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얘가 왜 여기서 나와? (2)2021.05.18.
“그런데 너무 늦게 발견되면 어떻게 하지?”
잰 걸음으로 빠르게 진법에서 벗어난 설영이 크게 숨을 몰아쉬며 한 가지 의문을 표했다. 다 좋은데, 이곳이 너무 늦게 발견되면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이미 자신들은 용의자로 낙인 찍혀 쫓기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괜찮아. 제갈세가라면 모를까, 당문도 진법에 정통하긴 하지만 한두 달로 풀어낼 수 있을 만큼 무해가 만만하진 않거든. 폭약이라도 동원한다면 또 모를까.”
설영의 우려에도 천화는 태평했다. 독과 암기로 가장 유명하지만 당문은 기관과 진법에도 능하다. 하지만 제갈세가만큼은 아니었다. 제갈세가라도 족히 석 달은 족히 걸릴 무해를 당문이 고작 두세 달 만에 파훼한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제갈세가가 오대세가에 들지 못했겠지. 사천당문이 무공보다 독과 암기를 인정받아 오대세가에 이름을 올렸듯, 제갈세가 또한 기관과 진법에 대한 높은 이해 덕분에 오대세가에 든 이들이니까.
‘당문 혼자서 그들의 적수인 양 자존심을 세우고 있지만.’
우습게도 당문은 자신들의 지식 또한 그에 못지않다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지만, 대개 진법 또는 기관과 관련된 난제와 맞닥뜨리면 제갈세가가 당문을 조롱하는 상황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이번 일 역시 길어지게 된다면 제갈세가에서 그들을 조롱하기 위해 사람을 보낼지도 모르지.’
그것도 아주 최고급 인력으로 말이다. 거리가 꽤나 멀어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당문을 놀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제갈세가였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관계로 당문에서 힘으로 무해를 없애버리고자 할 수도 있지만, 잘못 건드려서 꼬여버리면 살상력을 지닌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진법이라 그것도 어려울 터였다. 특히나 그 원리와 구동 방식이 밝혀지지 않은 천연의 진법이라면 더더욱 위험하다. 자칫하면 진법을 파괴하기 위해 강기를 쏟아붓던 이가 진법에 갇혀 영영 살아나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만약 폭약을 이용해 진법을 구성하는 축을 한 번에 무너뜨린다면 단숨에 파훼하는 것도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폭약은 군부에서 엄격히 관리하는 전략 무기 중 하나였다. 구하기도 어렵지만, 허가 없이 보유하고 사용한 사실이 알려지면 그 어떤 문파라도 참화를 면키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천화는 무해의 파훼까지 약 반년이라는 시간을 잡았다. 설마하니 그 안에 이곳이 발견되지 못할까? 감이 좋은 이라면 일류만 되어도 간파할 테고, 이류 수준이라도 이상함을 감지하고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이 가능할 텐데.
‘그때 우리는 이미 멀리 이동한 상태일 테고.’
약은 제대로 쳐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누군가 미끼를 무는 것뿐. 만약 마교가 전사묘에 잠들어있는 유산을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정파무림은 상당한 위협을 느낄 테고, 그에 따른 대책을 수립하려 들 터였다. 무엇이 잠들어있는지 모르는 만큼 불안감도 더 커질 테니까.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의 순서는 이미 천화의 머릿속에 있었다. 다음 목적지로 소림사가 있는 숭산을 잡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고 말이다.
“그럼 다시 속도를 내볼까? 고불은…… 알아서 잘할 거야. 아마도.”
설마 무신지로에서도 중요 인물이었는데 맥없이 죽기라도 할까. 고불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천화와 설영은 귀주성을 종단하여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최종 목표는 숭산이지만, 가는 길목에서 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았다. @
“흑우였으면 벌써 도착했을 텐데!”
무당과 당문, 그리고 그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언제든지 일러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무림인들이 쌍심지를 켜고 있는 귀주성에서 흑우를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역소환을 유지한 채 몇 날 며칠을 걷고 또 걷던 천화가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무신지로에서도 그랬지만 이 세계는 이게 문제다. 땅덩어리는 커다란데 이동 속도에는 제한이 있는 것. 판타지 배경이었다면 텔레포트니 하는 방법으로 얼마든지 공간을 넘나들며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할 텐데, 무림이 배경인지라 그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기 힘든 것이다.
