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물귀신 잡는 고인물 (3)2021.06.03.
“살려주십시오!”
“그자들을 찾으시는 거라면 저희가 위치를…….”
푸욱! 천화는 그야말로 무쌍을 찍었다. 놈들이 익힌 무공은 어차피 단 한 가지뿐이었다. 만약 물속이었다면 조금 어려움을 겪거나 놓칠 수도 있겠지만, 오직 하나의 길 밖에 없는 상황에서 놈들에게 빠져나갈 방법 따위는 없었다. 죽거나, 천화를 쓰러뜨리거나. 하지만 자신들이 익힌 무공을,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펼쳐내는 천화 앞에서 놈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필요 없어.”
남해삼십육검. 해남파의 무공을 어설프게 익힌 놈들을, 천화는 똑같은 검법으로 무력화시켰다. 그러고는 바닥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놈들을 도륙했다.
‘그래봐야 수적들일 뿐이니까.’
어찌나 서글프게 울며 비는지, 마음이 약한 이들이라면 측은함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천화는 냉정했다. 이들은 이미 자신의 목숨을 한 차례 노린 바가 있기도 했고, 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은 또 몇이던가. 그들이 빌 때도 이들이 과연 살려주었을까? 어림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놈들은 조금만 틈을 보여도 언제고 뒤통수를 때릴 놈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천화는 냉정하게 놈들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살려두어봤자 천화의 등을 노리거나, 악행을 계속해서 일삼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 이들을 마주한 것이라면, 혹은 천화가 정말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남해도에서 온 인물이라면 구미가 당겼을지도 몰랐다. 남해도를 지배하는 해남파의 독문무공을 이들이 어떻게 익혔을지 궁금하니까. 그리고 독문 무공을 유출시킨 범인을 잡아내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천화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이유로 이들에게 남해삼십육검을 전수했는지까지도.
“곧 만나게 될 텐데 굳이 안내 같은 건 필요 없지.”
그들의 정체는 간단했다. 해남도에서 도망쳐 나온 잔당들이다. 반쯤은 세외처럼 분류가 될 정도로 중원에서 멀고, 또 신비에 싸인 곳이라 아직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무신지로가 처음 열릴 당시부터 해남도에는 큰 사건이 벌어졌다. 무려 내분이었고, 일종의 반란이었다. 해남파의 제자들이 장문인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 장문인과 그를 따르는 이들을 죽이고 자리와 무공을 빼앗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해남도를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 바로 이들에게 남해삼십육검을 가르친 이들이었다. 다시 해남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리를 되찾고 문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으니까. 무공의 수위도 중요하지만 숫자도 중요했기에, 인연이 닿은 이들을 가르쳐 제자로 삼은 것이다. 그것도 직전 제자들에게만 전해지는 남해삽십육검까지 가르치면서.
‘쯧쯧, 또 속냐. 이놈들아.’
문제는 그들 중 일부가 무공만 쏙 빼먹고서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과 함께 있다면 해남파를 차지한 이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에만 성공한다면, 능히 이류나 일류 수준의 무공을 지니고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지 않은가? 그 유혹은 이기지 못한 이들이 몰래 거처를 빠져나와 지금처럼 수적 노릇을 하고 있던 것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해남파의 무공을 익힌 그들이니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으로 목돈을 챙기려들었다. 고작해야 술에 취한 한둘이 물에 빠져 사라진다고 크게 의심을 사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다 결국 재수 없게 천화에게 걸린 것이다. 물론 그들이 충분한 재물을 모았다고 과연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해남파는 중원까지 나서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남해삼십육검을 펼친다 한들 알아차릴 만한 이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가진 바 무공이 있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과연 힘들게 농사를 지어가며 살아가려고 할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게다가 이미 피맛까지 본 상태인데. 남을 해치고 재물을 빼앗는 것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쉬운 법이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쫓을 만한 여력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들이 처음 무공을 배운, 해남파의 잔당들 역시 비밀을 숨기고 무공을 회수하기 위해 그들을 노릴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여력이 되지 않을 터였다. 고작 몇 명의 힘으로 해남파를 되찾기는 어려운 일이고, 워낙 급히 도망을 쳐 나오느라 노잣돈도 충분치 않았기에 아직은 자리를 잡는 것이 우선일 테니까.
‘수적 노릇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용왕채. 천화는 장강수로채가 거의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이 장강의 물길에 새로이 나타나 이름을 떨치고 있는 수적 집단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들이 바로, 해남파의 잔당들인 것이다. 보통이라면 바로 응징에 들어갈 장강수로채이지만, 아직까지 그들이 활개치는 것을 놓아두는 것만 보아도 그들이 가진 저력을 알 수 있었다. 해남도에서 생활을 하던 까닭에 수공이라면 구파일방 오대세가 다음으로 손에 꼽히던 문파인 만큼, 장강수로채 이상으로 훌륭히 익혀냈고 검법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사람들은 장강수로채의 반응을 그저 의아하게만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몇 차례 교전이 있었고, 수로채가 패했던 것이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100레벨을 달성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소폭 증가합니다.] [100레벨 특전이 부여 됩니다.]
