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다시 중원으로 (1)2021.05.04.
“궁도들은 들으라!”
“예!”
궁주의 외침에 야수궁도들이 절도 있게 대답했다. 헌데 그들의 위치 선정이 묘하다. 마치 세 사람을 포위하듯 선 것이다.
“죄인을 궁으로 압송하라! 이번 일에 대한 상벌은 궁에 돌아가서 물을 것이다!”
“예!!”
“아가씨, 죄송합니다. 얌전히 따라오시죠.”
“이거 놔!”
이유는 간단하다. 남만의 율법을 어긴 죄인이 여기 있었으니까.
“궁주님, 모두 저희 때문에…….”
“소저. 이건 우리의 율법에 의한 것일세. 그대들의 뜻이 어떠하고 상황이 어떠했든 지켜져야만 하는 지엄한 법도이지. 그러니 나서지 마시게.”
설영이 얼른 나서서 세주연을 두둔해보려 했으나, 야수궁주는 단호했다. 이전에 보았던 딸바보는 온데간데없고, 딱딱하게 표정을 굳인 굳은 의지의 무인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우. 참으로 큰일을 해주었군. 이렇게 빨리 녀석을 제압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나와 야수궁은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네. 허나 상황이 이런 만큼 그 보답과 인사는 잠시 미루어야 하겠군. 이해해주겠나?”
“예. 물론입니다.”
“1대는 죄인을 압송하라! 2대는 금강토룡의 시신을 지키고, 3대는 당장 주술사들을 데려와 악기가 주변에 퍼지지 못하게 하라!”
“예!!”
“빨리빨리 움직여!”
천화의 양해까지 구한 세주안은 즉시 궁도들을 부려 상황에 대처했다. 세주연을 궁으로 데려가고, 다른 영물들이 혹여나 금강토룡의 시신을 취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으며, 주술사들을 통해 악기를 정화하여 주변 환경과 다른 영물들에게 놈의 악기가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생전에 금강토룡이 쌓은 힘이 어마어마했기에 놈의 시신을 취하려드는 놈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가 일류 고수, 절정급의 고수들도 수두룩한 저들을 뚫고 목적을 이루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그렇게, 천화와 설영은 세주안과 세주연을 따라 야수궁으로 돌아갔다. 궁주의 집무실로 이동해 이번 일에 대한 마무리를 지었다.
“죄인은 들으라!”
“아빠!”
“세주연. 예를 갖춰라. 지금 나는 네 아비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야수궁의 궁주로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야수궁에 도착하자마자 길게 끌 것도 없다는 듯, 세 사람을 모아놓은 세주안이 엄한 목소리로 세주연을 꾸짖었다. 롱롱이를 데려간 것이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녀석을 이용해, 그리고 직접 손을 써가며 영물에게 위해를 끼친 일은 율법상 용인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악물로 여겨지는 만큼 예외성을 둘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세주안은 더 엄히 죄를 꾸짖었다. 궁주인 자신부터가 사적인 감정과 아량으로 율법을 어긴 죄인을 용서한다면, 이 남만 땅에 법도가 바로서지 않을 테니까. 그것을 알기에 세주연도 뭔가 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애교나 변명으로 해결 될 일이 아니었으니까.
“너는 율법을 어기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영물에게 위해를 가했다. 인정하느냐?”
“……네.”
“비록 영물의 숨을 직접 끊은 것은 아니나 그 죄가 가볍지 않다. 따라서 나는 야수궁의 궁주이자 남만의 관리자로서 100일의 근신과 같은 기간 동안 환상향 관리를 명한다.”
“아빠!!”
환상향이 무엇인지 세주연이 듣자마자 펄쩍 뛰었다. 환상향. 그곳은 남만에서도 보기 힘든 특이하고 강력하며 환상적인 영물들이 기거하는 비밀 장소였다. 때문에 남만인이라면, 야수궁의 인물이라면 꼭 한 번 들어가 보기를 소망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한 번이라도 들어가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환상향의 영물들은 특이한 영물들인 만큼 그 성격 또한 괴팍했다. 영성을 지닌 만큼 지능도 뛰어나고,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무척이나 능글맞고 짓궂게 구는 경우가 많았다. 율법에 얽매인 그들이 자신들을 힘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그러는지도 몰랐다. 물론 율법이 아니라도 쉬이 제압하기 어려울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영물들도 많았지만. 그런 까닭에 어떤 이들은 이곳을 ‘영물들의 경로당’이라고까지 부를 정도였으니,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환상향에 발을 디뎌본 적 있는 세주연이 펄쩍 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궁주의 말은 무거운 법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소리를 쳤지만 세주안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아빠, 미워!!”
