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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물귀신 잡는 고인물 (2) (90/481)

<90화> 물귀신 잡는 고인물 (2)2021.06.01.

검의 차이도 아니다. 내공의 차이도 아니다. 단지 순수한 검술. 숙련도와 이해도의 차이가 달랐다. 같은 무공, 같은 초식을 사용함에도 천화와 상대 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단지 일류와 이류의 수준 차이가 아니라, 마치 삼류 무인과 절대 고수의 차이와 같은 차이였다. 실제가 그러했으니까.

16549478067931.jpg“쯧쯧, 간보는 게 아니라 진짜 휘두르는 것처럼 움직여야지!”

그나마 변수가 될 수 있는 흔들리는 배 위라는 상황도 천화에게는 전혀 장애가 되지 못했기에, 승부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해남파의 대표 무공인 남해삼십육검의 기본은 변화. 그것을 위해서는 충실한 기본기가 핵심이었지만, 그것이 부족한 상대의 변화는 얄팍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초식의 투로를 그대로 따르고 있어 천화에게는 눈에 익은 것이었으니 검은 번번이 가로막혔고, 초식의 변화는 뚝뚝 끊어졌다. 반면 천화의 검은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분명 검을 맞대고 똑같이 멈추어섰을 텐데도 천화의 초식은 부드러움이 살아있었고, 진짜 같은 변초가 무수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푸확!! 검은 한 자루인데 십여 개의 검이 시야를 메운다. 모두 익히면 일검에 서른여섯 개의 변화를 줄 수 있는 남해삼십육검이 천화의 손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전성기 때의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면 천화 역시 서른여섯 개의 변화를 모두 일으켰을 터였다. 그때마다 상대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남았고, 공격적이던 상대의 검은 오로지 수비에는 쓰였다. 그마저도 천화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변화를 일으킬 뿐이니, 시간이 갈수록 누가 더 유리한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분명해보였다.

16549478067935.jpg“너 같은…… 자는…… 없었는데…….”

이제는 전신에 피칠갑을 한 상대가 허무한 듯 말을 뱉으며 쓰러졌다. 마치 억울하다는 듯한 반응이지만, 딱히 그럴 것도 없다. 해남파 씩이나 되는 대문파의 무공을 익혀놓고 도망을 쳤다면, 어떤 식으로든 결국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하기 마련이니까.

16549478067931.jpg‘가르쳐준 자들이 괜찮다 할지라도, 본 파에서 가만 둘 리가 없지.’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밤에 배에서 사람을 낚아채가는 기이한 짓거리를 하더라도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식으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무공을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 눈에 띄지 않게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진짜 고수에게 걸리거나 해남파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에게 걸린다면 화를 면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지금이 아니라 언제라도.

16549478067931.jpg‘그게 조금 앞당겨지는 거니까.’

그렇기에 천화도 딱히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이놈들이 사람을 납치해 죽이거나 이용해 먹은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나? 그냥 놔두었으면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기에, 오히려 이것은 협행이라 할 수 있었다.

16549478067931.jpg“어디 보자,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사람들이 선실에서 갑판으로 올라오기 전에, 천화는 서둘러 죽은 사내의 시신을 뒤졌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물품들을 몽땅 소지품 창에 던져 넣고 시체를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지금 당장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천화 역시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1654947806795.jpg“천화! 무슨 일이야?”

가장 먼저 갑판 위로 올라온 것은 설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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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47806795.jpg“너…….”

16549478067965.jpg“쀼웃!”

그리고 은룡이는 즉시 물을 뿜어내, 천화의 손을 흥건하게 적신 피와 바닥에 고인 피웅덩이를 쓸어내버렸다.

16549478067935.jpg“뭐야??”

16549478067935.jpg“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 뒤로 배에 타고 있던 무인과 상인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혹여나 무슨 습격 같은 것이 있던 것은 아닐까?

16549478067931.jpg“아이고, 미안합니다. 술에 취해서 넘어져버렸네요.”

16549478086403.jpg“……?”

