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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흑점 (2) (99/481)

<99화> 흑점 (2)2021.06.22.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천화와 설영이 향한 곳은 객잔에 딸린 별채였다. 전각의 숫자는 그때마다 다르지만, 각 별채마다 조금씩 다른 물건을 사고 팔기 때문에 처음 오는 자들은 무엇이 있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였다. 물론 돈만 낸다면 원하는 것이 있는 장소로 안내해주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돈을 내야 한다. 게다가 이렇게 하면 시간은 아낄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을 보고 경험을 쌓을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기에, 천화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16549479219595.jpg“이걸 써주십시오.”

그렇게 첫 번째 전각에 도착하기도 전에 점소이가 품에서 작은 가면 두 개를 꺼내 그들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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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점에 방문했다는 사실 자체를 알리고 싶지 않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기에, 규격화된 가면을 사용해 서로를 감추는 것이다. 자신을 알리지 않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간혹 그것이 멋없다며 자신이 가져온 가면을 쓰려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이곳에서 특별한 가면을 쓸 수 있는 것은 기존에 많은 금액을 사용한 특별 고객들뿐이었기에 제지당했다.

16549479219595.jpg“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별채의 앞까지 그들을 인도한 점소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표횰히 사라졌다.

1654947921961.jpg“고수……!”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듯 보였지만 실은 반박귀진의 고수였던 것이다. 어디서 흑점에 대해 주워듣고 찾아오는 잔챙이들을 내쫓아야하니 어지간한 무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겠지만, 절정 고수씩이나 되는 이가 문지기 역할을 한다는 자체가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16549479219614.jpg“가자.”

그러나 천화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장 무당파의 본산이 있는 이곳 호북에 자리를 잡은 것부터가 대담함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흑점의 정체는 따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마음먹는다면 단숨에 대문파의 수준으로 세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니 그들의 무공 수위에 일일이 놀라다가는 끝도 없을 터였다. 중요한 것은 저 별채 안에 자리잡고 있을 온갖 진귀한 기물들. 그것들의 옥석을 가려 손에 넣는 것뿐이었다.

16549479219614.jpg“잘 따라와. 아무하고나 말 섞지 말고.”

불필요한 시비나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설영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 천화는 앞장서서 별채를 향해 다가갔다.

16549479219614.jpg‘이번에는 세 채인가?’

별채는 모두 세 개의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물건을 매입하는 곳일 테니 실상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장소는 두 개뿐일 터였고, 각 전각으로 향할 수 있는 갈림길에서 천화는 망설임 없이 가장 왼쪽에 위치한 전각을 골랐다.

16549479219626.jpg“…….”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거래 중이던 제법 여러 명의 사내들이 천화와 설영을 바라보았다. 모든 물품을 취급하지만, 희귀도나 가치가 낮은 물품에 대해서는 오히려 값을 후려치는 이들이기 때문인지 아주 많은 이들로 북적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흑점 자체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곳은 아니었고, 짐꾼들은 입장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대신 서로를 탐색하고 경계하는 눈초리는 예민하기 그지없었다. 흑점 내부에서는 싸움이나 분란이 허용되지 않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경계를 하는 것이다.

16549479219595.jpg“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판매하시겠습니까?”

좀 더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명의 상인들이 생글거리는 낯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흑점의 상인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름기 좔좔 흐르는 모습이었지만, 저 모습에 속아 얕보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저 모습은 특수 분장에 가까울 정도로 잘 꾸며진 것이고, 그 안에는 어떤 괴물이 숨어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16549479219614.jpg“장막.”

그들 중 한 명의 앞에 선 천화가 짧게 자신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정체를 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물건을 사고 파는지를 감추는 것도 중요하니까. 이렇게 장막을 요구한다면 다른 이들의 눈을 가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훤히 노출된 상태에서 거래가 이루어진다. 무엇을 취급하는지 다른 이들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희귀한 물품이거나 거액이 오고간다면? 이후의 일은 장담하기 어렵다. 적어도 흑점 안에서 일을 벌이지는 않겠지만, 이곳을 나서는 즉시 뒤를 밟히거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흑점을 공격하여 그것을 취할 수 없으니, 해당 물품을 얻은 방법이나 돈 따위를 노린 이들이 판매자를 습격하는 것이다.