“오? 벌써 100레벨인가?”
그렇게 물귀신의 근거지를 완전히 소탕한 천화의 눈앞으로 몇 개의 알림창이 주르륵 떠올랐다. 남만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60레벨 언저리에 불과했던 천화이지만, 내공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며 레벨도 덩달아 오른 것이다. 일반 게임들에서는 몬스터를 사냥해야만 경험치가 쌓이고 레벨이 오르지만, 무신지로에서는 무공의 상승에 따라서도 저절로 경험치가 쌓이기 때문이었다.
“좋았어.”
과거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던 시절 천화의 레벨이 무려 400에 가까웠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100레벨 달성이 가지는 의미는 생각보다 컸다. [보유하고 있는 무공 중 하나를 선택하여 진화시킬 수 있습니다.] [단, 진화 시킬 무공의 숙련도가 10성 이상이어야 합니다.] 바로 무공의 진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 하나만을 진화시키는 것이 가능하고, 해당 무공의 성취가 이미 10성 이상이어야 한다는 제약이 있었다. 그렇기에 상승의 무공을 익힌 이들은 오히려 100레벨을 달성했을 때 바로 무공을 진화시킬 수 없었지만, 천화는 다르다. 그가 익힌 무공 중 상승의 무공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10성 이상을 달성한 무공을 벌써 여럿이니, 당장 이 특전을 활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무공 진화.”
때문에 천화는 지체 없이 특전을 활용했다. 이미 걸어본 길이었고, 다시 시작할 때부터 100레벨 달성 특전으로 사용할 무공을 정해둔 상태였으니까.
“삼재심법을 진화시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삼재심법이었다. 무신지로를 플레이할 당시, 천화가 100레벨에서 진화시켰던 무공은 삼재심법이 아니었다. 무형보. 모든 형태의 움직임을 표현해 낼 수 있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실전에 써먹기 좋은 것이었으니까. 상대의 공격은 피하고, 내 공격은 성공시킨다. 이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법칙이야말로 싸움의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보증 수표와 같은 것이 아니던가? 아직 레벨이 낮아 갈 길이 멀고, 허구한 날 싸움박질을 하던 그때야 살기 위해서라도 가장 실용적인 것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든 무공과 파훼법을 알고 있으니, 즉시 전력이 될 만한 무형보를 진화시키는 대신 삼재심법을 진화시킨 것이다. [삼재심법의 진화 방향을 선택해주십시오.] [만변 / 응축 / 속성 부여]
“만변.”
진화 방향까지 선택을 마치자 무언가 내부에서 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귓가에 새롭게 진화한 삼재심법의 구결이 울리는가 싶더니 무공창에서 삼재심법의 이름이 바뀌었다. [삼재심법이 천화만변무상심법으로 진화에 성공했습니다.] 천화만변무상심법. 마침 자신의 이름과도 어울려 천화심법이라 불렀던 천화의 독문 심법이 중원에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흐흐흐. 다 죽었어.”
진화를 마쳤다는 알림이 다시 나타나는 순간, 천화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무신지로에서 이 천화만변심법을 가진 것은 천화만이 아니었다. 숨겨진 기연을 찾기 위해 삼재심법이나 삼재검법, 육합권, 심지어 철두공에까지 진화를 사용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제법 많았으니까. 그러나 이 심법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것은 천화가 유일했다. 천 가지의 내공심법으로 화(化)하고, 거기서 파생된 힘을 이용해 만 가지 무공을 펼칠 수 있다는 거창한 뜻을 가진 심법이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그만큼 자유도가 높고 사용자의 역량이 중요했고, 그 때문에 대부분 소화해내지 못한 것이다. 천화는 달랐다. 무공을 보면 초식뿐 아니라 내기의 운용까지 샅샅이 뜯어 살피던 능력 때문에, 보는 순간 무공을 복제해내는 버그를 사용한다고 무수한 신고까지 받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정식으로 해당 무공을 익힌 것은 아니기에 높은 성취를 쌓은 고수와 비교하자면 위력은 약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야 초식에 대한 이해로 보완할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이 말은, 천화가 자신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무공을 펼쳐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천화만변무상심법(1성)을 습득하셨습니다.] 아직 고작 1성에 불과하기에 상승의 무공과 수법들을 제대로 펼쳐내기 위해서는 성취를 높이는 작업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 문제였고, 그동안 고질적인 문제점이던 축기 속도 또한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기에 천화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자, 이제 이것만 나오면……. 오?”