배가 출렁거릴 정도의 공력을 사용할 정도라면 만만한 상대는 아닐 터였기에 잔뜩 긴장하며 나타났지만, 천화가 능청스럽게 넘어갔다. 물론 모두가 믿은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넘어져서 발생한 충격이라기엔 너무 큰 충격이고 울림이었으니까. 천화가 남만의 무인들처럼 거구를 지닌 것도 아니고 외공의 고수도 아닌데, 고작 넘어지는 것으로 그만한 출렁거림이 일어날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딱히 의심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핏자국도, 시체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고 만약 천화가 내공의 고수라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미심쩍어하면서도 다시 자신들의 선실로 들어갔다.

16549478067935.jpg“배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

오직 선원들만이 오밤중에 바빠질 뿐이었다.

1654947806795.jpg“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자 설영이 슬쩍 천화에게 다가왔다. 그녀 역시 그저 넘어져서 생겨난 충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은근하게 물어왔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이지만, 뭔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으니까.

16549478067931.jpg“낚시를 좀 했지.”

1654947806795.jpg“낚시? 이 밤중에? 영물이라도 낚은 거야?”

만약 그것이 정말 낚시로 인한 것이라면 장강에 산다는 괴물쯤 되는 놈이 아니었을까? 설영이 황당해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고기나 영물이 아니라 사람을 낚았을 뿐이니까.

16549478067931.jpg“흐흐흐. 그런 게 있어. 아, 그것보다 은룡이 좀 빌리자.”

16549478067965.jpg“쀼?”

하지만 천화는 명확한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대신 설영의 품에 안겨있는 은룡을 자신의 쪽으로 불러들일 뿐이었다.

16549478067931.jpg“아침까지는 돌아올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쉬고 있어.”

1654947806795.jpg“또 어디를 가려고…….”

풍덩 설영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슬쩍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 천화가 물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작은 물보라가 일어나고, 천화의 그림자마저 물속에 잠기게 되었을 때 이미 천화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무형보를 펼치고, 은룡의 도움을 받아 속도를 높인 것이다. 목적지는 조금 전 상대했던 괴한과 한 패가 머물고 있는 이 근처 어딘가의 동굴이었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그 동굴의 입구가 지상이 아닌 수중에 있다는 것이었지만.

16549478067931.jpg‘이쯤인 것 같은데…….’

밤이 어두워 물속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천화는 기억을 더듬어 어딘가로 향했다. 지도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신지로에서는 이런 식으로 습격하는 자를 역으로 낚는 것에 성공할 경우 그들의 거점이 표시된 지도를 얻을 수 있었지만, 현실이 되었기 때문인지 이미 알고 있는 곳을 굳이 지도로 표시해주지 않는 것이다. 대신 하나의 반투명한 창이 천화를 즐겁게 만들었다. [물귀신의 근거지][돌발 임무] 최근 장강에 사람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물귀신들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다. 물귀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근거지를 찾아 소탕하라 - 성공 조건 : 1) 물귀신의 정체 파악 (완료) 2) 물귀신들의 근거지 발견 (미완료) 3) 물귀신 무리 소탕 (미완료) - 성공 보상 : 대량의 경험치, 물귀신의 재물 근방에서 물귀신이라 불리던 존재가 사실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나타난 돌발 임무창이었다. 아직까지 실패한 적이 없었기에 마주치는 자는 모두 죽는다는 괴이한 소문까지 돌며 물귀신이라 불리는 놈들이지만, 천화는 그들의 근거지의 위치까지 이미 모두 꿰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익힌 무공과 그것을 익히게 된 배경까지도.

16549478067931.jpg‘레벨 업을 할 기회로군.’

그렇기에 거침이 없었다. 그들이 익히고 있는 것은 해남파의 독문 무공이었기에, 자칫 해남파와 척을 지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게 된 배경을 알고 있기에, 놈들이 몰살당하더라도 해남파가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16549478067931.jpg‘그게 어떤 식으로 표현될지도 궁금하네.’

더불어 게임이 현실이 되면서 그들의 거처가 어떤 식으로 표현이 되었을지도 문득 궁금해졌다. 물귀신의 근거지는 흔히 게임에서 말하는 ‘인스턴트 던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무신지로도 수많은 이들이 동시에 즐기는 게임인 만큼, 일반적으로 중요한 NPC를 제외하고는 영물이든 사람이든 계속해서 살아나는 게임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최대한 현실성을 살린다는 취지에서, 임무와 관련되지 않는 이상 상당히 긴 부활 시간을 가지도록 설계되었기에, 레벨을 올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당연히 불만이 쌓였다. 하지만 게임사는 묵묵부답이었고, 결국 플레이어들이 직접 그 해결법을 찾아냈다.

