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사기치다 걸리면 뭐다? (2)2021.07.06.
용호십삼검은 이름 그대로 용과 호랑이의 형상을 본떠 만든 열 세 개의 검식으로 이루어진 무공이다. 단순히 그 형태만 따온 것이 아니라, 그 기질과 특성까지 가져온 것이었기에 각각의 특징마저 지니고 있었다. 그중에 호랑이를 대표하는 것은 흉폭함. 짐승들의 왕이자 먹이사슬 최정상이 위치한 폭군의 흉성이 천화의 검에 담기었다. 콰아앙!!!!
“끄악!!!”
일격. 단 일격이었다. 초식 동물을 노리는 포식자의 그것처럼 들이닥친 천화의 검이 순간 힘을 집중 시킨 칠성검진의 무인들을 물어뜯었다. 내공의 총량으로만 따진다면 그들이 우위에 있을지 모르겠으나, 순간적인 폭발력이 그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검진의 축이 된 무인의 검을 할퀴고 가슴을 베어내는 순간, 천화의 검끝에서 광폭한 기운이 폭사한다. 그저 한 명을 베는 것이 아니라 검진의 한 면을 터트리며 근처에 있던 이들까지 모조리 날려버렸다.
“미친!”
그야말로 미친 파괴력이 아닐 수 없다. 실제 극성으로 익혀내면 아예 검기나 검강으로 호랑이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하니까. 만약 그들이 익힌 것이 태극의 묘리를 담은 무당파 본산 절기였다면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균형과 조화를 지향하는 태극의 힘은 모든 상대의 공격을 흩어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다 한들 더 강한 힘으로 박살을 내면 그만이지만.’
어쨌든 기본공을 겨우 벗어난 그들의 무공으로는 천화를 막을 수 없었다.
“마, 막아라!”
수십 명이 내력을 공유해도 부족하던 것이, 한번 뚫린 마당에 충분해질 리 없다. 천화는 호랑이의 형상을 그려내는 대신 스스로가 호랑이가 되어 양떼 무리 같은 놈들의 사이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서걱! 천화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꼭 무언가 하나씩이 베였다. 가뜩이나 어마어마한 절삭력을 자랑하는 혈마검에 천화의 검기가 입혀지자, 같은 검기를 사용해 부딪혀오는 이들조차 손아귀가 저릿해 검을 놓칠 지경이었다. 이전이었다면 혈마검도 천화를 은근히 꼬드겼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혈마검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을 만큼 힘의 차이가 분명했다. 고작해야 일류 고수의 문턱을 넘은 이가 다섯 명의 일류 고수와 수십 명의 이류 무인들을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이놈! 내가 상대해주마!!”
그 사이로, 한발 물러서 있던 상무문주가 뛰어들었다. 이미 혼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텐데도 실력에 대한 자신인지, 아니면 협공을 노리는 것인지 제법 익숙한 무공을 펼치며 천화를 향해 검을 떨쳤다.
“헛배웠네.”
그러나 천화의 평가는 냉정했다. 상무문주가 펼치는 검법이 무엇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무당파의 칠성검. 절기는커녕 상승의 무공으로도 분류되지 못하는, 기본공을 간신히 벗은 일종의 입문 무공이다. 제 입맛대로 변형을 지켰는지 조금은 더 실전적으로 바꾸어 펼치고 있지만, 천화가 보기에는 바꾸지 않은 것만 못했다. 칠성검은 무인을 성장시키는 검이다. 검세가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기본에 충실하며 나아감과 물러섬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지금 놈이 펼치는 검은 어떠한가? 무가를 이루기 위해 살기어린 공세를 마구 욱여넣은 탓에, 검식에 담겨있던 현묘함은 사라지고 각 초식 간의 연계마저 가닥가닥 끊어졌다. 워낙 살기가 짙어 상대가 수세에 몰릴 경우 승기를 이어갈 수 있겠지만, 조금만 수준이 있는 고수를 만난다면 단숨에 파훼가 될 엉망진창에 불과한 것이다. 쩌엉! 그렇기에 천화는 무심한 얼굴로 검을 한 번 찔러넣는 것으로 놈을 무력화시켰다. 천화에게는 온통 허점투성이로 보이기는 했지만, 그중 가장 큰 허점을 향해 쑤욱 검을 밀어넣자 초식의 연결이며 힘의 전달이 끊겨버린 것이다.
“컥!”
억지로 휘돌리던 내공마저 꼬여버리니 기맥이 뒤틀리고 핏물이 목으로 솟구치는 것이 당연했다. 내공 대결로 몰아간 것도 아니건만, 상무문주는 스스로 내상을 입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문주님!!”
