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어서와. 고인물은 처음이지? (3)2021.07.29.
패광은혈. 패광도법과 비형칠검에 대해 아는 이들은 농담 삼아 은 나와라 뚝딱이라고 부르던 초식이다. 이 또한 도깨비의 참격을 본떠 만든 것이었기에 묵직하고 패력적인 면모가 강조되는 도법이었다. 비형칠검에서 파생된 것이라고는 하나, 사실 검보다는 그가 사용하는 도(刀)에 더 잘 어울리는 수법이기도 했다.
‘그보다는 곤과 같은 둔기류와 가장 잘 어울리고.’
도깨비 왕 비형의 움직임을 따라한 것이다 보니, 도깨비들의 주무기인 도깨비 방망이에 어울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둔기류로 따라하기에는 너무도 현란하고 쾌속한 환검이다 보니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검을 택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반짝 게다가 이번에도 역시 반사광을 이용했다. 해가 뜨지 않은 날에는 도법 자체가 약화될 수 있는 꼼수에 불과했지만, 찰나에 승부가 갈리는 것이 무림인들의 싸움이니 모르는 상대에게는 제법 잘 먹히는 것이었겠지. 반사광의 각도만 잘 조절할 수 있다면 의외로 피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호아파참.”
그러나 이미 해의 위치에 대한 파악을 끝내둔 천화였다. 반사광이 향할 수 없는 방향과 각도로 움직이며 역으로 패광문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억지로 도신을 비튼다면 노려볼 수도 있겠지만, 무리를 했다가는 날이 아닌 면으로 천화와 부딪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놈은 힘을 더 강하게 싣는 쪽을 택했다. 잘만 하면 내력 대결로 이어갈 수도 있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천화에게 급격히 불리해질 터였기에, 눈을 반짝거렸다.
“큭!?”
콰앙! 허나 막상 도와 검이 부딪혔을 때, 묘한 신음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은 패광문주의 쪽이었다. 천화의 검과 부딪히는 순간 슬그머니 흘러들어온 기묘한 기운이 내공의 운용을 방해한 것이다. 혈마기. 마교의 마공보다도 더욱 집요하게 상대를 괴롭히는 그 기운이 혈마검에서 뿜어져 놈의 몸을 침범한 것이다.
“이상한 수작을……. 쳐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느꼈지만, 그렇다고 천화의 일격이 약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니, 혈마기가 아니라도 호아파참은 고작 2성밖에 되지 않는 성취임에도 놈의 도법에 필적할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패력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던 그였지만, 손목이 저릿함을 느끼며 정면 승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첫 격돌이 우연이 아님을, 일대일로는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고수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무리를 하기보다 충분히 힘을 빼둔 뒤 막타만 치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처음부터 대가리를 꺾어버리면 전의를 상실할 수 있으니까.’
녀석이 물러나며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천화는 감출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의 격돌에서 사실 끝장을 볼 수도 있었다. 패도적이기만 한 일격이었기에, 피하고 칼침을 박아넣거나 이화접목 또는 사량발천근의 수법으로 무력화한 후 한 방을 날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 굳이 검을 맞대고 평수처럼 보이면서 다른 선택을 유도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럼 이제 제대로 놀아볼까?”
사방에서 짓쳐드는 패광문의 무인들을 상대로 숙련도 작업을 신명나게 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칠성무적권(2성)의 숙련도가 0.3만큼 상승했습니다.] [용호십삼검(2성)의 숙련도가 0.3만큼 상승했습니다.] [은잠무영보(1성)의 숙련도가 0.2만큼 상승했습니다.] 상무문의 때와 같다. 천화는 적들의 사이를 귀신처럼 누비면서 때로는 검을, 때로는 권을 내질러 하나씩 무력화시켜갔다. 아니, 그렇게 편하게 보내주지도 않았다.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만 딱 적당하게 충격을 주어 쓰러뜨렸고, 놈들은 패광문주의 눈치를 보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천화의 수련 도구가 되었다.
“흐흐흐. 좋구나!”
누군가 보면 광인이라 칭할지도 몰랐다. 이류 이상의 무인으로만 따져도 일백, 어쩌면 이백 이상 되는 숫자에 둘러싸인 중에도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0.1에서 0.3까지 숙련도가 상승했다. 본래는 수십 번에서 수백 번까지 같은 동작을 연마해야 겨우 숙련도가 상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전을 치를 때 더해지는 상승효과와 천화의 높은 오성, 무공에 대한 이해도 덕분에 거의 동작을 취할 때마다 숙련도가 오르고 있는 것이다. [칠성무적권(2성)이 칠성무적권(3성)으로 성장했습니다.] [용호십삼검(2성)이 용호십삼검(3성)으로 성장했습니다.] [은잠무영보(1성)가 은잠무영보(2성)으로 성장했습니다.] 덕분에 성취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무공 효과가 더해지며 초식에는 더 큰 힘이 실렸고 천화는 더 빠르게, 더 강하게 적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콰당탕-
“미안합니다. 이따가 보상할게요!”
