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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흑점 (1) (98/481)

<98화> 흑점 (1)2021.06.20.

천화가 해남파의 인물들을 만나고 온 것은 비밀이었다. 설영과 무진의 물음에도 그저 일을 조금 보고 왔을 뿐이라고 대답할 뿐 그 이상은 알려주지 않았고, 둘 역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이후로는 꽤나 평온한 이동이 계속되었다. 이동거리는 꽤나 긴 편이었고 그사이 또 다른 장강수로채가 자리를 잡고 있기는 했지만, 천화가 나서서 소개장을 보여준 까닭에 배 전체가 통행료를 면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통행료를 내지 않게 해준 보답으로 선주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긴 했지만, 한번 보여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도야 몇 번이든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16549479091393.jpg“어디로 가는 거야?”

16549479091397.jpg“죄송합니다, 형님. 사문의 명을 받아 가는 것이라 목적지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16549479091393.jpg“아아, 괜찮아. 사문의 일이면 그럴 수 있지.”

그렇게 이동하는 동안 천화와 설영, 무진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천화와 설영이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지만 그런 간단한 교류에도 무진은 크게 즐거워했고, 천화 역시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16549479091393.jpg‘대충 알 것 같으니까.’

무진 또한 사문의 명을 받아 어떤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라 정확히 밝히지는 못했지만 천화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다른 곳도 아닌 곤륜파였으니까. 곤륜파의 위치는 참으로 묘하다. 중원의 구석, 바로 청해의 끝자락에 자리한 것이다. 정확히는 신강 지역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신강 지역은 산세가 높고 험할 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기에, 수많은 인원이 숨어살기에 적합한 곳이니까. 때문에 악인이 몸을 피해 숨어드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그곳에는 십만대산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다.

16549479091393.jpg‘마교의 소식을 전하러 가는 것이겠지. 뭔가 감지된 건가?’

마교의 본거지. 그렇기에 곤륜은 예로부터 마교의 준동을 감시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고, 마교가 준동할 때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곳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파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구파일방에서 실각하지 않았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들의 저력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마교의 기습을 받을 때도 곤륜은 미리 준비한 비밀통로와 비밀 장소에 문파의 미래가 될 이들을 숨겨 명맥을 이어갔다. 그들의 저력이 두려웠던 마교는 아예 곤륜파를 피해 중원으로 바로 숨어들거나 그들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취하기도 했다. 가장 큰 부분은, 곤륜의 현묘한 무공과 그들이 가진 법기들이 마교의 사이한 힘을 깨부수는 일명 파마의 힘을 지녔다는 것에 있었다. 마교에게는 상극이자 천적인 존재가 근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니는 강력한 억제력이 잦은 정사대전을 막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이들이 다 아는 것이었기에, 지금 상황에서 무진이 어딘가로 향하는 이유쯤은 간단히 유추할 수 있었다.

16549479091393.jpg‘좋군.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도 있겠어.’

그리고 그것은, 천화에게도 득이 될 만한 이야기였다.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숭산으로 그가 향하고 있는 이유도, 이런 식으로 마교가 드러나며 뭔가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으니까. 어쩌면 무진이 가진 정보가, 그가 맡은 임무가 그 무언가를 더 빠르게 일어나도록 만들어줄지 몰랐다.

16549479091397.jpg“형님과 누님께서는 이곳에 잠시 머문다고 하셨지요? 아쉽지만 저는 시일이 촉박하여 바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연이 깊은 듯하니,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이미 장강수로채와 얽히면서 예정보다 하루를 더 허비했기 때문인지, 무진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천화와 설영에게 작별을 고했다. 목적지가 호북에서 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방향은 아닌지, 말을 한 필 구한 것이다.

16549479091393.jpg“그래. 분명 또 만날 날이 있겠지.”

함께 다닌다면 분명 써먹을 구석이 분명 있겠지만, 천화는 아쉬움 없이 무진을 배웅했다. 무진이 조급해하며 몸을 돌린 방향만 봐도 그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것 같았지만, 굳이 함께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숭산. 오래전 마교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림맹이 해체된 후, 암묵적으로 구파일방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는 소림사로 향하는 것일 터였다. 천화의 목적지와도 같았지만, 지금 함께 가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굳이 붙잡지 않았다. 천화가 원하는 일은 아마도 무진이 숭산도 도착한 이후 발생할 테니까. 그 전까지는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얻고, 어떤 상황에도 대처 할 수 있도록 무공을 가다듬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얻어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16549479091418.jpg“왜 같이 가자고 하지 않은 거야? 우리도 저쪽으로 가잖아.”

16549479091393.jpg“바쁘다잖아. 그리고 이왕 호북성에 넘어왔는데, 여기서 얻을 수 있을 것들을 얻어야 하지 않겠어? 절밥 얻어먹는 게 그리 급한 일도 아닌데.”