결국, 포기한 쪽은 세주연이었다. 천화를 따라갈 생각까지 품고 있던 세주연이었지만, 근신과 환상향의 관리 책무를 맡은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을 예상했기에 내린 판단이었을 수도 있지만.
‘봐줬네.’
그 과정을 지켜본 천화는 속으로 피식 미소를 지었다. 궁주로서의 소임을 다한 듯 보이지만, 사실 따져보면 많이 봐준 것이니까. 일단 영물 사냥에 가담한 것으로 처리할 수 있던 것을 살짝 발을 걸친 정도로만 빼낸 것도 그랬고, 그 처분을 근신과 환상향의 관리로 잡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환상향은 야수궁의 고수들도 꺼려할 만한 곳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환상향의 영물 중에 악물이라 불릴 만한 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오히려 친화력을 높이고 내공을 단단히 쌓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내로라하는 영물들이 집단으로 기거할 만큼 기운이 풍부한 곳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이 정도라면 누구라도 토를 달지 않을 정도의 처분이기도 했다. 죄를 논하는 자리에서 제 멋대로 뛰쳐나간 것 또한 묵인해주기도 했고.
“다음은 이번 일에 대한 상을 내리겠다.”
그때 문을 부수고 뛰쳐나간 딸아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주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상을 줄 차례. 천화에게 내렸던 임무가 있는 만큼 그에 대한 보상을 하기 위함이다.
“미리 말하지만 이것은 야수궁의 궁주가 아닌, 나 세주안의 개인적인 부탁에 대한 보상이다.”
그에 앞서 세주안이 선을 그었다. 영물을 해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생각할 때, 악물을 때려잡았다고 야수궁 차원에서 보상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만약 이와 관련하여 문제가 생길 경우 개인이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남만인으로서, 야수궁주의 자리에 있는 자로서 영물을 해하여 달라고 다른 이에게 부탁한 것을 물고 늘어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주변에 도열한 이들 중 문제를 제기할 생각 따위는 없는 듯 보였다. 그만큼 평소에 잘했다는 뜻이겠지.
“정말 잘해주었네, 아우님.”
별다른 반발이 나오지 않자 세주안이 굳었던 표정을 풀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도 천화가 이렇게 빨리, 근본적인 원인까지 해결해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악물들을 사냥하며 그들의 행동을 제약시키고 시간을 벌어주기를 바랐을 뿐. 만약 금강토룡의 행패가 심해지면 직접 나서서라도 남만을 수호하려 들었을 세주안이기에, 그 눈빛에는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남만을 악기로 물들이던 금강토룡을 처치하고 신수를 구원한 것은 어떤 말로도 치하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지. 덕분에 남만 땅이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네.”
심지어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은룡이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하기도 했다. 신수라면 영물보다도 상위의 존재. 존중을 넘어 경배 받아 마땅한 것이다. [중요 분기 임무 ‘악물 사냥’을 완료하셨습니다.] [임무 내용에 따라 보상을 정산 중 입니다.]
‘임무 완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악물 사냥 임무가 그대로 완료된 것이다. 최종 보스를 때려잡고, 보상까지 받는 판이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직 금강토룡과 돈왕을 제외한 악물들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아닙니다. 아직 다른 악물들도 많이 남아있는데요. 치하는 그들을 마저 처리한 뒤 듣겠습니다.”
때문에 천화는 화들짝 놀라 말을 덧붙였다. 이대로 임무가 종료된다면 더 이상 악물들을 사냥할 수 없게 된다. 그 사냥 기회를 놓치기는 아까웠기에 임무를 이어가기 위해 세주안을 구슬렸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원흉인 금강토룡이 사라진 만큼, 그들에게 스며든 사악한 기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고 말 테지. 그 정도는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게 두어도 괜찮네.”
‘제길.’
이대로 악물 사냥의 종료를 선언한 것이다. 물론 천화는 남만인이 아니니 이후로도 영물 사냥을 개별적으로 이어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처음 맹거가 경고했던 대로 감시의 시선이 그들을 따를 터였다. 불가능은 아니지만 훨씬 제약이 생긴다는 뜻이다.
‘어쩔 수 없군. 그래도 얻을 건 얼추 다 얻었으니까.’
“마지막까지 남만을 생각하는 아우의 마음이 가상하군. 좋아, 아우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지. 무엇이든 말해보게.”
