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미끼 (3)2021.03.07.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천화와 설영은 간만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했다. 각자 방을 잡고 늘어지게 휴식을 취했으며, 식사 때가 되면 1층으로 내려가 마음껏 음식을 주문해 먹고, 술을 마셨다. 그때마다 아직 떠나지 않은 화산파의 제자들이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전혀 개의치 않고 먹고 마셨다. 보는 눈이 있어서인지 화산의 제자들도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는 못했으니까.
“으하아암~.”
다음날 아침, 간단히 식사 겸 해장을 한 천화와 설영이 객잔을 나섰다. 굳이 이 마을에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었기에, 다시 길을 떠나려는 것이다.
[따라붙었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화산파의 제자들이 눈을 부릅뜬 채 그들의 뒤를 쫓았다.
“정말 돌아갈 거야?”
“응.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이니까. 더구나 저렇게 기운이 넘쳐서 펄떡거리는 물고기가 있는데, 어울려줘야지.”
나름대로 거리를 벌려두고 있었지만 완전히 은신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설영 역시 그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역시 그들이 향하는 방향이었다. 천화가 밤사이 전달한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이 방향은 그들이 가려던 방향이 아니라 어제 왔던 방향이기 때문이다. 마인들의 은신처가 있었고, 더 나아가면 위곡현이 있는 방향. 개방의 거지들이 득실거리고 슬슬 다른 대문파의, 어쩌면 다른 구파일방의 무인들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중인 것이다.
“어차피 끝까지 갈 건 아니니까 괜찮아.”
범의 아가리를 향해 머리를 들이미는 것 같았지만 천화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달리 도리가 없었다. 설영이 묵묵히 그를 따라 움직였고, 화산파의 제자들 역시 그들과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여기서 다시 만나는군요. 이것 참 인연입니다.”
그렇게 반나절쯤 걸어갔을 때, 화산파의 제자들이 마치 몰랐다는 듯이 거리를 좁히며 말을 걸어왔다.
“보통은 우연이라고 하지 않나?”
어떻게든 엮어보려는 가상한 노력이 눈에 보였기에 천화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지만 삼대제자들만 그를 노려볼 뿐, 홍빈은 아예 천화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네요.”
그리고 모처럼 설영이 그에게 대꾸를 해주었다. 사실 별로 말을 섞고 싶지는 않지만, 천화의 부탁이 있었기에 썩 기분 좋지 않은 티를 내면서도 답은 한 것이다.
“오호, 소저께서도 우리의 인연을 느끼셨군요. 제가 간밤에 천기를 읽으니 떨어져 있던 두 별이 만나 하나로 빛났는데, 그게 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하.”
그것을 청신호쯤으로 본 것일까? 이때다 싶었는지 홍빈은 기름기 좔좔 흐르는 말을 늘어놓았고 설영의 표정이 썩어갔다.
“혹 어디로 가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것도 인연이니 방향이 맞으면 동행을 하면 어떨지요?”
그들이 돌아가야 할 섬서성은 북쪽에 위치해있다. 반면 천화와 설영이 향한 위곡현 방면은 북쪽이 아닌 동쪽이었으니 뒤쫓아온 것이 확실해 보였지만, 놈은 천연덕스럽게 방향이 맞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오호, 저 방향이면 위곡현인가요? 이거 마침 잘 되었군요. 저희도 마침 그리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설영이 대꾸조차 하기 싫었는지 손가락을 들어 어느 방향을 가리키자 놈이 능청을 떤다. 하지만 설영은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뇨. 저 산에 산적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 찾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사.파.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면 협행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진한 뒤끝이 묻어있는 말이었다. 전날 자신과 어울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설영을 사파로 몰아간 홍빈이었으니까. 그 말에 찔끔 했는지 홍빈이 살짝 딴청을 피웠지만 곧 특유의 능글맞음과 느글거림으로 대처했다.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군요. 크흠. 사실 이건 비밀인데 말입니다, 그 객잔 안에 저희가 쫓던 마두가 있었습니다. 정파의 무인만을 노리는 아주 흉악한 놈이었죠. 상식적으로 어떻게 소저처럼 청초하고 아리따운 이가 사파의 인물일 수 있겠습니까. 아니,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어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게 다 소저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개소리다. 강호초출이나 되면 모를까, 조금만 강호밥을 먹은 이들이라면 믿을 리가 없는 개소리였다. 그 작은 마을에 그런 마두가 있을 리 없으니까. 굳이 혈마검이나 기감을 통해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곳에서 무림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들과 천화, 설영밖에 없었고 설령 사실이라면 고작 저들의 수준으로 제압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정파인을 골라서 사냥하는 사파의 인물? 그건 마치 날 죽여달라 악을 쓰는 것과 같지 않은가? 아무리 마교와의 전쟁 이후 사파에 대해 비교적 너그러워진 무림이라지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대번에 흉악한 마두로 낙인 찍혀 고수들의 추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니까. 설사 그런 짓을 벌이는 놈이 진짜 있다고 해도 최소 절정급 무공 수위를 갖추었을 터였다.
