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장문인이 기다리십니다 (3)2021.07.13.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무당의 반응은 천화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기부금을 낸다고 하지 말걸.’
만약 미리 알았다면 기부금을 낼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냥 은자 한 냥 정도만 낼까? 반냥은 너무 없어 보이겠지?’
천화가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설영은 길안내를 맡은 도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댔지만, 그 역시도 명을 받았을 뿐이라며 그다지 의미 있는 말을 해주지는 않았다.
‘무당이라.’
그러는 동안 천화는 기감을 넓혀 무당의 제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장문인의 처소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고 거의 모든 전각들을 지나쳐야만 했기에, 돌아다니는 도사들과 연무장에서 수련 중인 도사들의 무위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어쩌면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저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깔아놓은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다 한들 천화의 마음에는 찰 리가 없었지만, 덕분에 무당이 가진 현재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택도 없지.’
그리고 살짝 실망했다. 평화가 길었던 까닭일까? 약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몸을 웅크리고 있는 마교에 비한다면 반딧불이 같은 수준의 힘일 따름이었다. 물론 저것이 전부는 아니겠지. 무당신룡과 같이 군계일학의 실력을 지닌 이들도 곳곳에 숨어있을 테고, 그런 고수 한 명의 힘은 고수 수십 명의 것에 필적하니까. 절정 이상의 무인들은 그 자체로 전술 병기와 같은 취급을 받기도 하니,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구파일방의 일원이자 상위권에 등극한 문파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그렇게 걷고 또 걸어 도착한 곳은 화려하고 웅장한 멋을 지닌 전각이었다. 도사의 처소라기보다는 거부(巨富)의 그것 같은 모습이라 눈살이 조금 찌푸려졌지만,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으면 얕잡아보이는 것이 무림이었기에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돈을 다 꼬라박았구만?’
아마 그들이 가진 차용증에 적힌 금자 50만 냥도 이런 식으로 쓰였을 터였다. 도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선풍도골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백발백염의 도인이 느긋하게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모습에 많이들 속았지.
“장문인.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수고했다. 이만 나가보거라.”
‘독대?’
무공에 대한 자신감일까? 무당의 장문인이라는 자는 홀로 천화와 설영을 맞이했다. 기감을 넓혀 봐도 주변에 은신하고 있는 이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내공을 잘 갈무리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정말 혼자인 것 같았다.
‘혈마검이 있었으면 제대로 알 수 있었을 텐데.’
잠시 몸을 돌려 혈마검을 꺼내 확인해볼까도 싶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혈마검을 꺼내는 순간 장문인이 알아차릴 수도 있기에, 천화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흑우에서 내려왔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장문인을 뵈어요.”
애초에 여기까지 흑우를 타고 온 것도 예의를 차렸다고 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장문인과의 독대 자리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기에 정중히 포권을 취하자, 설영도 따라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본인은 부족하지만 이 도관을 맡고 있는 현양이라고 합니다.”
무당을 한낱 도관이라 칭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있지만, 그의 말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저 아이가 기다리고 있어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기부를 하러 오셨다고요?”
“예? 아, 네. 뭐……. 큰돈을 기부하려는 건 아닌데…….”
이어 튀어나온 말에 천화가 긴장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기부금을 많이 내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 장문인까지 봤는데 꼴랑 은자만 내고 갈 거야, 뭐 이런 건 아니지? 그치? 무당파의 장문인인 현양 도장이야 무신지로에서 종종 보았기에 특별할 건 없지만, 상황상 푼돈을 내기 어려워진 터라 잔뜩 예민해진 것이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허나 이 늙은이의 바람으로는 기부보다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그때, 현양이 슬쩍 원하는 바를 풀어놓았다. 기부금을 필요없다. 대신 정보를 달라. 간단히 풀이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귀주에 나가있던 아이에게서 여러분에 대해 들었습니다.”
‘역시.’
무당신룡이 보낸 전서구를 받은 모양이었다. 전사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해에서 영물로 보이는 검은 소를 타고 그들이 나온 것과, 그 검은 소가 절정 고수 이상의 신법을 펼쳐 엄청난 속도로 달아났다는 것, 그리고 마교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까지 말이다.
“무당신룡 말씀이시군요.”
