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이게 다 마교 때문이다 (3)2021.02.23.
불과 하루 사이, 귀주성에 위치한 위곡현은 그야 말로 난리가 났다. 위곡현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던 두 집단인 유가장과 흑천문이 양패구상을 했으며, 흑천문의 형제 문파이자 꽤나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흑월문이 함께 멸문했고, 그들의 전쟁에 동참한 다른 유력 문파들까지 정예 모두를 잃어 한순간에 쇠락해버린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유력 문파가 거의 전부 사라져버린 위곡현을 노리는 승냥이 떼들의 위협을 받으며 큰 혼란이 일어날 만한 일이었지만, 간밤에 다녀간 누군가 덕분에 위곡현의 문파들은 스스로 그 빈자리를 메울 만한 힘과 가능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제 막 잃어버린 무공을 되찾았을 뿐, 일류나 절정급의 무공을 당장 지니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그들이 익히고 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기에, 짧게는 몇 년에서 길어도 십수 년 정도이면 과거의 영광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상성이 좋거나, 불완전한 상태의 무공을 익히고 있던 문파들의 경우 즉각적인 무공의 상승을 맛보기도 했다. 무림인이라는 자들은 대개 경지마다의 벽을 넘을 때마다 무위가 급상승하는 존재들이니까.
‘당분간은 엎치락뒤치락하겠지.’
그렇기에 당장은 즉효를 본 이들을 중심으로 세력 구도가 개편될 테고, 이후에는 신흥 강자들이 출몰하며 천천히 안정을 찾아갈 것이다.
‘저쪽은 조용하네. 하긴, 전서구가 도착하려면 며칠은 걸릴 테니까.’
반면 흑천문의 장원에서 발견되었을 마교에 대한 소식은 잠잠했다. 설영은 자신이 남긴 혈마신공의 흔적을 걱정했지만, 그에 대한 소란 또한 전혀 없을 정도로 조용한 것이다. 그 침묵이 기이할 정도였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소식이 곳곳에 전해지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고, 알았다한들 대대적으로 공표를 할 만큼 크게 꼬리가 밟힌 것도 아니니까.
‘꼬리를 잡는다 해도 몸통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쉬쉬하겠지.’
마교라는 이름이 크고 무거운 만큼, 그것을 입에 올렸을 때 일어날 혼란과 그것이 가져올 파급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아마도 구파일방 오대세가를 비롯한 무림의 핵심 세력들, 그중에서도 수뇌부만이 그 정보를 독점하며 나름의 움직임을 보이겠지.
“거지 놈들은 어디에나 있어서 영 귀찮단 말이지.”
물론 누군가가 흑천문에 잠입하여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쉽지는 않은 일이다. 개방이 통제하고 있으니까. 마을의 패권을 가진 무림 문파가 모조리 사라져버렸음에도 이처럼 혼란 없이, 제 세상인 것처럼 난동을 부리는 자들이 없는 이유는 구파일방 중 하나인 개방에서 직간접적으로 그들을 통제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래 봤자 일개 분타 수준의 인력일 뿐이었지만 개방의 머릿수를 생각하면 금방 위곡현 전체가 거지소굴이 되고 말 터였기에, 천화는 얼른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했다.
“정말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어. 이럴 때 허둥대는 꼴을 보이면 바로 꼬리가 붙는 법이거든.”
하지만 서두르지는 않는다. 일부는 유가장과 흑천문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조사를, 일부는 마을 곳곳에서 구걸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은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테니까. 어차피 조사를 하다 보면 천화와 설영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는 드러날 테지만, 허둥거리거나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바로 표적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때문에 천화는 느긋하게 채비를 하고, 객잔을 떠났다.
‘따라 붙지는 않는군.’
아쉽게도 유가장에 타고 갔던 말들은 되찾을 수 없었다. 흑천문까지 타고 갔다가, 주변에 잘 매어두긴 했지만 소란 통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물론 설령 남아있다 해도 되찾으러 가는 일 자체가 부담스러웠기에 포기했겠지만. 때문에 천화와 설영의 모습은 평범한 무림인 그 자체였고, 개방의 거지들 역시 힐끔 눈길을 줄 뿐 그들을 특별히 주시하는 일은 없었다. 전적으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유가장주가 빠르게 움직여준 덕분인가.’
