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남만야수궁 (1)2021.04.13.
“멈춰라!”
“왜요.”
야수궁의 소속으로 보이는 우락부락한 사내가 몸을 일으키며 재차 천화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무엇’도 아닌 ‘왜’였다. 너무도 당당해서 야수궁의 고수가 마치 남의 집 사정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왜냐고? 그야…….”
“무후?”
그 모습에 황당해진 사내가 천화에게 짜증스레 대꾸하려는 순간, 흑우가 투레질을 하며 천화의 곁에 섰다. 주인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녀석이 가까이 오는 순간 천화는 다른 의도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츄릅 녀석이 사내의 어깨 등 뒤로 내려앉은 거대한 매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것이다.
“삐, 삐잇?”
그 눈길에 사내의 매가 움찔 몸을 떨며 물러섰다.
“야수궁 소속이시죠? 야수궁은 영물들 간의 싸움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뭣?”
그때 천화가 다시 나섰다. 이미 야수궁의 율법에 대해 꿰고 있는 천화였기에, 감정이나 상황이 아닌 율법을 근거로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천화는 이 주장이 통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무신지로에서도 일단 영물이나 짐승을 꼬셔서 반려동물로 등록하고, 그들을 앞세워 차근차근 임무를 수행해나가는 것이 남만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다만 천화는 미리 흑우를 얻으면서 그 과정을 생략한 것이기에 빙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야 그렇지만 너희는…….”
“중원인이죠. 그래서요?”
“…….”
그렇게 나오자 상대로 할 말이 없어졌다. 이것을 천화와 설영의 영물 사냥이 아니라 흑우와 영물들의 싸움으로 보자면, 천화의 말처럼 그나 야수궁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중원인이기 때문에? 흑우가 남만 출신의 영물이 아니기 때문에? 야수궁의 율법 어디에도 출신 지역을 따져 영물을 판단하는 법 따위는 없었다. 덕분에 상대는 주춤거렸고, 천화는 더 당당하게 나설 수 있었다.
“물론 남만에 들어와서 야수궁에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상인이나 집단의 소속으로 온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이곳을 찾은 거라서요. 물론 영물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죠! ……이 녀석 때문에 골치를 좀 썩고 있지만.”
너무 압박만 해서는 반발만 돌아올 수 있다. 그렇기에 천화는 상대와 야수궁을 존중해주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밝혔다. 개인 자격으로 남만에, 야수궁의 영역에 들어오는 이들까지 막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우우?”
“삐이이잇-!!”
“……일단 알겠으니 그 친구부터 좀 진정시켜 주겠나?”
할 말이 없는지 입술을 우물거리던 사내는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의 매에게 다가서는 흑우를 가리켰다. 자신의 친구이자 반려동물인 매가 두려워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죠. 야, 그만해. 계속하면 저녁 밥 없다.”
“무우우???”
그 말에 흑우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천화가 사냥한 영물의 고기를 몇 번 구워주긴 했지만, 이미 혈마검이 피를 몽땅 빨아먹어서인지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고기는 삼겹살이 최고지! 아마도 혈마검이 빨아먹는 것은 피뿐만이 아니라 대상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 그 자체에 가까웠기 때문인 듯싶었지만, 효과만 좋으면 그만이었기에 천화는 녀석의 머리를 토닥이며 뒤로 물렸다.
“영물 간의 싸움이었다라……. 좋아. 그렇다고 치지. 하지만 이제부터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가 자네들을 주시할 테니까.”
“뭐, 그러시겠죠. 하지만 저도 이 녀석이 먼저 나서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도 제 친구부터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내가 은근하게 경고의 말을 전했지만 천화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정의니 원칙이니 법도니 하면서 떠들어대지만 수틀리면 제 멋대로 해버리는 중원의 문파들에 비하면 이들은 아주 신사적이었으니까. 정해진 원칙에, 율법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해도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
그렇게 경고를 마치고서도 사내는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진지하게 천화와 설영을 돌아보았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궁으로 초대를 하고 싶군. 특별해 보이는 네 친구도 더 자세히 알고 싶고.”
