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미끼 (1)2021.03.02.
“흐흐흥~.”
모든 마인의 처치가 끝난 뒤, 천화와 설영은 진법이 설치된 오두막, 아니 오두막이었던 것 근처에 움막을 세우고 휴식을 취했다. 밤의 어둠이나 산짐승 따위는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지만, 굳이 밤이슬을 맞아가며 이동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십수 명에 이르는 마인들을 상대하며 단전이 대부분 비어버렸기에 내공을 회복할 필요도 있었다.
“응? 이놈들, 탐마각 소속이었네. 제7대랑 제9대라……. 어쩐지 허접하더라.”
회복할 내공 자체가 원래부터 많지 않은 천화는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인들의 품을 뒤졌다. 그리고 몇 가지 물품들을 찾아냈다. 일단은 목패. 흑천문의 장원에서 상대한 마인들 중 둘이 동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들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그냥 두고 왔는데, 이번에는 모조리 손에 넣어도 뒤탈이 없는 신분패를 손에 넣은 것이다. 한 끗발 떨어지는 목패라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절정 급의 무위를 갖춘 대주급의 신분패를 지니고 있다면 오히려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이건 이것대로 만족스러웠다.
“이건 써먹을 수 있겠군.”
그리고 6개의 작은 병을 찾아냈다. 각각 3개씩, 총 2가지의 작은 병이었다. 하지만 천화는 함부로 병을 열어 확인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리추종향이라.”
그 향이 천리를 따라간다는 추종향이 그 정체였다. 무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교인들이 서로를 식별하고, 적을 쫓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그것이 두 가지 향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는 아군임을, 같은 마교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뿌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이라는 표식을 남기거나 그들을 뒤쫓기 위한 것이니까. 당연하게도 두 가지 향이 모두 남아있을 경우 역시 적으로 간주된다. 이것을 얻은 이들이 호기심에 둘 모두를 열어보았을 경우를 상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천화처럼 그 정체를 알고 있는 이들의 손에 들어갈 경우 위험해질 수 있었다. 아군인 척 행세하는 첩자가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분패를 만들어 대조하고, 마교인들만이 알 수 있는 암어 등을 만들어 이중, 삼중으로 확인을 하는 것이고.
‘하지만 전부 알고 있지롱~.’
문제는 천화가 그 모든 정보를 이미 머릿속에 꿰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천화는 그것을 소지품 창에 소중히 보관했다. 당장은 써먹기 어렵겠지만 언제고 요긴하게 써먹을 때가 있을 테니까. 함께 찾아낸 천리추종향을 다루기 위한 특수 장갑도 찾아냈고, 묵직한 전낭과 놈들이 사용하던 무기, 복면 따위도 모두 챙겼다. 모름지기 아껴야 잘사는 법이니까!
“에이, 이건 못 쓰겠네.”
마인들의 주머니를 모두 턴 천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무너진 오두막까지 파헤쳤다. 먼저 발견한 것은 전서구가 갇힌 새장이었다. 본산 또는 지부나 다른 조직과 연결점이 될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잔해에 깔려 전서구가 모두 죽어 있었다. 그밖에도 낑낑대며 잔해들을 치워보았지만 별다르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어? 이것도 벌써 찾은 건가?”
그러다 어느 순간, 천화가 손을 멈추었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무언가를 찾은 것이다. 얼핏 보아 넘겼다면 그저 거무튀튀한 돌멩이쯤으로 넘겼을 구슬이 천화의 손에 들렸다.
[붉은 피독주][희귀] 특별한 붉은 빛을 띠는 피독주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독을 몰아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본래대로라면 이렇게 보였어야 할 물건이지만,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천화의 손에 들어가자 정보가 바뀌었다. [대전사의 붉은 심장][유일] 대전사의 권위를 상징하는 붉은 보석 이것을 지닌 자에게 대전사의 권위와 힘을 부여한다. 피독주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독을 몰아내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 - 소지시 [대전사의 힘] 획득 - 소지시 [대전사의 권위] 획득 - 소지시 [천독불침] 효과 - 자격이 없는 자가 소지한 것이 드러날 경우, 전사들의 도전을 받게 된다 대전사의 붉은 심장! 그것은 과거 소수 민족 중 가장 큰 세력을 지닌 부이족에서 나온 물건으로, 오랜 투쟁의 역사를 거치며 소수 민족의 전사 중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에게만 전해지는 신물이었다. 무신지로의 시간을 기준으로 게임이 시작되기 몇십 년 전 사라진 물건이었기에, 무신지로 내에서는 마교에서 이것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만 남아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있네.’