이 사건의 발단이 된 호랑의 제압과 이송에서는 천화와 설영이 드러났지만, 그 이후로는 이렇다 할 행적이나 활약이 퍼져나가지 않은 것이다. 밤에 기습을 받을 때도 모습을 감추었고, 흑천문에 일어난 화재가 그들의 짓이라는 것도 대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으며, 마지막 전투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보았던 자들은 모조리 죽어 사라졌으니까. 그 말인즉, 두 사람의 행적 중 드러난 부분은 호랑을 제압한 것까지뿐이라는 뜻이었다. 그 이후에 흑천문의 장원에 함께 싸우러 들어가기는 했는지, 애초에 유가장의 식객으로 들어가기는 했었는지조차 당장은 알 도리가 없을 터였다.
‘그래도 여유 부리다간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그러나 조사를 거듭하다보면 개방이나 다른 대문파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이 그들을 불러들이려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관군도 아닌 그들에게 천화와 설영이 따를 이유는 없었지만, 만약 그들이 요구한다면 둘은 결국 따르게 될 터였다. 무림에서는 힘이 곧 법이니까. 그런 이유로, 천화는 서두르지 않지만 빠르게 위곡현을 벗어났다.
“갑자기 마교라니……. 큰일 날 뻔했어.”
그렇게, 두 사람이 위곡현을 벗어난 지 한참이 되어서야 설영이 입을 열었다. 더 이상 기감에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음을 확인한 것이다.
“응? 뭐, 그런가?”
허나 천화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마교. 그들의 발호는 천화의 최종 목적인 정사대전과도 연관이 있었으니까. 사실 오히려 천화의 입장에서는 하루 빨리 중요 분기 임무를 마치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일찍 나와 주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위곡현에서의 사건은 꽤나 달가운 일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마교의 꼬리를 밟기까지만 해도 꽤나 많은 연계 임무를 거치고, 상당히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했는데 이번 일을 잘만 이용하면 그 시간을 대폭 단축시킬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더구나 누군가 자신이 일부러 만들어놓은 흔적들을 제대로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다른 이들이 앞장서서 마교의 흔적을 대신 파헤쳐줄 수도 있었다.
“대체 놈들이 왜 이제 와서 귀주성에 모습을 드러낸 걸까? 놈들이 숨어들었다는 십만대산은 여기서 꽤 멀잖아?”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설영은 여전히 걱정스런 눈빛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정사대전에서 패배하고 모습을 감추었던 마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마인들 개개인의 무위도 대단했지만, 그들의 세력은 구파일방의 그 어떤 곳보다도 거대했으니까. 그들이 준동하는 것이 알려지기만 하더라도 정파 연합인 무림맹이 창설되고 공동 대응이 시작될 만큼 무시무시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 만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사가 되고 불안 요소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거야…… 크게 두 가지 중 하나겠지.”
“두 가지?”
하지만 그 말을 받는 천화의 해답은 간단했다. 마교가 귀주성에 모습을 드러낼 이유는 단 두 가지뿐이라는 것이다.
“첫째, 구파일방 오대세가가 자리 잡지 않은 몇 안 되는 중원의 지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키우고 활동을 시작하려는 것.”
“흐음. 그리고?”
“두 번째는 귀주성에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소수민족들의 무공을 빼앗으려는 것.”
“소수민족의?”
첫 번째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고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유는 설영으로서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마교쯤 되는 이들이 고작 소수민족의 무공을 탐낸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을 던지자 천화가 별것 아니라는 듯, 귀를 후비며 말을 늘어놓았다.
“귀주성의 인구 중 약 4할(40%)이 소수민족이야. 그리고 그들은 저마다 전해져오는 특별한 무공을 가지고 있지. 무림인들은 흔히 그들의 무공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막상 붙어보면 그렇지도 않아. 오히려 어지간한 문파는 상대도 안 될걸? 무공 자체도 강력한 데다 그들의 싸움 방식이 독특해서 중원인들이 대처하기가 쉽지 않거든. 중원에 부족한 외공 수련법들도 많고.”
“소수민족들의 무공이 그 정도라고? 하지만…….”
