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전사의 증명 (1)2021.03.09.
“누가 내 얘기 하나?”
후비적 후비적 위곡현을 떠나온 지 열흘쯤 지났을까? 한참을 걷고 또 걷던 천화가 귀가 가려운지 새끼손가락으로 마구 귀를 후볐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됐다고 하지 않았어?”
“어. 분명 이쯤에……. 응?!”
설영의 물음에 가볍게 대꾸하던 천화의 눈빛이 돌변했다.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이다.
“왜, 무슨 일이야?”
“제길. 여기였나?”
무형보까지 펼쳐 빠르게 달려간 천화가 발견한 것은 싸움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검기 이상의 무언가를 사용한 흔적. 설영에게 설명하는 대신 굳은 표정으로 달려가자 곧 다른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폐허. 그렇게밖에 부를 수 없는 흉악한 모습이었다.
“습격을 받은 건가?”
폐허의 곳곳에는 이미 들짐승들에게 뜯어먹힌 시체들과 그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꽤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지 곳곳에는 검기로 베이고 터져나간 지형들이 눈에 띄었고, 천화는 그것을 마인들의 소행으로 단정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전사묘에 대해 알고 있는 어떤 소수 민족의 터전이었으니까. 소수 민족들은 유목민처럼 생활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들은 모종의 이유로 이 근방을 떠나지 않고 터를 잡은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몰살된 것만 보아도 의도가 분명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 하지만 강도는 아니야. 아마도 우리가 상대했던 마인들의 소행인 것 같은데…….”
강도의 소행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얼핏 보더라도 돈 될 만한 물건을 몽땅 털어간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돈 이외에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살육을 저질렀다는 말인데, 굳이 조용히 사는 소수 민족의 마을을 습격하고 그들을 몰살시켰다면 살인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간혹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전투의 흔적으로 볼 때 이건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것이다. 때문에 천화는 마인이 대전사의 붉은 심장을 얻기 위해 이들을 학살한 것으로 보았다. 정확히 이곳에서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겠지.
“다른 곳도 확인해봐야겠는데.”
마음이 급해졌다. 자칫 여기서 머뭇거리다가는, 외부에 나갔던 이들 부족원들이 돌아와 오해를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천화가 이들의 존재를 기억한다는 것은, 이들은 완벽한 전멸이 아니라 일부가 살아남았다는 뜻이니까. 아마 천화가 알고 있는 이곳은 이후 밖으로 나갔던 부족원들이 다시 재건한 것이겠지. 때문에 천화는 빠르게 그곳에서 멀어졌다. 소수 민족들은 말 그대로 소수 인종들의 집단인 만큼, 자신들의 부족민에 대한 애착이 꽤나 강했다. 괜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었기에, 그곳에서 물러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다른 마을로 이동했다. 마침 한 시진 정도 거리에 현 단위의 마을이 하나 존재했기에 그곳으로 들어가 정보를 수집했다.
“이 근방 부족들과 사이가 안 좋냐고? 뭐, 늘 그렇듯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지. 다만 최근 들어 그들이 중원인들을 경계하고 배척하는 태도가 더 강해졌다는 말은 들어본 것 같군.”
“얼마 전에 거라오족 마을에 교역을 하러 갔던 상단이 말도 제대로 못 붙여보고 쫓겨났다던데?”
“이유? 낸들 알겠나. 그놈들 제멋대로인 게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지.”
만약을 위해 혼자 마을로 들어간 천화는 아쉽게도 그들이 보았던 바이족 마을의 혈사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다만, 바이족뿐 아니라 다른 소수 민족들까지 최근 중원인들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안 좋아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성향상 굳이 중원인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지는 않을 테니, 일단 자기들끼리의 공유는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충분히 의심은 가는 일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몇 가지 물품만 구입해 다시 마을을 나섰다. 설영에게 가장 필요한 면사부터, 오래두고 먹을 수 있는 건량까지. 그리고 말도 두 필이나 구해왔다. 꽤나 값이 나갔지만, 앞으로 이동해야 할 거리가 제법 되다 보니 과감하게 투자를 한 것이다. 물론, 당연히 설영에게는 빚으로 달아둘 테지만!
“아, 고마워.”
대신 이번엔 면사를 넉넉히 챙겨왔다. 가능하면 싸울 일이 없거나, 면사를 뜯어버리고 전력으로 싸울 만한 상대와 부딪히지 않는 편이 가장 좋겠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으니까. 덕분에 적잖은 경험치를 챙기기도 했지만 이 정도야 충분히 서비스로 줄 수 있었다.