그것이 이들일 거라고는 천화도 이전에는 알지 못했기에 어지간하면 그냥 넘겼을 테지만, 유몽헌에게 얻은 그것을 떠올리고 꼼꼼히 확인해본 것이다. 무신지로의 원래 사건에서 유몽헌이 사라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묘’가 열렸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지도뿐 아니라 열쇠 또한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든, 근 시일 내에 획득하든. 원래의 시기보다 꽤나 이르게 이쪽으로 넘어온 천화였기에 자칫 시기가 어긋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마인들이 이미 그것을 얻어둔 상태였던 모양이었다.
‘애초에 이걸 찾으려고 귀주성에 기웃거린 것인데 유몽헌이 중간에 꼬불친 건가?’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위곡현의 유력한 세력인 유가장의 금력과 영향력을 이용해 전사묘의 지도를 얻으려 했고, 유몽헌은 그것을 손에 넣어놓고도 그렇지 않은 척 연기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마인들이 지도를 손에 넣은 후 자신을 처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아니면 제가 그것을 꿀꺽 하려는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내 손에 들어왔다는 거지. 지도와 열쇠 모두.’
“천화, 그게 뭐야?”
때마침 운기조식을 마치고 눈을 뜬 설영이 천화의 손에 들린 붉은 구슬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홍옥처럼 붉었지만 그보다 특별한 기운이 스며있는 물건인지라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거? 피독주.”
“와, 그거 되게 예쁘다.”
“안 돼. 이건 내 거야. 넌 필요 없잖아.”
그 관심어린 눈빛에 천화가 얼른 그것을 감추며 돌아섰다. 설영이 탐을 낼까봐이기도 했지만, 대전사의 붉은 심장은 수많은 전사들의 피를 머금은 것이기에 사람을 홀리는 요사스러운 기운을 풍기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피만 보면 눈 돌아가는데 이걸 붙여주면 큰일 나지. 어차피 혈마신공을 익혔으면 필요도 없고.’
독에 당해 위험하기라도 하면 한 번쯤 빌려줄지도 모르겠지만, 혈마신공을 익힌 이상 그런 걱정도 별로 없었다. 혈마신공이 무서운 이유는 혈마검을 통해 다른 존재들의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도 있지만, 사용자의 생명력을 자극하고 활성화시켜서 괴물 같은 재생능력을 부여한다는 것도 있었으니까. 즉, 독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혈마신공을 운용하면 독으로 줄어드는 생명력보다 자체적으로 재생되는 생명력이 더 커서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독을 정화하는 힘도 지니고 있어서 만약 10성 이상까지 성취를 높이게 되면 어지간한 극독을 사발로 들이마시고도 멀쩡할 수 있게 될 테고.
‘그래도 이거 덕분에 한시름 덜겠네.’
반면 천화는 독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모든 무공을 알고 있는 그에게 있어 어쩌면 당장 가장 두려운 것은 독이라는 존재일지도 몰랐다. 내공이 심후하면 독을 몰아낼 수 있고, 차후 수련을 거쳐 독이 통하지 않는 신체를 완성할 수도 있지만 당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점에 피독주를 획득한 것은 실로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소지시’ 효과를 발동하는 이런 아이템들은 소지품 창에만 들어있어도 제 능력을 발휘하기에 유저들에게 각광을 받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취한 천화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비로소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자리는 조금 불편했지만 간만에 마음 편히 단잠을 청한 뒤, 다음날이 되어서야 그곳을 벗어났다.
“어디로 갈 셈이야? 이쪽이면…….”
자신있게 앞장서는 천화를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설영의 표정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확실히 천화 덕분에 추격을 따돌리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중원에서 점점 멀어질 뿐인 것이다. 도중에 일이 꼬이기는 했지만 나름의 뜻을 세우고 무림에 출두한 그녀인 만큼, 중원을 떠나는 것이 달갑기만 한 일은 아니니까.