“허울 좋은 이름일 뿐입니다. 그저 조금 더 노력한 후기지수일 뿐이지요. 아이들이 용화지회니 뭐니 하며 이름을 붙이는 모양이지만, 당장 두 분만 보더라도 그 아이들에 비해 모자람이 없으니 제 낯이 다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흐음, 이 양반 왜 이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무당신룡은 무당의 자랑이다. 미래이기도 하고. 약관을 조금 넘은 나이로 벌써 절정의 경지에 발을 내디뎠으니, 일대제자들을 제치고 이대제자인 그가 다음 대의 장문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돌 정도였다. 그것을 현양 도장도 굳이 감추지 않고, 다른 문파들과의 회합 때마다 은근히 자랑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런 반응을 보인다? 천화로서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들을 띄워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그 아……. 흠흠, 그 친구는 확실히 대단한 무위를 지니고 있더군요. 같은 용으로 불리는 이들과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듯했습니다.”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그래도 제 새끼 칭찬하는 것이 기분 좋기는 한 모양인지 애써 표정관리를 하지만,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용화지회니 뭐니 하지만 무당신룡과 설산빙화 두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일류 수준에 불과했고, 그 정도의 무위를 지닌 후기 지수는 생각보다 제법 많았으니까. 물론 그들이 익힌 만큼의 상승 무공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먹어온 영약의 수가 다르니 같은 급에서도 격차는 날 것이다. 무공의 등급과 내공의 수위가 무력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니, 작정하고 붙으면 그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이들도 분명 있을 터였다. 때문에 무당신룡과 설산빙화를 보유한 무당파와 설산파에서는 약간의 불만을 가진 상태라는 것을 천화는 알고 있었다.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지요. 흠흠. 그래서 말인데, 두 분께서는 혹시 남만에서 오셨습니까?”
“……?”
그러다 문득 현양 도장이 훅 들어왔다. 괜히 말이 두루뭉술해지지 않도록, 단도직입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본 것이다.
‘그런 거로군.’
그제야 천화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화와 설영을 남만에서 온 인물로 여기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흑우만 보더라도 평범한 영물은 아니니까. 그만한 영물을 보유한 곳이라면 생각나는 곳이 단 한 곳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옆에 있는 그 영물과 소저의 품에 안긴……. 흠흠, 그 아이는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 영물이 나올 곳은 단 한 곳뿐이지요.”
“무우?”
“쀼?”
“남만야수궁. 그곳에서 나오신 겝니까?”
순간 현양 도장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들을 남만야수궁에서 나온 사절쯤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토록 둘을 띄워주던 것이겠지. 남만야수궁은 중원의 기둥이라는 구파일방 오대세가와 버금가는 크고 강력한 집단이니까. 괜히 세외사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었고, 구파일방이 그들을 우대하고 대우하는 것이 아니었다.
“야수궁의 소속이냐고 물으신 거라면, 아닙니다. 저희는 중원인이거든요. 다만 세주 형과는 호형호제를 하고 있지요.”
“세주 형?”
마! 세주안 햄 아나! 모르나! 천화는 일부러 더 세주안과의 친분을 강조하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 야수궁주라고 해야 아시겠구나. 그분과 호형호제하고 있습니다.”
“오오, 역시 대단한 분들이셨구려.”
그 말에 현양 도장이 홀랑 넘어왔다. 호북과 남만은 제법 거리가 있긴 하지만, 세외사궁은 누구라도 친분을 맺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과의 연결고리가 될 만한 인물과 친해지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현양 도장은 천화의 말에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고, 천화는 그 반응을 이용했다. 약강강약. 무당파의 장문인과 어울리지 않지만 동시에 그에게 찰떡처럼 잘 어울리는 말이 그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슬쩍 세주안이 주었던 물건들을 보여가며 친분을 입증했기에, 현양으로서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그 아이가 오해를 한 모양이군요. 야수궁이라면 고작 소수 민족의 유산 따위를 탐낼 리가 없지요. 그 복면인들은 오히려 두 분을 통해 야수궁에서 무언가를 얻어내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천화가 딱히 뭐라 변명을 한 것이 아님에도, 현양 도장은 스스로 상황을 정리하고 재단하며 결론을 내렸다. 슬쩍 간을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천화와 반목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이라고 보는 편이 옳으리라.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지금도 그들이 누구인지 찾고 있으니 두 분을 공격한 이들이 곧 밝혀내고 말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오해가 있었군요. 그자들이 누구인지는 저 역시도 참으로 궁금합니다.”
선후관계가 뭔가 조금 어긋나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나오는데 굳이 나서서 초를 칠 이유는 없다. 천화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호의를 받아들였고, 현양도 음흉한 미소로 함께 웃었다.
“사해가 동도이니 억울한 일이 없도록 서로 도와야지요. 허허허.”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으흐흐흐흐흐.”
그러다 은근슬쩍, 천화의 옆구리를 찔러왔다.
“크흠. 그러고 보니 마침 저희의 속가 문파 중 하나가 귀주성 끝자락에 새로 문을 연다고 하던데…….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남만의 영웅들을 자주 뵙게 될 것 같더군요. 앞으로 더욱 교류하며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 그거 반가운 이야기네요. 그렇지 않아도 귀주성에 큰 상단이나 문파가 없어서 형님께서도 섭섭해하시던데.”
“그렇습니까?”
“예. 아마 제 이름을 대면 한번 만나는 주실 겁니다.”
“오오오오!!”
결국 속가를 통한 남만과의 교역이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미 다른 곳에서 차와 영초의 전매권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약속된 기한도 슬슬 끝나간다. 게다가 애초에 그 권한이라는 것도 야수궁주의 뜻에 따라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지 않은가? 야수궁이라는 집단이 가진 힘이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과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 또한 막대했다. 그렇기에 현양 도장은 천화를 이용해 그들과 연을 맺어보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천화 역시 무당과 어느 정도의 친분을 맺어둔다면 신분을 보증 받기 편할 테니 굳이 거리를 둘 필요는 없었고, 자신의 이름을 팔아 세주안과 면담이 성사된다 해도 이후의 일은 전적으로 세주안이 결정할 일이었다. 소원권을 이용한 부탁을 한다면 당연히 전매권을 내어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야수궁과 남만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겠지. 그래도 세주안과 면담이 가능하다는 것만 해도 작은 일은 아니었으니, 신원 보증의 대가로는 충분할 터였다.