‘설마 그사이에 누가 날름 채가는 건 아니겠지? 나 말고는 딱히 플레이어가 없긴 하지만……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그것들을 꼭 플레이어들만 가질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물론 경지에 오른다면 흑우처럼 지치지 않고 말보다도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룻밤 사이에 대륙의 끝에서 끝으로 이동 가능한 것도 아니니 가끔 속 터지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무언가 발견되어 꿀을 빨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동해보면 이미 상황이 종료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렇기에 조급해졌다. 천화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계획이 조금 틀어지더라도, 목표했던 것을 다른 이가 먼저 채가더라도 대체 할 수 있는 것들을 무궁무진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귀찮고 번거로워지는 것도 사실이니까.
“여기가 장강인가? 이건 정말…… 엄청나네.”
그렇기에 고인물들은 지역 간을 최대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천화와 설영의 눈앞에 거대한 장강의 위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많은 배들이 대기 중이었고, 사천과 귀주에서 운송되고 또 그곳들로 흘러들어가기 위해 모여든 상단과 물품들이 끝도 없이 쌓여 있었다.
‘귀주를 벗어나자마자 흑우를 타고 질주할 수도 있지만, 장강을 따라 이동하는 게 가장 빠르니까.’
먼 거리를 가장 빠르게 이동하는 방법은 천하제일의 신법을 얻거나 명마를 얻는 것이 아니다. 명마의 경우 일부분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배와 마차, 명마 등 ‘온갖 탈 것’을 이용하는 것, 그리고 최단 거리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을 꿰고 있는 것. 이 두 가지가 갖춰졌을 때, 누구보다 빠르게 먼 거리를 이동하여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지 않는 내공이 있어도,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날려버릴 수는 있어도 인간인 이상 한계가 존재하니까. 차라리 사흘 밤낮을 싸우면 싸웠지, 대륙을 종단한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검증된 방법이기도 하고, 여길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기에 찾아낸 것이 바로 ‘지도’와 ‘이동 수단’. 가장 빨리 움직이기에 빠른 것이 아니라, 가장 빠르게 도착하는 것이 빠른 것이라는 다소 말장난 같은 진리를 깨우쳤달까? 실제 ‘누가 세상에서 가장 빠르냐?’라는 단순한 물음에서 시작된 어느 고인물과 무림 최신속의 신법을 지녔다는 천비도문의 무영자의 대결에서, 배와 말, 마차 등을 갈아타며 이동한 고인물이 승리한 사례도 있었다. 게다가 장강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연도 있었으니, 굳이 육로를 통해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쉬고, 내일 배편을 알아보자. 이곳에서 사천이나 귀주로 오가는 상단도 꽤 많으니까 배가 없진 않을 거야.”
“응. 좋아. 으으으, 간만에 푹 쉬어야겠다.”
잠시 장강의 웅장함을 만끽하던 천화와 설영은 곧바로 묵을 객잔부터 알아보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마을이나 도시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라 적당히 쉬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귀주성 내에서는 조심스럽고 긴장이 되던 것이다. 물론 이곳도 귀주성에서 무척 가깝기는 했지만 일단 경계는 넘었다. 워낙 끝자락이라 사천 땅이라고 말하기도 살짝 애매하긴 했지만 장강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기에, 흑우만 꺼내놓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 않았다. 강 너머부터는 본격적인 사천 땅인 만큼 당문과도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알아볼 만한 당문의 무인들은 이미 귀주성 깊숙한 곳에서 골머리를 싸매고 있겠지.
“쀼쀼!”
거대한 장강의 물을 보자 은룡이도 신이 났는지 노래 같은 울음을 지저귀었다.
“꺄악! 귀여워!!”
“……?”
문제는 바로 그때 발생했다.
“유모! 나 저거 가질래!”
“아가씨. 저건 다른 사람이 키우는 동물이에요.”
“여긴 사천 땅이잖아. 그러니까 다 내 거야! 나 가질래! 가질 거야!!”
“어휴, 또 이러시네. 아가씨도 참…….”
왠 꼬맹이가 빼액 소리를 지르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아이가 가리키고 있는 것이 설영의 품을 파고든 은룡이라는 것이다.
‘녹의……. 젠장.’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는 떼를 쓰는 아이가 입은 옷의 색깔이었다. 선명한 녹의. 사천 땅과 그 근방에서 저런 색깔의 옷을 입는 것은 딱 한 종류의 인간뿐이었으니까.
“설영, 튀어!”
사천당문. 오직 당문만이 저런 녹의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가씨라고 불리는 것으로 보아 신분도 제법 높아 보인다.
‘아가씨라고 불릴 만한 게 누가 있었지? 유모까지 붙을 정도면 직계라는 소리인데…….’