[특별 보상 ‘소원권’을 획득하셨습니다.] [단, 해당 소원권은 세주안 개인에게 제한됩니다.] 대신 세주안이 제시한 보상이 꽤 파격적이었다. 소원권. 별도의 보상을 주는 대신, 천화가 원하는 모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무신지로에서도 특별한 임무를, 완벽하게 끝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보상인 만큼 그 가치는 무궁무진 했다.
‘잘못 사용하면 똥이지만.’
물론 소원이라는 것이 말하는 사람의 지식과 욕망, 눈치 등에 따라 무엇을 말할지, 말할 수 있을지가 결정되니까. 소원권을 가진 사람이 소심하거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거나 무엇까지 받을 수 있을지 정보가 부족하다면 가치가 낮은 것밖에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흠, 개인이란 말이지.’
그런 점에서 이번 소원권은 살짝 아쉬운 감이 있었다. 야수궁의 은인으로서, 남만 전체를 구한 영웅으로서 소원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주안 개인에 대한 소원권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야수궁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에 비해 그 범위가 제한 될 수밖에 없었고, 혹 가능하다면 환상향에 들어가 영물 몇 마리를 꼬셔볼까도 생각했던 천화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뭘. 지금은 딱히 필요한 것이 없지만……. 정 그러시다면 나중에 제 부탁을 세 번만 들어주십시오.”
“부탁을?”
그렇다면 당장 필요한 것은 없다. 물론 영약을 요구하거나, 죽은 영물들로부터 채취해 보관 중인 내단을 달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 정도야 세주안 개인의 권한으로 충분히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건 너무 약했다. 당장 천화에게 그다지 필요도 없는 것들이기도 하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중으로 미루어두고 필요할 때 써먹는 것이 훨씬 나을 터였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무한히 소원을 늘리는 것은 무리였고, 자칫 무리한 요구를 하다가 거부당하거나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화가 보기에 이 정도는 무난했다. 이미 세주안과 야수궁 모두 사이가 좋은 데다, 아주 무리한 부탁을 할 것도 아니었으니까.
‘대신 살짝 무리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영약이야 당장 먹어치운 것도 다 소화시키지 못했는데 욕심부리다가 탈이 날 수도 있고. 그리고 시기만 잘 맞춘다면 세주안이 아니라 야수궁 전체를 움직일 수도 있을 테니까.’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법이다. 궁주인 세주안이 움직인다는 것은 남만야수궁 전체가 움직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만약 야수궁에도 이득이 되거나, 그들이 움직일 명분이 함께한다면 세주안이 아닌 야수궁 전체를 움직이는 부탁을 할 수도 있으리라.
“정말 그걸로 괜찮겠나?”
“예. 충분합니다.”
“흐음, 좋아. 그렇게 하지.”
천화는 그 점을 노리고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세주안은 천화를 욕심 없는 인물로 평가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했다. 보통의 무림인이라면 이곳 남만에 넘쳐나는 영물의 내단이나 영초를 배합하여 만들어낸 영단을 원했을 테니까. 한 줌 내공에 목숨을 거는 이들이니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사실 그것은 과욕인 경우가 많았다. 영물과 인간의 기운은 다르다. 만약 완전히 같았다면 일정 수준 이상까지 수련을 쌓은 무인들의 몸에서도 내단 같은 것이 나왔을 테고, 그것을 취하기 위해 혈겁을 일으키거나 시체를 파먹는 이들이 나왔겠지. 물론 그렇기에 특별한 것이기는 했지만, 많이 섭취를 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내공과 영물의 기운은 그 기질에 조금 차이가 있는 만큼, 자칫하다가는 자신의 내공보다 흡수되지 못한 영물의 기운이 커지며 탈이 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약이나 내단을 요구하는 것은 차후에 완전히 몸속 기운들을 통제해 낸 뒤, 부탁 중 하나로 요구를 해도 충분했다.
“생각 같아서는 다시 잔치를 열어 공을 치하하고 싶지만, 상황이 어수선하여 조금 미뤄야하겠군. 그보다, 저 소저는 안색이 좋지 않은데 괜찮은 겐가?”
“예?”
그렇게 논공행상이 끝나고, 천화에게 양해를 구하던 세주안이 대뜸 설영을 가리키며 의문을 표했다. 아까부터 천화의 옆에 자리잡은 설영의 낯빛이 좋지 못한 것이다.
“저는 괜찮습…….”
“설영!”
그러나, 대답을 하던 설영이 돌연 까무러쳤다. 눈알이 뒤집히는가 싶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제자리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