무심한 듯 이야기하기만 천화는 그의 눈에서 어떤 열망 같은 것을 보았다. 야수궁의 일원답게, 새로운 영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친구이자 영물인 거대한 매를 겁먹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니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겠지. 따라서 이것은 아마도 천화와 설영을 초대한다기보다 흑우를 초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았다.
‘독단적인 판단이 아니라 우리를 데려오라는 야수궁주의 명령이 있기도 했을 테고.’
도리도리 슬쩍 설영을 돌아보자 고개를 슬며시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야수궁에 방문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원인들에게 야수궁에 대한 소문은 꽤 무섭고 괴팍하게 나 있으니까.
“좋습니다. 지금 바로 가죠!”
그러나 천화는 망설이지 않았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잘못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로서 초대를 받는 것이라면. 더구나 야수궁의 영역이 있는 남만의 더 깊은 곳까지 이동해야만 더 강력한 영물들을 마주 할 수 있었기에, 천화는 일말의 거리낌 없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
“호탕한 것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좋아. 나를 따라오게.”
그 즉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내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거렸다. 겁먹은 매를 일단 하늘로 날려보내고, 자신은 앞장서서 걸으며 천화와 설영을 야수궁으로 인도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어. 영물이 이 녀석뿐이기는 하지만…… 뭐, 괜찮겠지.”
일단 야수궁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하자 설영도 딱히 다른 말을 하지는 못했다.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천화에게 다가와 슬쩍 물어보았지만, 천화는 흑우와 설영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영물을 친구로 여기는 자. 동시에 영물이 친구로 여기는 자를 우대하는 야수궁이지만, 설영이라면 딱히 영물을 데리고 있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야수궁의 율법을 생각할 때, 설영은 그 자체로 대우받을 만했으니까.
“내 뒤를 잘 따라오게.”
그렇게 사내의 뒤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자 야수궁이 있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남만에는 도시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거점이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야수궁이 있는 이곳만은 중원의 어느 곳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거대하고 거창했다. 때문에 상거래를 위해 간혹 중원에서 오가는 상인들도 그 거대한 위용에 주눅이 들고 시작하기 일쑤일 정도. 설영 역시 남만에 이런 커다란 도시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짐짓 움츠러든 모습으로 사내의 뒤를 바짝 따랐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사나운 눈빛으로 훑어보는 남만인들의 시선도 상당히 부담스러웠으니까.
‘여기까지 곧장 진입할 수 있다니, 개꿀이네!’
물론 천화는 흑우의 등에 올라탄 채 씨익 미소를 짓는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보통은 남만에 진입한 뒤, 작은 마을들을 전전하며 평판 작업이라 불리는 반복 임무 수행을 한 뒤에나 이곳에 출입할 자격이 주어지는데, 그들이 먼저 찾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흑우의 존재 때문인지는 몰라도 곧장 이곳까지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단축한 시간도 상당했고, 말만 잘하면 단번에 평판을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그러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나? 게다가 자신들이 지나갈 때마다 쏟아지는 시선의 의미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마냥 흐뭇할 뿐이었다.
“오셨습니까.”
“궁주님은 안에 계신가?”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게 거대한 도시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말 그대로 궁궐이 있는 장소였다. 남만야수궁의 궁주와 실세들이 기거하는 궁전이다. 그곳에서는 수문장으로 보이는 자들이 각자가 길들인 영물들을 데리고 보초를 서고 있었고, 사내를 알아봤는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제법 지위가 있는 자였던 모양이었다.
‘하긴, 중원 무림으로 따지면 절정급의 고수인데.’
보유한 영물을 제외하고라도 절정급의 무위를 가진 인물이면 어지간한 대문파의 정예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 덕분에 길은 곧장 열렸고, 세 사람은 일말의 지체도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중원이었다면 실내에 들어가는 것인 만큼 탈것 역할을 하고 있는 흑우를 매어두고 가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야수궁이라서인지 너그러웠다. 느긋하게 흑우의 등에 오른 천화를 누구도 이상하게 보거나 제지하지 않았고, 천화는 세외사궁이라 불리는 남만야수궁의 궁주를 만나는 순간까지도 흑우의 등에서 내리지 않을 수 있었다.