“문주님을 지켜라!!”
“얼씨구?”
그러자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서성이던 무인들이 놈을 둘러싸며 다시 진형을 갖추었다. 이미 두 눈에는 패배감이 찌들어있었지만, 그래도 문주라는 것인지 포기하지 않고 지키려는 것이다.
“네, 네놈은 무당파가 두렵지도 않느냐!”
“무당? 너희가 무당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데?”
그때 상무문주가 천화를 향해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질렀다. 힘으로 찍어누르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당파의 이름을 팔아 구명을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짐작을 마친 천화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나의 검은 무당에서 사사한 것이다! 이런 악독한 짓을 하면 무당파가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그것을 오히려 천화가 자신들과 무당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문주는 더욱 기세를 높여 소리를 질렀다. 그것도 아주 교묘한 말로.
“누가 들으면 속가라도 되는 줄 알겠다?”
움찔 얼핏 들어서는 마치 무당파의 속가제자라도 되는 듯 들렸지만, 무당에서 사사했다는 것일 뿐 속가라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그게 그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무당파에 입문하여 수련을 마친 속가제자도 있지만, 그저 몇 푼 돈을 후원하고 헛껍데기 같은 무공을 배우는 이들도 제법 되는 것이다. 푼돈이라도 모이면 제법 커지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그런 이들은 해당 문파와의 연결고리가 약하기 때문에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꾸준히 후원금을 보낸다. 그것은 무당파를 비롯한 대문파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고, 상무문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속가를 사칭하는 건 꽤 중한 죄일 텐데, 어디 계속 해봐. 근데 사기 치다 걸리면 손모가지든 모가지든 날아간다는 건 알지?”
“내, 내가 언제 속가를 사칭했느냐! 그래도 우리의 소식을 접하면 당장 달려올 것이다! 우리가 매해 무당에 보내는 후원금이 얼마인 줄 아느냐!”
“다 해봐야 금자 오십 냥도 안 되겠지. 아니, 스무 냥이나 될까? 그런데 말이야. 무당파에 그 정도 돈을 보내는 곳이 얼마나 될까?”
싱긋 웃으며 대꾸하는 천화의 말에 상무문주가 말을 잃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실제 그들이 무당파에 보내는 돈이라고 해봤자 매달 은자 스무 냥. 금자로 따지면 한 냥밖에 되지 않았고, 열두 달을 합쳐도 금자 열두 냥이 고작이었다. 주위에는 마치 대단한 후원자인 양 행세를 하며 이득을 취했지만 현실은 그러했다. 그리고 천화의 말처럼 그들만큼, 아니 그들 이상으로 후원금을 보내는 곳은 못해도 일백 곳은 거뜬히 넘을 터였다. 진짜 큰돈을 보내는 속가 문파들을 제외하고서도 말이다.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느냐!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곧 무당을…….”
“까고 있네. 네까짓 것 손봐준다고 무당이 눈이나 하나 깜짝 할 것 같나? 삼대 제자 한 명이라도 본산에서 내려보낼 것 같아? 어쩌면 이런 문파가 있는 줄도 모를걸?”
오직 사실만으로 두들겨 패는 천화의 입담에, 상무문주의 얼굴과 가슴이 시퍼렇게 멍들어갔다. 그리고 눈치를 보았다. 무당파에서 한 자락 얻어온 무공으로 반쯤 속가인 척을 하며 이만큼이나 문파를 키워냈지만, 실상 그들과 큰 인연이 없음은 수하들도 잘 모르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그를 일류 고수로 만들어준 것은 무당에서 배워온 칠성검이 아니라, 길가다가 우연히 주운 어떤 무인의 시체가 품고 있던 영약 덕분이었다. 이후 일류의 내공 수위와 무당파의 이름을 이용해 돈을 긁어모은 뒤, 새로운 무공과 영약을 사들여 수하들을 키워낸 것이고.
“헛소리! 무당에서 이 일을 알면 당장이라도……!”
“뭐, 그건 나중에 알게 되겠지. 너희는 확인할 수 없겠지만.”
상무문주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뭐라 항변을 해보지만, 천화는 지루한 말싸움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전멸. 자신의 목숨을 노린 이상, 그들에게 정해진 미래는 단 하나 뿐이었다. 푸욱!
“엥?”
그때, 피륙이 꿰뚫리는 소리가 났다.
“어, 어째서……?”
가뜩이나 내상을 입고 골골거리던 상무문주가 배를 꿰뚫린 채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보호할 것이라 믿었던 수하들 중 하나가 뒤에서 칼을 꽂은 것이다.
“저분의 말이 맞지 않습니까. 무당파가 보호해주지 않을 테니 우리도 살길을 찾아야지요.”