16549479219614.jpg‘악취미란 말이지.’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흑점의 입장에서는 애초부터 장막을 쳐주는 것이 옳을 터였다. 감히 흑점에서 소란을 피우는 이들은 없겠지만, 만약 눈이 돌아갈 만한 무언가를 꺼내놓는다면 흑점에 수작을 부리려 하는 이들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흑점은 자신감이 넘쳤다. 덤빌 테면 덤벼봐라. 마치 그렇게 말하듯 개의치 않았고, 대신 자신들과 거래를 한 인물을 보호해주는 일도 없었다. 어찌 보면 그들을 통해 시선을 돌리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천화의 눈에는 아는 만큼만 대우해주겠다는 악취미가 분명해보였다. 짝짝 상인이 가볍게 손뼉을 치자 점원들이 유령처럼 다가와 그들을 장막으로 감쌌다. 약간의 소음조차 허용하지 않는 걸음걸이가 그들이 살수 훈련을 받았음을 보여주었지만, 천화는 설영과 달리 긴장하지 않았다. 장막이 모두 둘러진 후에야 소지품 창을 열어 자신이 가진 물건들을 꺼내놓았다.

16549479219595.jpg“오호?”

천화가 꺼낸 건 남만에서 얻어온 희귀한 약초와 물건들이었다. 일부 자신이 쓸 것은 따로 떼어놓았지만 그 양은 수레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많았고, 희소성은 여전히 높았다. 남만야수궁이 남만에서 자생하는 약초들의 전매권을 특정 상단에 주었기에, 중원 깊숙한 곳에서 이것들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수요가 넘치니 수레 하나가 아니라 열 개라도 모자라다. 희소성은 여전히 높았고, 흑점의 상인 또한 눈을 반짝거렸다. 시스템의 보정이 있다고는 하나 그 엄청난 양의 약초와 물품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도 특이했다. 오직 자신들의 손을 거쳐 사고 팔게 될 물건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돈귀신 집단답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들이 값을 제시했다.

16549479219595.jpg“하나같이 상태가 좋군요.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16549479219614.jpg“괜찮군요. 거래하겠습니다.”

주판을 튕겨 보여준 금액은 무려 80냥. 당연히 단위는 금자였다. 거의 천화가 가진 전 재산과 맞먹을 만큼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천화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으니까. 한창 부를 축적할 당시, 천화가 가진 금자가 천만 냥을 넘어섰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가 푼돈이었다.

16549479219614.jpg‘내가 가진 게 100냥쯤 되니까, 적당한 물건을 몇 개쯤 살 수 있겠군.’

그리고 실제로도 합당한, 아니 후한 가격이었다. 일반 장사치들이라면 첫 제시 금액에서 장난을 좀 쳤겠지. 그 다음 마지 못하는 척 조금씩 금액을 올려 부르는 것이 상술의 정석이겠지만, 이곳은 달랐다. 악명과 달리 제법 양심적인 가격을 제시할 뿐 아니라, 만약 상대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경우 구입하지 않거나 되레 값을 깎아버리는 것이다. 또한 저것들을 귀주성 일대에서 팔아치웠다면 금자 50냥쯤이나 받았을 터였다. 멀리까지 운반하고도 상태가 좋으니 실제 저들이 필요한 이들에게 판매하는 금액은 100냥쯤 되겠지만, 소지품 창 덕분에 별다른 노력이 들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훌륭한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저만한 양을 한 번에 팔아치울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그렇게 금자 80냥을 받아든 천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음 전각으로 이동했다. 이제 본격적인 쇼핑을 할 시간이었다.

1654947921961.jpg“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설영의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사방으로 걸려있는 병장기들은 일반의 대장간에서 찾아보기 힘든 명품들이었으니까. 실제로 물품 등급을 확인해보더라도 가장 낮은 것이 [명품]등급이고, 대부분이 [희귀], 아주 드물게 [유일] 등급이 있을 만큼 흑점에서 취급하는 병장기의 품질은 뛰어난 것이다.