때문에 천화는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저런 꼬맹이는 좀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소협들께서는 잠시 멈춰주시지 않겠습니까?”
“?!”
그사이, 유모로 보였던 인물이 달아나는 천화와 설영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고수!’
설영은 몰라도 천화는 전력을 다해 질주했는데 이렇게 간단히 따라잡힌다고? 당문의 신법이 신속한 편이라지만 보통 수준이 아니다. 최소 일류 끝자락, 혹은 절정 그 이상이라는 소리. 때문에 천화와 설영이 멈추어서면서도 긴장했다. 상대가 다름 아닌 당문의 인물이니까. 꽤나 사람이 많은 대로이지만 언제 하독을 하거나 암기를 날릴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정파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주제에, 그것도 오대세가라는 거창한 껍데기를 쓰고 있는 주제에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천화가 잔뜩 긴장하며 되묻자, 유모로 보이는 인물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아가씨께서 소저께서 품고 계신 아이를 너무 마음에 들어하시는데 저에게 팔지 않으시겠습니까? 값은 넉넉히 치르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이 아이는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쀼쀼!”
공손하지만 말도 안 되는 강짜에 설영이 먼저 응답했다. 그에 호응하듯 은룡이 역시 거부 의사를 밝혔고.
“꺄악! 울음소리도 너무 예뻐! 유모, 나 꼭 쟤 가질 거야! 응? 빨리 뺏어서 나 줘!!”
“……그렇다는군요. 소협들께는 미안하지만 이 늙은이의 청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허나 뒤따라오며 꺅꺅 소리를 지르는 여아의 소리에 유모가 다시 웃으며 설영에게 요구했다. 소리장도. 그 푸근한 미소 속에 진한 살기와 위협을 담아 다시 한 번 그들을 압박했다.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귀하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주대낮에 남의 것을 빼앗으려 들다니요. 무림의 동도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습니까?”
허나 천화도 설영도 그 정도 살기에 위축될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천화가 끼어들기도 전에 설영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 소리를 높이며 그녀를 꾸짖었고, 갑작스런 소란에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과 상인들이 웅성웅성 그들을 둘러싸고 모이기 시작했다.
‘이런.’
그 모습에 천화의 인상이 구겨졌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식의 대응이 해결책이 되겠지만, 상대는 당문이었다. 그리고 천화가 아는 당문의 인물들이라면…….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값을 치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당문을 무뢰배로 모시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올가미를 치고 덤빌 것이 분명했다. 움찔 호다다닥 유모의 입에서 당문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주변에 모여들던 구경꾼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바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서둘러 그곳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천 땅에서는 당문이 왕이니까. 사천에서 당문에게 밉보이면 누구라도 큰 화를 당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문의 일에는 가급적 엮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은 이 근방에서 상식과도 같았다.
“아, 아무튼 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비켜주세요.”
그 반응에 설영조차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상황이 좋지 못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지 마시고 다시 생각해보시지요. 우리 당문은 은혜와 원수를 잊지 않는답니다.”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유모. 대체 은혜로 생각하겠다는 것인지, 팔지 않으면 원수를 질 것이라는 협박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 의도는 명백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은룡을 빼앗겠다는 것이다. 무력 뿐 아니라 당문이 가진 영향력을 행사해서라도 말이다.
‘대체 쟤가 누구길래?’
이쯤되니 천화도 궁금해졌다. 이만한 고수가, 체면을 무릅쓰고 억지를 부리는 이유가 뭘까. 저 여아가 대체 누구이길래?
‘어……. 설마?’
힐끔 고개를 돌려 여아를 쳐다 본 천화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독중화 당소련. 차후 무림 삼화라 불리게 되는 후기지수 중 하나가 바로 그녀인 것이다.
‘아직 꼬맹이인데? 몇 년 사이 폭풍 성장을 하는 건가? 젠장.’
아직은 앳된 티를 벗지 못한 꼬맹이에 불과했지만 훗날 미모와 독심으로 유명해지는 아이였다. 미모보다는 독심으로 유명하긴 했지만. 천화가 무신지로에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는 이보다 훨씬 성숙해진 모습이라서 몰라보았는데, 아무래도 몇 년 사이 훌쩍 커버린 것 같았다. 무신지로에서 둘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약 2~3년 후였으니까.
‘하필 지금 얘랑 마주치다니…….’
그렇기에 천화는 누구보다 당소련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한번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면 그 당가주조차 못 말리는 고집 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