“아, 제가 오해를 했었나 보네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지만 설영은 정말 자신이 오해를 한 것이었다는 듯, 최대한 순진한 얼굴로 대꾸했다. 천화가 시킨 일이었기에 중간중간 설영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지만, 다행히도 설영의 미소에 넋이 나간 홍빈은 히죽거리느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커흠. 아무튼 그놈이 야밤에 마침 위곡현 쪽으로 도주를 했더군요. 제가 쫓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 분명합니다. 제 아무리 흉악한 마두라도 화산파의 이름 앞에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겠죠.”
‘그 마두보다 한참 이름값 높은 혈마의 후예가 니 눈앞에 있다, 임마.’
그러고는 제 자랑과 함께 다시 한 번 동행을 제안했다.
“그러니 저와 함께 이동하시죠. 놈이 혹여 어딘가에 매복을 해있을 수도 있음이니.”
“아이고, 그럼요. 이렇게 화산의 대협들께서 함께해 주신다니 든든합니다!”
그 말을 받은 것은 천화였다. 은근슬쩍 그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너스레를 떨었고, 홍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슥 어깨를 빼며 어깨동무를 풀었다.
“아, 그 산적이 말씀하신 마두일 수도 있겠군요.”
“어……. 그, 그렇죠?”
뒤이어 설영이 그의 말을 받았다. 뭔가 이상하게 말이 흘러간다는 것을 홍빈이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은 상황. 덕분에 계획에도 없던 산적 소탕을 하게 될 판이지만 상관없다. 녹림채쯤 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뭐, 상관없겠지. 산적 놈들쯤이야.’
자신이 이야기한 마두야 어차피 가상의 인물이고, 이런 궁벽한 지역에서 산적질을 하는 놈들이야 수준이 뻔하지 않겠나? 오히려 자신의 무위를 드러내며 설영을 반하게 할 기회라고 생각하며 씨익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놈들을 가볍게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아, 물론 도인으로서 명성을 탐할 필요가 없으니 그 놈들을 소저께서 처리한 것으로 해드리죠.”
찡긋 홍빈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추파를 던졌다.
“아, 네……. 감사합니다.”
부르르르- 그때 설영의 꽉 움켜쥔 주먹이 떨리는 모습은 오직 천화만이 확인할 수 있었다.
어쨌든, 설영의 연기 덕분에 두 사람과 화산파 제자들의 동행이 성사되었다. 동행이라고는 해도, 삼대제자들이 천화가 끼는 것에 훼방을 놓았기에 설영과 홍빈이 앞장서고 나머지 셋이 한발 뒤에서 따라가는 형국이 되었지만 상관없다. 이미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살짝 미안하긴 하지만 그대로 대(大) 화산파의 제자들이니까. 이 정도 시련은 견뎌내야 나중에 큰 인물이 되는 거 아니겠어?’
사악한 미소를 짓는 천화의 손에는 비영투가 아닌, 다른 수투가 끼워져 있었다. 바로 천리추종향을 다룰 때 사용되는 특수한 장갑. 조금 전 어깨동무를 하는 척하며 홍빈에게 천리추종향을 묻혀둔 것이다.
“꺄악!”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막 예정된 산에 오르려는 순간, 설영이 여린 비명을 질렀다. 분명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에 모두가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황급히 설영에게 다가가자 설영이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버, 벌레가……. 저는 벌레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요.”
그 모습에 홍빈이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얼른 벌레를 쫓아버리며 설영에게 점수를 땄다고 생각했다.
“저, 저기. 혹시 저는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아무래도 벌레가 많을 것 같아서…….”
“하하. 물론입니다. 그럼 제가 얼른 가서 놈들을 처치하고 오도록 하죠!”
“감사해요. 대신 제가 여기에서 간단한 음식이라도 준비하고 있을게요.”
이어진 설영의 부탁. 놈은 당연하게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산적을 소탕하고 오는 자신을 기다리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마치 조강지처라도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설영도 분명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느끼한 미소를 지어보인 홍빈은 살짝 띠꺼운 눈빛으로 천화를 돌아보았다.
“귀하는 어쩌시겠소?”
“음……. 그렇게 흉악한 놈이 있는 곳이라면 제가 방해만 될 테니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마른 나뭇가지라도 모아두죠.”
“흥. 그러시든가. 가자.”
“예. 사숙!”
천화가 그들과 함께하기를 거부했지만, 홍빈도 딱히 그가 함께 가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기에 개의치 않고 삼대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화산파의 세 제자들이 일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휴. 느글거려 죽는 줄 알았네.”
“큭큭. 그래도 연기 잘하던데?”
그렇게 그들이 사라지자 설영은 잔뜩 인상을 쓰며 짜증을 냈고, 천화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빨리 가자. 저놈들이 돌아오기 전에.”