16549479091418.jpg“또 무슨 짓을 꾸미려고…….”

16549479110601.jpg“쀼쀼!”

무진이 향하는 방향과 자신들이 가려 했던 방향이 같음을 파악한 설영이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지만 이내 따지기를 포기했다. 천화의 음흉한 웃음만 봐도 뭔가 꾸미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16549479091393.jpg“서두르자!”

16549479110609.jpg“무우우!!!”

천화는 설영을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이동한 뒤, 흑우까지 꺼내놓았다. 호북에 흑점이 열렸다는 정보는 입수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유효한 것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흑점이 사라지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에 도착할 필요가 있었다. 설사 자신의 위치가 드러나더라도 말이다.

16549479091393.jpg‘설마 벌써 여기까지 흑우에 대해 알려지지는 않았겠지.’

물론 불안요소는 있었다. 무당신룡이 아직 귀주 땅에 있다지만, 그의 사문인 무당파가 바로 이곳 호북성에 있었으니까. 때문에 흑우의 존재가 드러날 경우 작은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가진 것은 의심뿐이고, 천화와 설영이 마교와 연관되었다거나 전사묘를 미리 털어먹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어쩌면 그 전에 장난을 쳐놓은 마교인들의 거처가 발견될 수도 있겠지. 때문에 천화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듯 빠르게 흑우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과도하게 이목을 끌 필요는 없었기에 준마가 달리는 속도 정도를 유지하며 쉬지 않고 이동을 계속했다. 검은 소가 말처럼 달리는 모습이 특이하긴 했지만, 그 정도라면 수많은 기사가 일어나는 무림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최소한의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달린 끝에 꼬박 삼 일이 지난 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16549479091393.jpg“끄응. 꼴이 말이 아니군.”

덕분에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써 거지꼴과 다름없어지긴 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흑점의 유지 기간은 대략 1개월 남짓. 만약 그전에 소란이라도 일어나 위치가 발각된다면 더 빨리 다음 위치로 이동할 수도 있으니까. 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빨리 도착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16549479091418.jpg“여기야? 하아, 드디어 씻을 수 있는 건가?”

덕분에 함께 거지꼴이 된 설영이 마을을 바라보며 푸념 섞인 투정을 부렸다. 은룡이 물을 뿌려준 덕분에 간단히 얼굴 정도는 닦았지만,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것이다.

16549479091393.jpg“조금만 더 참아. 일단은 할 일부터 하자구.”

16549479091418.jpg“대체 누구를 찾길래 그러는 거야?”

하지만 천화는 마을에 도착한 즉시 객잔을 잡고 휴식을 취하는 대신, 설영의 소매를 잡아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흑우도 역소환을 시키고, 역소환을 거부하는 은룡은 품 안에 잘 숨겨둔 상태였다. 그렇기에 설영은 슬쩍 짜증을 부리면서도 긴장한 모습이었다. 천화가 이렇게 조심할 정도라면 보통 사람을 만나려는 것이 아닐 테니까.

16549479091393.jpg“흑점.”

16549479091418.jpg“흑점? 그…… 사람 고기로 만두를 빚는다는……?”

그 말과 함께 설영의 눈에 두려운 빛이 떠올랐다. 무력으로 따지자면 어지간한 중소 방파 하나를 너끈히 썰어버릴 수 있고, 뒤집어쓴 피만 하더라도 몇 양동이는 족히 될 법한 설영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손님을 죽이고 그 시체를 썰어 만두소를 채워 판다는 흑점을 떠올리자 본능적은 거부감과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16549479091393.jpg“뭐, 그러기도 하지.”

틀린 소문도 아니기는 했다. 흑점은 모든 것을 사고 파는 곳이니까. 그중에 인육도 있을 뿐, 인육만두만을 판다거나 들어서는 모든 이들을 잡아 죽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흑점을 찾는 이들은 하나같이 값비싼 금액을 지불하는 우수 고객들이니, 그들을 습격하여 인육 따위를 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때문에 겁을 먹은 설영과 달리 천화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일부러 찾아온 마당에 겁을 먹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16549479091393.jpg“괜찮아. 겁먹을 필요 없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만큼 멍청한 놈들은 아니거든. 운이 좋으면 쓸 만한 물건들을 제법 구할 수 있을 거야.”

16549479091418.jpg“누, 누가 겁을 먹었다고 그래? 흥! 뭐든 나타나라고 해! 내가 전부 해치워 줄 테니까.”

설영이 어설프게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꽤나 귀여운 탓에 천화는 피식 미소를 지어 대답했다. 천화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앞장섰고, 설영은 자신만만하게 소리친 것과 달리 슬쩍 천화의 옷깃을 잡은 채 쫄래쫄래 뒤 따랐다.