“소나기는 피해 가야 하는 법이지. 어차피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혈마의 후예를 쫓는 이들이 벌써 포기했을 리는 없으니,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인 것이다. 게다가 마교라는 아주 큰 떡밥까지 대신 던져둔 상황이니, 조금만 있으면 혈마의 후예라는 이름은 기억 속에서 흐릿해질 터였다. 다시 활동하고 목적을 이루는 것은 그때도 늦지 않는다. 더구나 이미 다른 일류 고수와 절정 고수들을 상대하면서 설영은 자신감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확실히 지금 상태로는 어려워.’
처음에는 혈마검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강호에 출두했다. 하지만 당장 혈마화를 하더라도 절정 고수 두셋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무리해서 강호를 활보하기보다 스스로의 성취를 좀 더 높여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혈마검에 모인 혈정의 기운이 많이 쇠약해졌다는 것 역시 확인했기에 먼저 그것을 보충할 필요도 있었다. 지금 상태로는 당장 혈마화를 몇 번만 시전하더라도 혈정의 기운이 바닥을 드러낼 것 같았으니까. 총체적 난국이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안다는 것은 한순간의 판단으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무인에게 있어 굉장히 귀중한 일이지만, 설영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그 사실을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도 스스로를 옥죄어왔다.
“걱정 마. 세 달. 딱 세 달 안에 우리는 다시 중원무림으로 돌아갈 테니까.”
씨익 딱히 근거를 제시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믿음이 가는 천화의 호언장담에 비로소 설영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서 말이지.”
설영 이상으로 빠른 성장을 원하는 이가 바로 천화였으니까. 그리고 천화에게는 늘 계획이 다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믿어보는 수밖에. 그렇게 대화를 마친 천화와 설영은 방향을 잡고 계속해서 걸었다. 당장 이 방향에 현 단위의 마을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누군가와 마주칠 일도 없을 테니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고, 누군가 접근한다 하더라도 혈마검이 기감을 펼친 것보다 훨씬 정확하고 멀리까지 감지할 수 있었기에 여유마저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걸었을 때, 두 사람은 작은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흐아, 드디어 씻겠구나.”
“저기에 면사가 있을까?”
현 단위의 규모가 큰 곳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스무 채쯤 되는 그리 작지만은 않은 마을이었기에 각자가 기대하는 것들이 있었다. 천화는 따뜻한 목욕물과 푹신한 침상을, 설영은 전투의 연속이었던 지난 며칠 동안 잃어버린 면사를 다시 구입하는 것이었다. 처음 면사를 구입할 때 천화가 예비 면사도 하나 준비해두었지만 흑천문에서 하나가 망가지고, 마인들의 거처에서 나머지 하나까지 망가져버린 까닭에 남은 면사가 없는 것이다. 그중 하나는 잘려나가지 않긴 했지만, 그렇다고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은 면사를 착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때문에 마인들에게서 얻은 복면을 착용할까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수상해 보였기에, 다시 면사를 구할 때까지만 잠시 맨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기로 한 것이다.
‘얼굴이 예뻐도 이게 문제네.’
가장 좋은 것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가질 수 있는 인피면구를 구하는 것이겠지만, 인피면구는 제작이 어려운 만큼 아무리 품질이 나쁜 것이라도 값이 비쌌기에 아무 곳에서나 팔지 않았다. 그렇기에 조금 큰 마을에서 하오문이나 전문 업자를 찾아야했지만 그 또한 위험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인피면구를 쓰는 이들은 얼굴을 드러내기 어려운 험악한 일들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들을 상대하는 이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닌 것이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였다가는 바가지를 쓰는 것은 물론이요, 최악의 경우 제압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하오문의 경우, 은밀하게 구매자의 정보를 캐내어 팔아먹기도 하고.
‘그래도 작은 마을이니까…… 시비가 붙어봤자 삼류급이겠지?’
그러니 현재로서는 면사를 구해 쓰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 전까지 설영의 미모에 홀려 수작을 걸어오는 이들이 있더라도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쉬어가는 스테이지. 딱 그 정도로 생각하며 두 사람은 마을 안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