“흐흐흐. 그래.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얼른 뒤를 돌아 신법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저들도 생각이 있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지만, 혹여나 돌아오더라도 그들이 마주하는 건 텅 빈 풍경뿐일 터였다. 천화와 설영은 다시 길을 되돌아갈 테니까.
“근데 괜찮을까?”
“왜, 걱정돼?”
“너 죽을래?”
그렇게 각자의 신법을 펼쳐 산에서 멀어지는 도중에 설영이 살짝 미안한 마음을 표출했다. 천화가 그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교에서 적들을 쫓을 때 추적을 위해 묻히는 천리추종향. 그것을 묻혀두었으니 마인들이 그들을 쫓을 것이고, 산적을 찾아 떠난 그들이 마주하는 것 또한 죽은 마인들의 시체일 테니까. 그들이 마인들의 정체를 알아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번 일을 계기로 화산과 마교가 부딪히게 될 확률이 높았다. 저들이 위험해질 테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지. 그것이 미안했던지 살짝 안 좋은 표정을 지은 설영이었지만, 강호는 비정한 곳이다. 설영 역시 그들 덕분에 크게 시간을 벌 수 있게 될 터였기에 이 계획에 동참한 것이기도 했고.
“썩어도 준치라고, 어쨌든 화산이야. 마교놈들도 쉽게 해코지를 하지 못하겠지. 뭐, 물건을 찾으려고 공격할 수는 있지만 지금 위곡현 쪽으로 무인들이 몰려들고 있으니 운이 좋으면 자파 고수의 보호를 받을 수도 있을 테고. 혹시 알아? 놈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공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두 제 놈들 하기에 달린 거지.”
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에게는 남 걱정을 해줄 만한 여유가 없었으니까. 알량한 동정심 따위는 집어던지고 천화와 함께 다음 목적지를 향해 더욱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 본래라면 있는지조차 몰라야만 할 오두막. 하지만 그곳에 있던 진법은 이미 천화에 의해 해제가 된 상태였기에, 무너진 오두막과 죽은 마인들의 시체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사숙! 시신입니다!”
“시신? 산적 놈들을 먼저 처리한 자가 있는 건가? 그러면 안 되는데…….”
얼른 산적들을 소탕하고 설영과 함께 꽁냥꽁냥 시간을 보낼 생각에 헤벌쭉해져 있던 홍빈의 표정이, 사질들의 외침에 급격히 굳어졌다. 이래서야 약속처럼 산적 소탕의 공을 설영에게 돌리지 못할 테니까.
“헉! 사, 사숙. 이거 검기의 흔적 같습니다.”
“뭣?!”
하지만 다음으로 들려온 외침에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검기라면 최소 일류 고수는 되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는 것은, 이곳에 죽어있는 이들 중 일류 고수가 포함되어있거나, 이들을 죽인 이가 일류 고수라는 뜻인 것이다. 위험하다. 만약 그들 중 살아있는 이가 있거나, 이들을 죽인 이가 이 근처에 아직 남아있다면 자신들 또한 위험해질 수 있었기에 홍빈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정말 검기의 흔적이군. 한 놈이 사용한 게 아니야. 여기 죽어있는 놈들 모두, 혹은 다수가 일류 고수다.”
화산에서 허투루 배운 것은 아닌지 홍빈은 싸움의 흔적만으로 그들의 실력을 유추해냈다. 얼른 기감을 펼쳐 주변에 누군가 있는지를 확인하며 시신들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만한 실력을 지닌 이들을 다수 배출해내려면 보통의 문파로는 무리였으니까. 이들 모두가 한 문파에 소속되어 있다면 최소 대문파라 불릴 정도는 될 텐데, 이 근처에 그럴 만한 곳이 있었나? 소속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시신을 확인했다.
“이, 이건……?”
그리고 그중 한 놈의 품에서 작은 목패를 발견했다. 그것에 음각되어 있는 성배와 성화의 모습도.
“마교?!”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에게는 마교의 상징을 구분해낼 정도의 안목이 있었다. 이것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 역시도.
‘이건 기회다. 큰 공을 세울 기회.’
때문에 확신했다. 이것이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기회라는 것을. 일백여 년이 넘도록 모습을 감추었던 마교의 흔적. 그것을 찾아내었으니 사문의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순간 굳어졌던 홍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고, 동시에 안타까움의 빛도 함께 스쳤다.
‘설영 낭자. 미안하고, 내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꼭 그대의 연심을 받아주겠소.’
설영을 데리고 움직이기에는 너무나 급박한 사안이었으니까.
“챙길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챙겨라. 우리는 당장 위곡현으로 이동해 본산에 연락을 취할 것이다.”
“예. 사숙!”
혹여나 다른 이가 나타날까 잔뜩 경계하던 홍빈은, 주변을 뒤져 취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취한 뒤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설영이 기다리고 있는 방향이 아닌, 본산으로 연락을 취할 전서구를 구하기 위해 큰 마을인 위곡현을 향해서. 하지만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마교인들을 유인할 미끼가 되었다는 사실을. 앞으로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