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영물 사냥 (2)2021.04.08.
‘쓰읍.’
눈을 감고 있었지만 녀석의 등장과 움직임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빨을 들이밀지는 않았지만 녀석이 배로 쓸고 지나간 자리에 약한 화상을 입었기에 적지 않은 고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삼재심법은 운기 중 충격을 받더라도 안전한 내공심법이었다. 천화는 무생물이 된 것처럼 고통을 참고 때를 기다렸다.
‘지금.’
휘익- 터억! 그렇게 참고 인내하던 천화가 손을 움직인 것은 칠성신단의 기운을 대부분 갈무리해 갈 때쯤이었다. 금나수의 수법까지 가미한 낚아채기에 화령독사의 목이 붙잡혔고, 당황한 녀석이 마구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꼬리가 천화의 팔뚝을 때리며 화상을 입혀댔지만 그 정도도 참지 못할 천화가 아니었다. 서걱! 천화는 즉시 혈마검을 꺼내 녀석의 몸뚱아리를 절단시켰다. 치이이익!!! 혈액마저 열독 그 자체인 화령독사의 피가 위협적으로 주변에 뿌려졌어야 하지만, 상대는 혈마검이었다. 강력한 생명력과 더불어 양강의 기운까지 머금은 피를 허투루 쏟아버릴 리 없었다. 혈마검은 단 한 방울의 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게걸스럽게 그것들을 탐식했고, 천화는 녀석이 모처럼의 진미를 즐기는 사이 다른 검 하나를 꺼내 화령독사의 머리를 갈랐다. 그 안에서 작은 구슬 같이 생긴 무언가를 꺼냈다. [화령독사의 내단][희귀] 영물의 내단이다. 화령독사의 몸에서 나왔으니 강한 양기를 품고 있을 것이 분명한 그것은, 손에 쥐자마자 열기를 발산하며 손바닥을 태우려 들었다. 하지만 천화는 이미 내공으로 손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큰 피해는 없었다.
“천화! 괜찮아?”
“잠깐 호법 좀 서줘.”
상황이 종료되자 설영이 얼른 천화의 쪽으로 달려왔지만, 천화의 용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설영에게 호법을 부탁한 뒤, 소지품 창에서 무언가를 하나 더 꺼내 화령독사의 내단과 함께 입안에 털어넣었다. 쌍두음혈수사의 내단. 강한 음기를 지니고 있기에 먹어치우지 못하고 보관만 하던 그것을 화령독사의 내단과 함께 섭취한 것이다. 서로 상극의 속성을 지닌 두 개의 내단이 서로를 약화시키고 조화를 이루며 식도를 차갑고 뜨겁게 자극했다. 천화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의 일부가 되기 시작했다. 내단이나 영초 등 정제되지 않은 영약을 섭취할 때는 서로 상극인 속성으로 두 개를 동시에 복용하는 것이 철칙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약을 섭취한 인물이 익힌 심법이나 그 심법을 통해 내기를 다루는 능력에 따라 효율이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두 속성의 독성만을 중화시키고 나머지 기운들을 잘 인도한다면 최대의 효율을 볼 수 있겠지만, 무작정 쑤셔 넣듯 함께 휘돌리면 두 기운이 서로 상쇄되어 기운은 소멸하고 헛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천화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순간의 실수로 며칠, 몇 주, 몇 개월분의 내공을 허공에 흩뿌리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으윽.’
그러나 단지 내공의 유실만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천화의 내부에서는 그야말로 전쟁이 일어나는 중이었으니까. 불과 얼음의 전쟁이 말이다. 한쪽은 모든 것을 불태우려 들었고, 다른 한쪽은 모든 것을 얼리려고 들었다. 그것을 조율하는 것이 바로 천화의 일이자,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두 기운을 보듬을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내공을 다루는 기교가 부족하여 잦은 충돌을 일으키게 만든다면 내공 손실에서 그치지 않고 내부가 파괴되는 참사를 맛보게 될 터였다.
‘운이 좋았군.’