16549479091418.jpg“여기야?”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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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장한 설영의 침 넘기는 소리가 천화에게까지 들릴 지경이다. 그들이 선 곳은 평범해보이는 객잔의 앞이었다. 하지만 그 정체는 이름도 무시무시한 흑점이기에, 설영은 잔뜩 긴장하며 천화의 등을 밀었다.

16549479091393.jpg“에고고.”

덕분에 천화가 단숨에 밀려들어갔다. 그 뒤를 조심히 따라간 설영이 마주한 그곳은, 예상하는 것만큼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여느 곳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객잔의 모습. 사실 그것이 당연하다. 설영이야 소문으로만 들은 무시무시한 모습을 생각했겠지만, 그렇게 드러내놓으면 어디 장사를 할 수 있겠나? 당장 정파가 아니더라도 관군이 우르르 몰려와 그들을 잡아가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평범한 객잔을 사들이거나 임대하여 흑점을 차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6549479126439.jpg“어서 옵쇼! 뭘 주문하시겠습니까요?”

빈자리에 앉자 호들갑스럽게 달려오는 점소이의 모습. 여기까지도 일반 객잔과 다를 바가 없었다.

16549479091393.jpg“특별한 맛을 보고 싶은데.”

16549479126439.jpg“어떤 맛을 원하십니까?”

안색 하나 달라지지 않는 점소이를 가만히 바라보며 천화가 암구호를 내뱉었다. 여기에서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일반 손님인지, 흑점의 손님인지가 구분되는 것이다. 하오문의 방식과도 비슷하다. 그들은 따로 대화를 나누는 대신, 자리에 마련된 술잔을 어떤 방식으로 엎어두느냐에 따라 판단을 하지만 말이다.

16549479091393.jpg“보라색 맛이 좋겠군.”

16549479126439.jpg“보라색 맛이로군요. 알겠습니다. 숙수님께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16549479091393.jpg“함께 가지. 숙수를 직접 만나보고 싶군.”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는 점소이를 천화가 붙잡았다. 숙수를 직접 만나보겠다고 이야기하며 그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16549479091393.jpg‘처음이니까 어쩔 수 없지.’

원래대로라면 검은색 맛을 보고 싶다고 해야 했을 터였다. 그것은 이미 흑점에 들러본 적이 있거나, 없더라도 그들과의 접점이 있음을 증명하는 일종의 입장권을 가졌을 때 하는 말이니까. 그러나 천화는 입장권을 가지지도, 기존에 방문해보지도 못했기에 처음 방문을 뜻하는 암구호를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이럴 경우, 약간의 시험을 거쳐야만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16549479126439.jpg“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먼저 숙수님께 말씀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16549479091393.jpg“그러지.”

점소이를 따라 움직인 천화가 그가 지정한 장소에 멈추어 섰다. 뒤따르던 설영 역시 마찬가지. 곧 시험이 시작될 것임을 알기에, 천화는 슬쩍 전음을 날려 설영에게 경고했다.

16549479091393.jpg[뭐가 보이든 소리치거나 움직이지 마. 어차피 환영이니까.]

16549479091418.jpg“응?”

우우우웅!!! 그때, 어떤 미묘한 기운이 그들을 덮쳐갔다. 기습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진법의 힘이었다. 그와 함께 시야가 바뀌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 평온하던 객잔의 모습이 낡고 허름하게 바뀌었고, 즐거이 먹고 마시던 손님들의 모습이 피칠갑을 한 채 쓰러진 시체들로 바뀌었다.

16549479091418.jpg“흡.”

그들이 먹던 음식 또한 마찬가지. 만두는 눈알로, 면 요리는 내장으로 변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어설픈 자들을 겁에 질려 달아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16549479091393.jpg‘이것도 안 통하네.’

피식 허나, 놀란 표정의 설영과 달리 천화는 씨익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환영이 그를 덮친 순간 일시적으로 그 역시 환상을 보긴 했으나, 곧 상단전에서 일어난 현묘한 기운이 그의 심신을 안정시키고 환영을 깨뜨린 것이다. 선천진기가 가진 환상을 물리치는 능력이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다.

16549479110601.jpg“쀼!”

설영 역시 곧 안정을 되찾았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입을 틀어막은 그녀였지만, 은룡이 불쾌한 듯 짧게 소리를 내자 환상이 거두어진 것이다. 억지로 세상의 기운과 이치를 비트는 진법의 힘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신수인 은룡이 감히 자신의 주변으로 범접치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신수의 또 다른 효용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천화에게는 그저 설영이 잘 버텨주는 것으로만 보였다.

16549479126439.jpg“숙수님께서 만나시겠다고 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잠시 후, 괴이한 환영에도 꿈쩍하지 않는 두 사람을 지켜본 점소이가 다시 주방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들을 진짜 흑점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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