“서두르자. 갈 길이 좀 멀거든.”
그렇게 쉬지도 못하고 채비를 한 천화와 설영은 다시 꼬박 하루를 달려 어딘가에 도착했다.
“여기에서는 나서지 마.”
“응? 으흠……. 알겠어.”
공식적인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커다란 마을. 그곳은 다름 아닌 소수 민족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바이족의 도시였다. 국가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천화가 정보를 얻고 물품을 보급 받은 현 단위의 마을 이상으로 커다란 곳이기도 했고,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소수 민족들 중에는 ‘전사’라 불리는 이들이 즐비했기에 미리 설영에게 주의를 준 것이다. 다그닥 다그닥 도시의 문은 열려있었다. 중원의 성은 대부분 관군이 지키고 서있거나 문을 닫아두고 검문을 한 후 열어주지만, 이들은 과감하게 애초부터 문을 열어두고 누구든 들어올 수 있게 해둔 것이다. 그것은 자신감이기도 했고, 전통이기도 했다.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를 막지 않는다는 전사들의 자부심. 덕분에 천화와 설영은 아무런 제지 없이 도시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고, 천화의 눈이 빠르게 굴러갔다.
‘여기는 공격 받지 않은 건가?’
딱히 공격을 받은 흔적은 없다. 거리나 골목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 경계와 불신, 그리고 불만이 가득 차있는 것이 보이기는 했지만 따로 건물 등이 파괴된 흔적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군데군데 싸움의 흔적이 보이기는 했지만, 천화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것은 저들끼리 겨루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호전적인 걸로 따지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놈들이니까.’
가만히 놔둬도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움박질을 할 만큼 호전적인 놈들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자들은 여기서 눈도 마주쳐서는 안 된다. 그것을 알기에 천화도 똑바로 길만 보고 이동을 했지만, 누군가 그들을 막아섰다.
“중원인인가?”
“그렇습니다.”
바이족의 일원인 듯 꽤나 시원시원한 복장을 한 사내였다. 웃통을 시원하게 까고 근육질의 몸을 자랑하는 사내는 천화와 설영이 중원인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당분간 중원인의 방문은 받지 않는다.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꺼져라.”
어떤 위치에 있는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짜고짜 그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뭔가 있긴 한가 보군.’
중원인들과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정도로까지 배척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천화는 뭔가 변고가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갈 것이라면 애초부터 찾아오지도 않았다. 더불어 이들의 우호도를 올리는 방법이라면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당신은 누구요?”
“나는 바쿠람. 바이족의 전사다.”
말에서부터 자긍심이 느껴지는 단호한 음성에 천화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한판 붙읍시다.”
“천화?”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뱉는 천화의 말에 놀란 것은 설영이었다. 그들을 설득하기는커녕 한판 붙자니? 이래서야 다시는 이곳에 발도 디디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 태도에 식겁하며 천화를 말리려 했지만, 놀랍게도 상대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중원인치고 제법 강단이 있는 자였군. 좋아. 무엇으로 싸울 셈인가?”
“좋은 주먹 두고 뭘로 하겠습니까?”
“주먹이라, 좋지. 따라와라.”
[돌발 임무가 생성되었습니다.] [전사의 증명][돌발 임무] 당신은 바이족의 전사 바쿠람에게 도전했습니다. 그와 겨루어 스스로가 전사의 자격을 갖추었음을 증명하십시오. 단, 패배할 시 마을에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 성공 조건 : 전사의 자격 증명 - 성공 보상 : 전사로의 인정, 보통의 경험치 - 실패시 불이익 : 바이족 대도시 쿠르망에서 추방 바쿠람이 몸을 돌림과 동시에 천화에게도 돌발 임무가 내려졌다. 바쿠람과 겨루어 전사의 자격을 인정받는다면 이곳에서 머무는 것은 물론, 같은 전사로서 친구처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겠지.
‘무기를 들면 정반대의 결과를 얻겠지만.’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존재했다. 대결 방식에 있어 무기를 선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무기를 든다는 것은 목숨을 걸겠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되면 상대를 죽일 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기를 든 상태에서 상대를 죽여 승리하더라도 전사로서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생사를 다하여 죽여야만 할 적으로 인식되고 만다. 다른 전사와 겨루고, 또 죽이고,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을 힘과 공포로 누르려 한다 해도 이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투쟁의 역사를 살아왔으니까. 그런 이유로 수많은 중원인들이 이들과 겨루어보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빼앗기 위해 덤벼들었다가 싸늘한 주검이 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이들도 분명 존재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도망친 것은 그들이었다.