상무문주의 비밀을 알고 있던 심복이 제 살길을 찾기 위해 그를 배신한 것이다. 어차피 무당파는 이 일에 개입하지 않을 테고, 설사 개입한다 해도 죽고 난 뒤 복수를 하는 것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기에 그를 희생시켜 목숨을 구하려는 것이다.
“아주 콩가루 집안이구만. 소문주가 처맞았다고 덤빌 땐 언제고.”
그 모습을 지켜본 천화가 가볍게 혀를 찼다. 소문주 좀 쥐어팼다고 죽이겠다 덤벼들 때는 언제고, 상대가 더 강한 것 같으니까 문주의 등에 칼을 꽂다니? 정파든 사파든 무림인이라는 것들이 대개 이렇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천화로서도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 물러서.”
“윽?!”
그때 천화가 진득한 살기를 놈에게 집중시켰다. 겪어본 적 없는 농후한 살기에 놀랐는지 놈은 심장을 움켜쥐며 검에서 물러났고, 상무문주는 검에 꿰뚫린 채 바둥거리며 기었다.
이런 믿지 못할 놈들의 곁에 있느니 천화에게 빌어보려는 것이다.
“어디서 막타 스틸이야?”
푸욱! 그러나 그 또한 오해였다. 비뢰투술의 일초로 날아간 비도가 상무문주의 이마를 정확히 꿰뚫었다. 자신의 몫인 경험치 덩어리, 아니 상무문주의 숨을 다른 이가 끊으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저자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와 동시에 상무문의 무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물론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천화를 방심시킨 뒤 암습을 가하려는 것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흠, 그렇단 말이지?”
하지만 그 의도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천화는 애초부터 그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무신지로에서 구른 짬밥이 얼만데.’
후우우웅-!! 머리를 땅에 박을 듯 조아린 그들의 위로 천화의 검이 날아들었다. 섬공열파. 용호심삽검의 두 번째 초식이 그들을 휩쓸었다. 내공이 경지에 이르면 사방을 불로 뒤덮어버린다는 양강지공이다. 천화의 성취와 내공이 그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검기를 뿌려 사방을 폭쇄시키는 것은 가능했다.
“크……?!”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놈들이 쓰러졌다. 눈치 빠른 몇 놈은 간신히 몸을 날려 피하기는 했지만, 이미 천화와의 대결을 통해 자잘한 상처를 입은 놈들이다. 눈치껏 사방으로 갈라져 도망쳐보지만 그보다는 천화의 손이 더 빨랐다. [비뢰투술(1성)의 숙련도가 0.3만큼 상승했습니다.] 경지에 이르면 뇌전을 뿜어내듯 비도를 뿌린다는 비뢰투술은 절정급의 비도술답게, 성취가 낮은 상태에서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나 싸우기를 포기하고 등을 보이며 달아나는 상대를 꿰뚫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 정확히 요혈만을 노려 틀어박힌 비도들이 목표의 행동을 정지시켰고, 그 사이 천화는 놈들을 따라 붙어 숨을 끊어놓았다. 이렇게 일격에 끝내버리면 숙련도 작업이 어려워지긴 하지만, 놓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대충 끝난 건가?”
그렇게 장내를 정리한 천화는 멀어져가는 기척들을 느끼며 장원 내부를 바라보았다. 무인들은 전멸시켰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 식솔들은 살려둔 것이다. 그들이 천화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퍼트릴 수도 있지만, 개중에는 몰래 숨어서 상무문주가 배신을 당하는 모습까지 본 이도 있으니 썩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하오문에서 적당히 정보를 흘리기도 할 테고.’
게다가 소문이라면 하오문만 한 곳도 없다. 추가연을 도와 호감을 얻었으니, 그녀를 통해서라도 하오문을 움직여 소문을 조작할 수 있을 터였다. 무당파의 이름을 팔아 악행을 저지르던 놈들을 쳐부순 신진고수 정도가 되려나? 천화는 모두가 장원에서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뒤, 즉시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만큼이나 수고를 했으니 전리품은 챙겨야 할 것이 아닌가? 하다못해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경우, 하오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도 하니까. 때문에 천화는 닥치는 대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소지품창에 챙겨넣은 뒤 전각을 빠져나왔다.
“흑우야.”
“무우우우!”
“무너뜨려버려.”
쿠구구궁!!!! 흑우를 소환하여 전각을 지탱하는 대들보들을 모조리 박살내기 시작했다. 크지 않은 마을이기는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성세를 이루던 상무문이 그야말로 폐허가 되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천화의 이름이 강호에 처음으로 제대로 알려지는 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