“흐흐흐. 이 녀석이었군?”
그렇게 마주한 남만야수궁의 궁주는 거인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내였다. 키가 10척(약 3미터)쯤은 될 법한 거구인 데다 그 큰 키가 멀대같아 보이지 않을 만큼 근육도 다부지게 붙어 있었다. 외공을 극한까지 수련하면 저런 몸을 가지게 될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지만, 그가 품고 있는 내공 역시 현재의 천화로서는 가늠조차 되지 않을 만큼 크고 깊었다.
‘최소 초절정.’
외적으로나 내부에 품고 있는 기운으로나 가히 초인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사내는 그들을 보자마자 씨익 미소를 지었다.
“무, 무우?”
살기를 품은 것도 아니다. 그저 환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인데도 흑우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마교의 절정 고수를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던 흑우였지만, 야수궁주의 미소 한 방에 묘한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아이고 이쁜 것!”
“?!”
그러나 그 뒷걸음질조차 제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야수궁주가 몸을 날린다 생각한 그 순간, 어느새 흑우의 곁으로 다가와 얼굴에 뺨을 비비고 있었던 것이다.
“이 똘망똘망한 눈! 흑요석처럼 까만 피부! 어쩜 이렇게 이쁘게 생겼을고!”
천화도 설영도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달려든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이미 도착해 있었으니까. 흑우조차도 식겁하며 얼굴을 빼낼 뿐, 야수궁주의 손길을 피해내지 못했다.
‘……저게?’
평생 온갖 괴상하게 생긴 영물들만 보고 살았기 때문인지 어째 심미안이 이상한 것 같았지만, 딱히 흑우에게 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천화도 입을 꾹 다물었다. 무신지로에서의 야수궁주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데리고 다니는 영물에 대한 평가가 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이런 취향(?)일 줄은 천화조차 생각지 못한 것이다.
‘생긴 것답지 않게 여린 심성의 소유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심미안까지 특이한 줄은 몰랐네. 그러니 평가가 그렇게 박했던 건가?’
이런 독특한 심미안을 가졌으니 다른 플레이어들이 애지중지 키우던 어여쁜 반려동물들에 대해 평가가 박했던 것도 새삼 이해가 되었다.
‘하긴, 저놈이 키우는 영물을 생각하면…….’
야수궁주에게 귀속된 영물의 외형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한 대로, 무신지로에서는 누구도 그의 심미안을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무후!!!!”
콰앙!!! 그렇게 천화가 잠시 딴 생각에 빠진 사이, 사단이 일어났다. 뺨을 비벼대는 낯선 이의 등장에 흥분한 흑우가 그대로 야수궁주를 들이받아버린 것이다. 흑우 역시 육체 능력만 따지자면 절정 고수의 그것에 비할 수 있는 수준이기에, 무방비 상태로 부딪힌 야수궁주의 거체가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부딪히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벽을 무너뜨리며 뚫고 날아가버렸다.
“맙소사!”
그 광경에 설영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만의 지배자라는 남만야수궁주를, 그것도 야수궁 내에서 공격했으니 당장 척살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 아닌가? 아무리 흑우가 행한 일이라지만 발뺌을 할 수도, 받아들여질 리도 없는 일이다.
“천화, 검을……!”
때문에 설영은 필사의 항전을 각오하며 천화에게 혈마검을 넘겨줄 것을 소리쳤다.
“으하하하하하하하!!!”
하지만 그때, 무너진 벽 너머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귀여운 녀석! 나랑 놀고 싶은 게로구나. 그래, 어디 함께 놀자꾸나!!”
“무웃?!”
야수궁주는 기쁜 듯 웃어젖히며, 날아간 속도보다 더 빠르게 흑우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