호랑을 구하러 온 흑월문의 일류 무인조차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유가장의 무사들이 추가로 점혈을 했을 테지만, 어쩌면 천화의 점혈법은 다른 점혈을 덧입힐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당장 설영조차 어떻게 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고절한 수법이었으니까.
“쉿. 다 왔다.”
그때 천화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를 죽였다. 돌고 돌아 장원의 가장 심처라 할 수 있는 유가장주 유몽헌의 처소에 도착한 것이다.
‘보기보다 음흉한 놈이라니까.’
보통 보물이라 하면 아무도 모르는,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을 곳에 숨겨두기 마련이지만, 남을 믿지 못하는 유몽헌은 자신의 처소에 그것을 숨겨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유가장과 그 우호 문파들이 흑월문, 흑천문과 부딪히며 거대한 혈사가 일어나고 양패구상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나서 혼자 도망치던 유몽헌의 품에서 발견되어야 할 물건이다. 하지만 보물찾기를 하듯 불타버린 유가장을 뒤지던 유저들 중 하나가 보물이 담겨있던 함을 발견하며 그 위치가 드러난 것이다. 때문에 천화로서도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적어도 의심이 가는 장소가 어디인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침상 밑이라니. 야한 책을 숨기는 어린애도 아니고.’
좀 더 정확히는 침상 밑의 바닥을 열면 들어있는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봐. 금방 가지고 나올 테니까.”
유몽헌의 처소에 들어서자마자 천화는 망설임 없이 침상 아래로 들어갔다.
아예 침상을 엎어버리고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신지로에서 이것을 발견한 인물의 설명에 따르면, 침상을 들어 엎으려 들면 침상과 바닥에 연결된 철사가 당겨지며 기관이 작동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직접 몸을 구겨 바닥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동안 설영이 맡은 일은 당연히 망을 보는 것이었다. 적의 침입으로 인해 대부분의 인원이 밖으로 뛰쳐나가기는 했지만, 아직 전각 내부를 돌아다니며 혹시 모를 침입자에 대비하는 무사들이 존재했으니까.
‘어디 보자…….’
혈마검처럼 생명력을 감지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일류 무인씩이나 되니 기감을 넓히는 것으로 다가오는 이들의 기척을 감지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겠지.
‘이건가?’
그사이 천화는 침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으로 바닥을 쓸며,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곳을 찾았다. 그곳을 열어젖히면 그가 찾던 보물이 숨겨진 장소가 나올 테니까.
‘이걸 열면……?’
사사삭.
“읍.”
그때, 갑자기 무언가 천화를 향해 굴러왔다.
“쉿.”
다름 아닌 설영이었다. 누군가 다가옴을 감지한 설영이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도 침상 밑으로 기어들어온 것이다.
“무슨 일이야?”
“흑천문이 쳐들어왔다는데?”
“문주님은? 놈들을 막으러 나가셨지.”
“우리도 나가봐야 하는 거 아냐?”
그와 거의 동시에, 문 바깥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몇 되지 않는, 전각을 지키던 무사들이 저마다 정보를 교환하는 소리였다. 가장 심처라 할 수 있는 전각을 순찰하는 이들이다 보니 소식이 늦은 모양이었다.
‘수, 숨이……!’
그사이, 천화는 갑자기 막혀온 숨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좁은 침상 밑에 두 사람이 끼어 숨으려니 몸을 밀착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게다가 급히 숨느라 자세를 바로하지 못한 탓에 설영의 가슴이 천화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 좋은 고통이긴 했지만, 워낙 갑작스러웠던 터라 숨을 참는 것이 쉽지 않았다.
“뭐해? 어서 가자고!”
타다다닷.
“푸하!”
“저, 저리 가, 이 변태야!!”
“컥!”
놈들이 사라지고, 천화가 간신히 숨을 토해내자 설영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천화를 걷어찼다. 참았던 숨결이 터져나오며 이상한 느낌이 든 까닭이었다.
“빠, 빨리 찾기나 해.”
“끄응. 지가 먼저 껴안아놓고는…….”
덕분에 침상 밖으로 튕겨나갔다가 다시 기어들어가는 천화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왠지 손해만은 아닌 기분이랄까? 다시 집중하며 손끝에 감각을 집중시키자 비밀 공간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손에 내공을 불어넣으며 잡아 뜯어내자 그 안에서 작은 함이 발견되었다.
“찾았다.”
[비영사][유일] 인영비주 박허가 사용하던 은사. 천잠사를 가공하며 만들어낸 기다린 실로, 검기가 아닌 공격에 끊어지지 않고, 내공을 주입하면 접착력이 생기는 특수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천화는 얼른 그것을 꺼내 물건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빙고.”
제대로 찾은 것이다. 일견하기에는 그저 질기고 예리한 은사로만 보이지만, 귀하디귀한 천잠사를 한 번 더 특수 처리하며 만든 이 은사가 가지는 가치는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게다가 함에 들어있는 은사는 하나도 아닌 두 개였다.
“천잠사? 보물이란 게 그거였어?”
자세한 것까지는 알지 못하는 설영조차도 그저 천잠사라는 것만으로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검기가 아니고서는 잘라내기가 힘든 천잠사는 그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것이다. 내공까지 불어넣으면 검기마저 막을 수 있을 테니까. 특히 이만큼이나 긴 천잠사라면 보의를 지어입어도 대단한 기물이 될 터였기에, 언제 칼침을 맞을지 모를 무림인이라면 그것을 가진 것만으로 여분의 목숨이 하나 더 생긴다 여길 정도였다.
“확실히 그런 기물이라면…….”
때문에 설영도 비로소 천화의 말을 이해했다. 이 모든 사달이 유가장이 가진 보물에서 비롯된 것이라던 그 말을. 여기에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흑천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대방파에서도 무사들을 파견했겠지. 아니, 정파에 속한 문파라 할지라도 무슨 수를 써서든 그것을 손에 넣으려 했을 터였다.
‘정말 유가장주도 저걸 도둑질한 걸까?’
이렇게 되자 천화의 다른 말들도 사실일 확률이 높아졌다. 아무리 그래도 명망 높은 정파의 무인인 유몽헌이 그런 짓을 벌였을까 싶었지만, 천화의 말대로 보물이 튀어나오니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근데 천화는 이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지?’
더불어 천화에 대한 의심도 짙어졌지만, 정작 천화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됐다!”
딸칵. 새로 획득한 비영사와, 우연히 얻은 비영투를 하나로 결합하고 있었으니까. 이 두 개의 기물은 애초부터 하나로 이어지게끔 제작된 것이었다. 인영비주. 쉽게 말해 날아다니는 거미인간이라 불리던 박허의 독문 병기가 천화의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