그렇게 흐뭇하게 미소를 지은 천화는 다음으로 물귀신이라 불리던 수적들의 품을 뒤졌다. 무신지로에서는 낮은 확률로 등장하던 어떤 물품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게 바로 나온다고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그런데, 막상 놈들의 품을 뒤져본 천화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찾던 것은 총 두 가지였다. 먼저 하나는 그들이 남해삼십육검을 배울 수 있게 해준 비급의 원본이다. 물론 그것을 훔쳐 달아난 뒤, 필사본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엄청난 변화를 기본으로 하는 남해삼십육검의 특성상, 완벽한 이해 없이 조금이라도 잘못 따라 그리면 검초가 변화하고, 초식과 내공이 엉켜 엉망이 되어버린다. 때문에 원본이 아닌 이상, 최소 10성을 익힌 고수가 새로 적은 것이 아닌 이상 사본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중요한 물건인 만큼, 무신지로에서도 이것을 얻기 위해 수백 번 이상의 공략을 거치는 것이 기본이었다. 재수가 없는 이들은 천 번을 넘게 공략하고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러나 아무도 불만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해남파 본파에 걸리면 사지근맥이 잘리고 단전을 폐할 수 있다는 위험부담이 있다고는 하지만, 해남파 정도의 대문파가 가진 절정급 이상의 비급을, 이 정도 낮은 레벨의 사냥터에서 얻을 수 있게 해두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해남파는 중원으로 출두하는 일이 극히 드문 곳이 아니던가? 그래서 차후, 해남파가 본격적으로 중원에 진출하는 그 이전까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꽤나 비싼 값에 거래되는 비급이기도 했다.
“……가진 건 다 나온다는 건가?”
그런 것을 단 한 번의 공략으로 획득했으니 놀랍기 그지없는, 천운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천화는 다르게 생각했다. 던전 형식의 지역이 현실로 바뀌었다면, 다시 초기화되는 일이 없는 대신 놈들이 가진 모든 것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 숨겨둔 까닭에 발견하지 못하는 일은 일어날 수 있어도, 품에 가지고 있던 것이 사라지지는 않을 게 아닌가?
“정말 그런 거라면, 나쁘지 않은데?”
아직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이라면, 반복 공략이 불가능하다는 단점도 충분히 웃어넘길 수 있으리라. 어차피 경험치도 더 많아졌으니 반복 작업이 필요한 구간은 최소화 될 테고, 플레이어는 자신 혼자이니 남들이 사냥했어야 할 것들까지 모조리 독식할 수 있다. 어쩌면 레벨 업 노가다 자체가 아예 필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남해삼십육검의 비급에 이어 찾고 있던 작은 목함까지 찾은 천화는 추가로 한 장의 지도를 더 얻었다.
“이건…… 흑점의 위치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흑점의 위치가 적힌 지도였다. 아무래도 해남파의 비급을 팔아먹으려고 알아보던 모양이다. 흑점이라고 하면 흔히 인육을 파는 객잔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작은 부분일 뿐, 실상은 일종의 암시장과 같은 곳이니까. 세상 모든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다는, 미지에 싸인 암시장. 심지어 하오문조차 그 꼬리를 잡을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고객이 스스로 자신의 신상정보를 판매하지 않는 이상 무엇을 하든, 무엇을 사고 팔든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기 때문에 여러모로 쓰임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런 특수한 장소인 만큼 자주 위치를 바꾸기에, 무신지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천화조차 현재의 위치는 특정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호북에 있다니, 땡 잡았군.”
지도에 표시된 바에 따르면, 그런 흑점의 현재 위치는 호북이었다. 마침 천화과 설영이 배를 갈아타야 하는 장소이기도 했으니 이참에 들러 원하는 물건이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그게 벌써 들어왔을지는 모르겠지만…….’
때문에 일단 그것들을 소중히 소지품 창에 보관하고 다시 길을 돌아나왔다. 혹시나 싶어 입구에서 다시 돌아들어가 보기도 했으나, 물귀신들의 시신은 그대로다. 게임이 현실이 된 이상, 부활을 이용한 무한 사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천화의 머릿속에서도 무신지로의, 이 세계의 공략 방법이 조금씩 수정되기 시작했다. 이미 적지 않은 변수가 생겨났고, 스스로 만들기도 했지만 정해진 법칙대로만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면 그건 이미 고인물이라 부르기 어렵다. 이 정도 작은 변화뿐 아니라 나비의 날갯짓이 설혹 태풍으로 돌변한다 해도 제어해낼 능력이 천화에게는 있었기에, 자신감 있게 물살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은룡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설영이 기다리고 있는 배를 따라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