“인구 수. 그들이 그만한 무공을 지니고도 제대로 중원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 건 순전히 머릿수에서 밀리기 때문이야. 괜히 소수민족이라 불리는 게 아니니까. 만약 그들이 다수였다면 벌써 중원의 대다수가 그들의 땅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설영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말허리를 자르고 나오는 천화의 말에, 혼란이 오히려 가중되었다. 저 말이 사실일까? 소수민족의 무공이 그렇게나 강하다고? 생각해 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새외라 불리는 지역들에는 각각 포달랍궁, 남만야수궁, 북해빙궁, 대막태양궁 등 무림에서도 경원시되는 강력한 집단이 있었고, 장백산 너머의 해동국이나, 중원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자리한 해남파 역시도 막강한 힘과 세력을 자랑하니까. 그렇다 해도 마교 정도 되는 집단이 노릴 만큼인지는 고개가 갸웃거려지지만, 듣고 보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일이었다.
“뭐, 어쨌든 준비단계라는 거지.”
귀주성에서 마교의 은밀한 수작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으니까.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이쪽에는 마을이 없는 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정리하던 설영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설영이 알기로, 이 방향으로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전혀 예상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도주. 당장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으니까. 마교도 그렇고, 개방도 마찬가지다. 그들과 잘못 엮였다가는 자신이 혈마의 후예라는 사실을 감추기 어려워질 테고, 당장은 천화든 자신이든 이 일련의 사건들을 헤치고 나가기에 무위가 부족했기에 일단은 멀어진 뒤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백번 옳은 일인 것이다.
“마을은 없지.”
씨익 그러나 천화는 모호한 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대신 다른 게 있지.’
물론 계획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설영이 보일 반응이 뻔했기에 잠시 감추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그냥 지도만 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할 곳이니까!
“일단 가보면 알아.”
“흥. 노숙은 싫다더니?”
이대로면 노숙은 확정이기에 설영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귀엽게 투덜거리며 천화의 뒤를 따랐다.
“산을 타려고?”
그렇게 해가 뉘엿뉘엿 져 갈 때쯤 천화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작은 동산이었다.
“약초라도 캘 셈이야? 잘하면 약초꾼의 오두막 같은 거야 있겠지만…….”
영초 따위가 있을 만큼 깊은 산세도 아니었고, 그저 동네 뒷산처럼 기껏해야 약초꾼들이나 오갈 것 같은 작은 산에 도착한 것이다. 무림인이 전력으로 오른다면 반시진, 아니 이각(30분)도 되지 않아 정상에 오를 수 있을 정도였기에 설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천화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자, 그럼 가볼까?”
타앗! 그러고는 대뜸 보법을 펼쳐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어두워지기 전에 약초꾼들이 만들어놓은 쉼터를 찾으려면 서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보법까지 펼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설영도 일단은 그 뒤를 따랐다.
“여기부터는 내 뒤를 잘 따라와. 내 발자국을 보고 정확히 거기만 밟아야 한다?”
“……?”
그렇게 달리기는 약 일각여. 산의 중턱을 넘어섰을 때 쯤 멈춰선 천화가 설영에게 경고하자 순간 긴장이 흘렀다.
발자국을 따라오라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인 것이다.
“여기에 진법이 있다고?”
“쉿. 일단 따라와.”
진법. 인위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비틀어 만드는 일종의 결계였다. 감각을 속여 헤매게 만드는 것부터 환영을 보게 만들거나 자칫 발을 헛딛으면 혈맥이 꼬여 죽게 만드는 것까지 다양한 효능을 지닌 것들이 존재했기에 설영조차 그 말에 긴장했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침을 꼴깍 삼키며 천화의 말을 따랐다. 천화가 이상한 소리를 할 때는 많지만, 틀린 말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내 예상이 맞다면 여기서 대기 중일 것 같은데?’
그사이, 좀처럼 보기 힘든 진지한 눈빛으로 천화가 전방을 주시했다. 무신지로 원래의 진행에서 유몽헌이 사라졌던 장소. 흑천문에 패퇴하고, 마공마저 드러냈음에도 호림을 죽이지 못한 채 그가 도망치다가 홀연히 모습을 감춘 장소가 바로 근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훗날에 밝혀졌지만 유몽헌과 결탁했던 마교의 인물들이 대기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 호랑이 굴 같은 곳으로 천화가 천천히 진입을 시도했다.
‘호굴일지 호구굴일지는 까보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