1654947921961.jpg“그, 금자 200냥?”

물론 그만큼 가격도 어마어마했다. 저만한 검들은 사실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할 만큼 희소성이 높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가격표가 붙어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병장기들을 살피던 설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난 여정들을 통해 설영 역시 제법 돈을 모으기는 했지만, 아직 천화에게 빚진 금액의 원금을 반도 갚지 못할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1654947921961.jpg“흐, 흠. 무인에게 병기가 전부는 아니지.”

급격한 태세 전환을 보이는 모습이 퍽 귀여웠지만, 애초에 저것은 돈이 썩어넘치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기에 천화도 미련은 없었다. 당장 무명검과 혈마검을 넘어설 만큼 엄청난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16549479219614.jpg“일단 둘러보자. 네 인피면구도 다시 맞춰야 하고.”

때문에 피식 웃으며 내부를 좀 더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1층부터 도배된 휘황찬란한 병기들에 시선을 빼앗겨 아예 다른 층은 오를 생각도 못하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었기에, 2층으로 오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으며 앞으로 계단으로 향하자 금방 2층에 도달할 수 있었고, 한쪽에 적힌 팻말을 통해 2층의 판매 물품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급, 서적]

1654947921961.jpg“비급을 판다고?”

온갖 비급과 희귀한 서적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공 비급을 사고 팔다니? 설영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 솔직히 얕잡아보는 생각도 있었다. 돈을 주고 사고 파는 무공 비급이라면 얼마나 대단하겠나? 기껏해야 이류, 아니 정말 높게 쳐줘도 일류급의 무공 정도가 한계이지 않을까? 분명 그것도 대단한 것이고, 잘만 익힌다면 일가를 이루어 대대로 무가로서 먹고 살 수도 있긴 하겠지만…….

16549479219614.jpg“응. 그런데 살 만한 건 없을 거야.”

1654947921961.jpg“역시 그렇지?”

16549479219614.jpg“너무 비싸거든. 여기 있는 것들은 최소 일류급인데다 절정 이상의 것들도 있어서, 지금 우리 주머니 사정으로는 구경밖에 못해.”

1654947921961.jpg“……뭐?!”

허나 천화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을 초월했다. 최소가 일류에, 절정 이상의 무공들이라고? 그 정도면 소위 대문파라 이야기하는 명문들조차 한두 개 가지고 있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그런 것이, 이곳에 그렇게나 많이 널려있다고? 비급을 취급하는 방만 따져도 예닐곱 개는 족히 되어보였기에 설영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확실히 그런 수준의 비급이라면 수천 냥, 수만 냥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울 테지만…….

16549479219614.jpg“일단 저기부터 가보자.”

그 자리에 굳어있는 설영을 이끌고 천화가 향한 곳은 비급이 아닌 희귀 서적들을 판매하는 방이었다. 여러 개의 방을 연결시켜놓아 문으로 들락거릴 필요가 없고, 안으로 들어간 이가 어느 방에 있는지 특정할 수 없었기에 어느 문으로 들어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끝방의 문을 열고 들어간 뒤, 안에 비치된 서고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16549479219614.jpg‘이런 곳에 진짜배기가 있는 법이지.’

설영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지만, 천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흑점이 열릴 때마다 취급 물품이 조금씩 바뀌기에 그 역시도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집중해서, 그리고 빠르게 손을 옮겨가며 서적의 이름과 종류를 훑었다. [산호 활인 침술][명품] [장호아 친필 담론서][희귀] 대부분은 별 쓸모없는 것들뿐이다. 개중에는 특수한 기술을 익힐 수 있는 일명 [기술서]들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희귀도만 높을 뿐 무공과 관련되지도 않거나 아주 약간의 도움을 주는 잡서들이 대부분이었다. 학사들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그러나 무인인 천화에게는 의미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개중에는 악보나 노래 가사집, 누군가의 일대기를 다룬 자서전 따위도 많았다.

16549479219614.jpg“아.”

그렇게, 권법을 펼치듯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물품의 이름과 등급을 확인하던 천화의 손길이 어느 한곳에서 멈추었다. 무언가를 발견해내고 말았다.

16549479219614.jpg“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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