16549478067931.jpg‘던전.’

바로 던전 형태의 지역이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입구를 나갔다 들어오면 몇 번이고 같은 적들이 되살아나는 그곳을 반복해서 입장하며 레벨을 올리곤 했지. 일부는 특정한 임무를 얻어야만 입장이 가능한 곳도 있었지만, 그런 조건을 찾는 것 또한 고인물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 곳을 만들어두었으면서도 플레이어들에게 알리지 않은 개발사의 욕을 한 바가지씩 하기는 했지만.

16549478067931.jpg‘현재 레벨에 딱 맞군.’

슬슬 가까워오는 물귀신의 근거지, 그 입구를 바라보며 천화가 미소를 지었다. 무신지로에서는 레벨보다 무공의 수위가 우선이지만, 일정 수준까지 레벨을 올렸을 때 얻을 수 있는 능력들도 있기에 기대가 되는 것이다.

16549478067931.jpg‘밤사이에 몇 레벨이나 올릴 수 있을지 기대되는데?’

그리고 천화는 이곳뿐 아니라 무신지로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던전 위치와 구성, 레벨 대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만약 여전히 반복 진입과 사냥이 가능한 곳들로 남아있다면, 오늘 밤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6549478067965.jpg“쀼쀼!!”

은룡이가 힘을 쓰자 물살을 밀고 나가는 천화의 몸이 더 빨라졌다. 완벽히 힘을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회복했는지 물살을 조종하고도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천화의 몸이 물귀신의 근거지. 무신지로에서는 물귀신 던전이라 불리던 곳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물귀신의 근거지를 발견했습니다.]

16549478067931.jpg‘흠.’

수중 동굴의 안으로 들어서자 눈앞으로 나타난 알림창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일러주었다. 그러나 천화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던전 형태의 지역에 입장했을 때 나타나야 하는 추가 안내가 함께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던전 특유의 반복 입장, 반복 사냥의 혜택을 누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기에, 어쩌면 한 바퀴를 도는 것으로 끝을 내야 할지 몰랐다.

16549478067931.jpg‘현실이 되었다면 어쩜 당연한 일이기는 한데…….’

예상은 했지만 막상 던전이라는 특수 구역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실망감도 컸다. 레벨 업 노가다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사라진 셈이었으니, 중요 분기 임무를 끝까지 완료해야 하는 천화의 목표 역시 난이도가 높아진 것이다. 평균적으로 획득하는 경험치가 조금 높아졌다 싶더니, 반복 사냥을 막아놨을 줄이야.

16549478067931.jpg‘어쩔 수 없지.’

계속해서 헤엄을 친 천화는 수중 동굴에서 이어진 어딘가로 이동했다. 포옹 수중 동굴의 입구를 제외하면 공기가 통하는 환풍구 이외에 사람이 다닐 만한 공간 하나 없는 비밀 공간이었다. 안에서 보자면 작은 샘 안에서 천화가 머리가 둥실 떠오른 것이지만, 다행히도 그곳을 주시하고 있는 인원은 없었다. 워낙 은밀한 공간이라 자신들이 아닌 누군가가 들어올 리 없다고 여긴 탓인지, 아니면 던전 형태의 지형 특성상 진입과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지 않도록 설계된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들어오기 어려운 만큼 나가기도 어렵다는 것. 출구가 하나뿐이니, 누군가 천화를 피해 달아날 수도 없다는 뜻이다.

16549478067931.jpg“리셋이 되는지는 확인해보면 알겠지.”

삐리리릭!! 물에서 빠져나온 천화는 소지품 창에서 작은 호각을 꺼냈다. 그를 배에서 납치하려 했던 괴한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다. 겉보기에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지만 소리가 일반의 것과 조금 달랐고, 사전에 약속된 신호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을 한때 뺀질나게 드나들었던 천화는, 그들이 신호로 사용하는 호각의 소리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동료들을 불러모으는 호각 신호. 반복 입장이, 던전 리셋이 가능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 쪽이든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16549478067931.jpg“그래봐야 짝퉁이지. 한 번에 상대해주마.”

혈마검을 들어올리며,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물귀신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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