‘역시 그대로네. 괜히 설영이 나섰다간 큰일이 났겠지.’
또한 설영이 나서는 것도 안 될 말이었다. 한 명의 전사로는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여인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령 설영이 승리한다 해도 전사 이상의 대우를 받기는 무리일 터였다. 동시에 여인보다 먼저 나서지 않은 천화 역시 승리를 하더라도 제대로 대우를 받기 어려울 테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서지 마.”
그렇게 바이족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바쿠람을 따라나선 천화는 다시 한 번 설영에게 당부를 하고, 한쪽에 마련된 공터에 자리잡았다.
“저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잘 보고 준비해. 다음은 네 차례이니까. 박투술로만 싸워야한다는 것 잊지 말고. 뭐, 여기서 머무르고 싶으면 안 싸워도 되지만.”
“응.”
천화의 당부와 함께 대결이 시작되었다.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다려준다? 그런 어설픈 예의 따위는 없다. 오히려 이야기를 하거나 한눈을 팔다가 두들겨 맞으면 전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며 비웃음을 당하기만 할 터였다. 후웅!!
천화의 머리를 꿰뚫을 듯, 크고 묵직한 바쿠람의 주먹이 스쳐갔다. 천화가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에 확실히 맞췄다고 생각했겠지만, 어림도 없지! 천화는 오른쪽으로 넘어지듯 몸을 기울이며 발끝을 차올렸다. 역으로 왼발을 휘돌려 바쿠람의 관자놀이를 찍어찼다. 퍼억! 하지만 바쿠람의 대응은 남달랐다. 갑작스런 공수전환으로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겠지만, 회피하거나 방어를 하는 대신 오히려 이마를 들이밀어 부딪혀온 것이다.
“아오, 돌머리!”
마치 철두공을 익힌 것 같다. 내공을 실어 부딪혔음에도 천화 역시 통증을 느낀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단련을 했으니까.
‘역시 까다롭다니까.’
이렇게 되자 몸을 빼내는 쪽은 천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중원 무림에 비해 외공의 비중이 높은 소수 민족의 특성은 지금 천화에게 가장 위협적인 종류의 힘이었으니까. 반대로 내가중수법으로 대표되는, 내부에 타격을 주는 방식의 무공을 익혔을 경우 오히려 쉽게 상대를 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이 되려면 최소 일류 이상의 실력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지금 천화의 내공 수위로는 그것이 어려울 뿐 아니라, 시도를 한다 해도 제대로 타격을 주기 어려웠다.
‘내부까지 단련을 하는 무식한 놈들.’
무림처럼 체계적인 수련법이 없는 소수 민족이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다소 무식한 수련법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를 단련하는 외가기공 수련법은 물론이고, 무림인들의 내가중수법에 대항할 수 있는 저항력을 지니기 위해 내부에 일부러 충격을 주어 단련시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맞았다가는 당장에 장 파열이 올 만한 공격들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수련을 해대니, 내부라고 단련되지 않을 방법이 없다. 물론 물리적인 타격으로 내부까지 단련시키는 것은 무림인들이 들었다면 미친 짓이라 소리칠 만큼 더디고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었지만, 이들은 태생적인 강점인 단단하고 회복력 빠른 육체를 믿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그가 부족한 것이라 치부하겠지.
‘생식기까지 단련을 하는 족속들이니 뭘 못하겠어!’
언젠가 본 적 있는 이들의 수련법을 잠시 떠올린 천화는 본능적인 공포에 부르르 몸을 떨며 거리를 벌렸다. 결국, 바쿠람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흥! 별것 아니군.”
그사이 바쿠람은 천화에게 맞은 것이 전혀 아프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때렸다. 천화에게 맞은 것보다 자기 손바닥으로 때린 것이 더 아플 것 같을 정도로 아주 세게.
“이건 또 오랜만에 써보네.”
그 과격하고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에 주눅이 들 만도 했지만, 천화는 몸을 풀며 다음 격돌을 준비했다. 육체 능력치와 내공, 모두에서 천화가 바쿠람보다 아래였지만 그것을 뒤집을 만한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