“흐흐흐흐.”
“허허허허.”
그렇게 천화와 현양 도장은 웃는 낯으로 서로의 복심을 가린 채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혈마의 후예가 나타났다고 하던데요.”
“……!”
그러던 도중, 가만히 옆에서 듣기만 하며 이따금씩 웃어보이던 설영이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확실히, 그런 소문이 있었지요.”
“잠깐 이야기가 도는 듯싶더니 잠잠해졌더군요. 혹시 아시는 바가 없습니까?”
“아는 이야기라……. 글쎄요. 아직도 추적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이렇다 할 성과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한 것 같군요. 어찌 그 간악한 자에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순간 설영의 얼굴이 꿈틀거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현양이 일부러 자극한 것이 눈에 보였으니까.
“혈마. 그 사악한 종자는 뿌리를 들어내고 씨를 말려야 할 악의 축입니다. 괜히 두 분을 비롯한 무림의 동도들이 그자와 접촉을 했다가 영향을 받을까 두렵군요. 저희 무당에서도 은밀히 그의 행적을 쫓고 있으니 맡겨주시지요. 반드시 찾아내서 효수하여 강호에 본보기를 보이고, 혈마검은 고철로 만들고 말겠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현양은 좀 더 자극적인 어조로 도발을 이어갔다. 일반의 무인들이라면 무당의 의지를 높이 사고 그에 동조하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혈마와 연관이 있는 이들이라면 떨떠름한 모습을 보일 테니까. 일촉즉발의 순간. 심지어 혈마검마저 화가 났는지 소지품창 안에서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설영 역시 혈마의 후예로서 살아온 세월이 있는 까닭인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쳤다.
“무당이 이리 적극적으로 나오니 놈이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겠군요. 사실 저 역시 혈마로 인해 희생당한 이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초대 혈마가 도가 계열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바가 있어, 무당이라면 뭔가 그를 제압할 방법을 알고 계실까 하여 여쭤본 겁니다. 하다못해 그 힘을 봉인한다든지요. 청하오건대 만약 그 방법을 알고 계시다면 저에게도 알려주십시오. 혈마와 조우하게 된다면 미력한 힘이나마 돕고 싶습니다.”
“허허허. 소저와 같은 이들이 많다면 혈마 따위가 어찌 강호를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의기 높은 이들이 많으니 강호의 홍복입니다. 그리고 혈마가 도인이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실전되다시피 한 이야기인데도 아직 기억하시는 분이 있었군요.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소저의 말처럼 타락한 도인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때문에 저희 무당에서 혈마검과 혈마의 목을 누구보다 먼저 취하려 했던 것이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 무당에는 혈마검을 제어하고 그 힘을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나, 도력을 갖춘 도인이 아니고서는 따라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소저께서 혹 의심되는 이나 혈마검을 발견하신다면 저희에게 연통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거짓이다. 천화가 당장 혈마검을 들고 무당산의 초입까지 왔던 것이나, 혈마검은 아니지만 혈마신공을 익힌 설영이 눈앞에 있음만 보더라도 거짓이라는 게 단 번에 드러났다. 게다가 천화는 무신지로에서 혈마검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 무당파가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도 이런 논리를 펴며 자신들이 제마 의식을 치러 봉인하겠다고 나섰지만, 오히려 도인들 중 하나가 혈마검에 사로잡히고 말았지. 우스운 것은, 혈마검에 사로잡힌 도인이 도술이나 제마 의식을 담당하는 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순수한 무인에 가까운 자였다. 혈마검을 빼돌려 혈마신공을 익히고, 사이함을 죽인 채 써먹으려다가 되레 당한 것이다. 도문에서 시작을 했으나 점차 무파로 치우쳐 발전한 만큼, 연단이나 진법 따위에 능통한 이는 있을지 몰라도 더 이상 무당파에는 혈마검을 제어할 만한 도인도, 도술도 이미 남아있지 않은 까닭이었다.
“예. 그러지요.”
묘한 신경전 속에 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폭발하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 무색할 만큼 담담하게 그 도발들을 받아 넘겼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시답지 않은 담소들. 그 속에서 설영은 금자 50만 냥에 대한 차용증을 꺼내지도, 그들에게 뭔가를 부탁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남만야수궁과 친분이 있는 신진 고수 정도로서의 역할만을 다하다가 천화와 함께 무당산을 내려왔다. 현양 도장이 하루 더 묵어가기를 청했지만 정중히 거절을 하고서 해검지의 검을 찾아 무당산에서 멀어졌다. 한시도 이곳에 머물기 싫다는 듯이. 그 싸늘한 표정에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던 천화가 입을 연 것은,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하게 된 그날 밤이 되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