하지만 기운을 인도하는 이가 천화였기에 두 내단의 저항은 금방 제압되고 말았다. 내공을 다루는 기술은 이미 입신지경에 이른 그이기도 했지만, 직전에 칠성신단을 흡수하며 내공이 부쩍 상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기존처럼 삼류급의, 고작해야 15년 남짓한 내공 수위로 두 내단의 기운을 제어하려 했다면 조금 어려움을 겪었겠지만, 칠성신단 덕분에 약 10년치 내공이 추가되며 여유있게 둘을 타이르고 분리시킬 수 있던 것이다. 그 결과, 두 내단으로부터 무려 5년분의 내공을 추가로 획득 할 수 있었다. [별호 : 이류무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이로써 천화가 지닌 내공 수위는 무려 30년분이 되었다. 10년 내공을 지닌 이를 삼류 무인이라 부르고, 20년 내공을 지닌 이를 이류 무인이라 부르며 40년 내공을 지닌 이를 일류 무인이라 부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류를 넘어 일류에 오르는 것도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게 된 것이다. [삼재심법(11성)이 삼재심법(12성)으로 성장합니다.] [삼재심법을 대성하셨습니다.] [오성 수치가 높습니다.] [삼재심법의 진화/변형/조합이 가능해집니다.] 더불어 칠성신단과 내단의 기운을 흡수하고 조율하는 데 사용된 삼재심법의 성취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칠성신단을 흡수하며 한 번 오른 것도 모자라 내단의 힘을 조율하고 흡수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상승을 이룬 것이다.
‘대박났군.’
눈앞에 나타나는 기분 좋은 알림에 천화가 씨익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12성 대성! 무공의 단계에 있어 1성은 곧 1할을 의미하지만, 10성을 달성했다고 그 무공을 완벽히 깨우치는 것은 아니었다. 10성은 그저 해당 무공에 대해 통달을 했다는 것뿐이었고, 11성은 그 무공을 보다 다양하게 응용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12성은 해당 무공의 틀을 깨부수고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깨달음과 지식을 더해 진화나 변형을 시킬 수도 있고, 나아가 다른 무공과 조합하여 새로운 무공을 창안해낼 수 있는 경지라는 것이다. 고작 삼재심법일 뿐이지만 천화는 마침내 그것을 달성해내었다. 안정적이지만 내공을 쌓는 속도가 느리기 짝이 없는 삼재심법을 벗어나 새로운 심법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야 한 발을 내딛었군.’
그것은 천화에게도 제법 큰 의미가 있었다. 자신의 독문무공 중 하나인 천화만변무상심법, 흔히 천화심법이라 불리던 그것을 익히기 위한 기본기와 같은 것이니까.
‘당장은 무리겠지만, 이런 식이라면 얼마 안 걸리겠지.’
당장은 무리다. 기본이 되는 삼재심법의 숙련도는 올려두었지만, 천화심법의 핵심이 되는 다른 심법을 아직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급을 얻지 못해도 익힐 방법은 있었다. 스스로 무공을 창안할 수 있는 경지인 절정급에 오르는 것. 그러면 비급이 없이도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고 익힐 수 있을 터였고, 과거의 영광을 대부분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럴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시행착오나 잘못된 구결과 운기경로로 인한 주화입마의 위험도, 온전한 무공을 기억하고 있는 천화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너무 먼 이야기였다. 이곳에서 내단이나 영초를 잔뜩 얻어서 내공을 뻥튀기 시킬 수도 있지만, 내공 수위가 높아질수록 영약으로 얻을 수 있는 내공의 양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상승의 무공을 익히고 무공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보다 정순한 내공을 모아야 제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영약이든 내단이든 영초든 그것들이 가진 기운의 일부를 억지로 날려버려야 하는 것이다. [내공 활용의 폭이 넓어집니다.] [내공의 운용이 한결 편해집니다.] [적당한 계기 또는 공부를 통해 내공을 활용하는 새로운 수법들을 익히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장에 얻은 것들도 꽤 많았다. 처음 삼류 무인의 격을 갖추고 별호를 얻었을 때만큼 다양하고 폭넓은 기능들이 해금된 것은 아니지만, 실용적이고 스스로를 강화시킬 수 있는 기능들이 다수 해금된 것이다. [무림인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반려동물과의 교감 기능이 해금됩니다.] [능력치 항목이 ‘교감’이 추가 됩니다.] [충검 기능이 해금됩니다.] [내가중수법 기능이 해금됩니다.] [육체 강화 기능이 해금됩니다.] 주로 내공의 활용과 관련된 기능들. 그중 일부는 천화도 이미 사용을 하던 것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흉내를 내었거나, 역혈기공을 사용해 억지로 이류급의 힘을 끌어내면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허나 이제는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그 효율의 차이는 상당했다.
“야, 그만 먹어. 그러다 속 버린다.”
“무우?”
더불어 교감이라는 능력치가 추가되긴 했지만 그것에 여유 능력치를 굳이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반려동물과 생활을 하다 보면 저절로 상승하는 것이기도 했고, 이 수치가 높으면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반려동물의 호감도가 잘 떨어지지 않거나 새로운 반려동물을 길들일 때 보정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특수한 조건만 만족한다면 아무리 난이도 높은 반려동물이라고 길들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이다. 때문에 당장 체감되진 않지만 머리와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는 그것들에 속으로 만족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주변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대장격인 화령독사가 죽은 이후, 천화를 경계하고 있던 뱀들이 독니를 드러내었지만 천화에게 닿은 것은 단 한 놈도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흑우에게 몽땅 씹어먹히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것도 고기라는 것인지 오물오물 야무지게도 씹어먹고 있는 흑우를 천화가 타박하듯 말렸다. 분명 녀석들에게도 화령독사만큼은 아니지만 화독이 있을 텐데, 흑우가 별미라는 듯 입맛을 다셔가며 먹어치우고 있었으니까.
‘공청석유를 처먹었으니 이깟 화독에 영향을 받지야 않겠지만.’
[주, 주인님! 저 못된 소가 제 것까지 다 먹고 있습니다. 얼른 저도……!]
이러다 남은 뱀들이 모조리 흑우의 밥이 될 판이었다. 그것에 조바심을 느꼈는지 혈마검이 애처럼 보챘다. 화령독사의 피가 입에 맞았는지 한껏 고양된 혈마검이 남은 뱀들의 피마저 먹게 해달라며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알았어. 기다려봐.”
서걱 서걱 마침 상승한 경지를 시험해 볼 좋은 기회였다. 천화는 무형보를 밟으며 재주 좋게 뱀들의 사이를 누볐다. 그가 한 발 움직일 때마다 뱀 머리 하나가 떠올랐고, 피는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혈마검이 게걸스레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무?”
덥석! 그렇게 튀어오른 잘린 뱀의 머리를 흑우가 냉큼 받아먹었지만 곧 표정이 묘해졌다. 피가 빠졌기 때문인지 좀 전과 맛이 다른 까닭이었다.
“무우우!!!”
흑우는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다는 듯 경쟁적으로 남은 뱀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샤아아악!!!”
위기감을 느낀 뱀들도 필사적으로 저항을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천화에게는 닿지 않았고, 흑우에게는 설령 주둥이를 가져간다 해도 이빨이 박히지 않는 것이다. 도검불침. 놀랍게도 흑우의 가죽에는 어지간한 검도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사실상 일류 미만의 무인들에게는 무적이나 다름없는 흑우였으니, 천화도 걱정하지 않고 혈마검의 혈정에 기운을 채워넣었다.
“이게 대체 무슨…….”
그 난장판을 뒤에서 지켜보던 설영은 반쯤 넋이 나갔다. 천화의 경지가 상승한 것이야 칠성신단이라는 영약을 섭취했으니 그렇다고 하지만, 흑우의 무위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녀석의 체력이 좋고 절정 고수급으로 엄청나게 빠른 경신법을 펼친다는 것이야 알았지만, 나름 영물의 반열에 들락말락한 뱀들의 이빨조차 박히지 않는다니? 자신에게 애교를 피우며 매번 얼굴을 부벼 오는 흑우였지만 순간 두려움이 일 정도였다. 만약 흑우가 작정하고 덤빈다면 이길 수 있을까? 아무래도 혈마검이 없다면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꺼억!!”
그렇게 한참이나 계속된 두 사람, 아니 혈마검과 흑우의 경쟁은 흑우의 거대한 트림을 끝으로 간신히 막을 내렸다.
“근데 정말 괜찮은 거야?”
“뭐가? 아, 영물을 잡은 거?”
상황이 정리되자 설영이 걱정스런 말투로 천화에게 물었다. 영물을 친구이자 동반자로 여기는 야수궁의 고수들이 만약 영물 사냥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한바탕 난리가 일어날 확률이 높은 것이다.
“뭐, 괜찮아. 걸리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천화가 내놓은 답은 태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원래 뭐가 됐든 걸리지 않으면 되는 법이라며, 화령독사는 물론 나머지 뱀들의 시신까지 모조리 흑우가 먹어치운 현장을 가리키며 키득거리는 것이다. 증거가 없는 데다 화령독사 정도의 영물이야 이곳 남만 땅에 널리고 널렸으니 걸릴 리가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괜찮아, 괜찮아. 이 녀석이 있으니까.”
그래도 설영이 걱정스런 눈빛을 하며 안절부절못하자 천화가 흑우의 등을 툭툭 치며 한마디 덧붙였다.
“……?”
“무우?”
걸리면 도망치면 된다는 것일까? 확실히 흑우의 달리기 속도가 어마어마하기는 한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 하지만 천화는 또렷한 답을 주는 대신 흑우를 재촉해 다음 장소로 이동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