구경꾼들은 멀찍이 떨어졌지만, 대로변에서 싸운 탓에 기존에 세워진 구조물이나 노점들이 튕겨나간 패광문의 무인들과 부딪혀 박살이 났다. 애꿎은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은 것이기에 천화도 미안해져 차후에 보상할 것을 약속했다. 이들을 모조리 털어버리고 패광문의 재물을 가져다주면 충분하겠지. 곧 죽어도 제 돈을 쓰고 싶지는 않은 천화였다.
“어떻게 저런……!”
그렇게 천화의 몸놀림과 파괴력은 점점 강해졌다. 실전을 치르며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은 천화를 보며 패광문주가 혀를 내둘렀다. 그런 이들이 있다. 무공은 뛰어나고 재능도 뛰어나지만 실전 경험이 일천하여 제 힘을 다 내지 못하는 이들. 그런 이들에게 적당한 기회가 주어졌을 경우, 단 한 번의 전투만으로도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내곤 했다. 물론 상황은 조금 다르긴 했지만, 패광문주는 자신이 그런 현상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혹여 잘못 벌집을 쑤신 것은 아닐까? 저만한 천재를 키워낸 곳이라면 보통의 문파가 아닐 것 같은데, 자칫 문파간의 대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들었지만 이미 기호지세다.
“죽여! 반드시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여기서 물러선다 해도 좋은 꼴은 보지 못할 테니, 차라리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백번 나을 터였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부담되었지만 이 마을 사람이라면 감히 자신에게 대놓고 문제를 삼지는 못할 테고, 만약 천화를 이 자리에서 죽이지 못한다면 잠을 자면서도 뒤통수가 따끔거릴 것 같았다.
“놈의 내공도 슬슬 다해갈 것이다! 전력을 다해 놈을 몰아붙여라!!”
수하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어떻게든 천화를 죽여 없앨 각오를 다졌다.
‘영 바보는 아니네.’
확실히 그의 말처럼 천화의 내공은 빠르게 소진되는 중이었다. 성취가 오르며 초식이 더 빠르고 강력해지기는 했으나 그만큼 내공의 소모도 커진 것이다. 더구나 내공을 회복할 시간도 없이 몰아붙이고 때로는 차륜전으로 힘을 빼려 드니, 장기전으로 간다면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파앗 만약 천화가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들에게는 표시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을 쓰러뜨릴 때마다, 또 무공의 성취가 오를 때마다 천화는 막대한 경험치를 몰아받는 중이었다. 100레벨을 넘겼다지만 최단 시간 성장을 했을 뿐, 일류 고수라는 이름에 걸맞으려면 최소 200레벨쯤은 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류급의 무인들도 아직까지 충분한 경험치를 주고 있었다. 몇 명을 쓰러뜨리면 천화에게만 보이는 빛이 몸에서 번쩍거렸고, 그때마다 소모된 생명력과 내공이 가득 차올랐다. 내공의 무한 회복. 무한 동력을 가진 것처럼 내공을 퍼내며 적들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남은 경험치를 보면…… 이놈만 잡아도 레벨 업을 하겠군.’
들어오는 경험치와 남은 경험치를 순간적으로 계산하여 레벨 업 타이밍을 잡는 것은 고인물들에게 숨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어려움도 없었다.
“조룡연아참!”
상대의 옆구리를 할퀴듯 베어내고 어깨로 밀쳐 동료들에게 날려버렸다. 그러면서도 눈과 기감을 통해 적의 위치와 숫자를 계속해서 파악해냈다. 내친 김에 용호십삼검 초반부의 초식들을 돌아가며 펼쳐대니 숙련도 상승 속도를 더 빨라지는 것 같았고, 이대로면 레벨도 10개 이상은 더 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천화!!”
콰앙!! 그때, 적의 후방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익숙한 목소리. 운휘와 어머니를 하오문의 모처로 숨겨놓은 설영이 천화를 돕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그랬어야 할 텐데…….
“어……. 쟤가 저기서 왜 나와?”
그런데 저 앞에 보이는 꼬마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천화는 잠시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고 눈을 껌벅거렸다.
“쟤는 또 왜 데려왔어?”
설영과 함께 선 꼬마는 다름 아닌 운휘였다. 아무리 재능이 출중하다지만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운휘가 이 난전에서 안전하게 싸우기는 무리일 텐데, 설영은 무슨 생각으로 그를 데려온 것일까? 설영이 작정하고 운휘를 보호한다 해도 쉽지 않을 텐데.
“어쩔 수 없군.”
천화는 입술을 깨물며 좀 더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숙련도 작업을 위해 최대한 여유를 두고 상대하던 것에서, 전력으로 상대를 격살하고 쓰러뜨리기 위한 태세로 전환한 것이다.
‘제법인데?’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운휘와 설영의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는 놀랍게도 운휘가 독심을 품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먹는다고 뜻대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고수라는 것이 괜히 있겠나. 당연히 고전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정작 운휘의 모습을 뜻밖이었다.
‘재능충은 이래서…….’
상대하는 것은 후방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삼류 무인들이기는 했다. 허나 운휘는 그야말로 압도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패광문의 기본 도법을 익힌 이들이건만, 제대로 된 내공 수련조차 하지 못한 운휘가 오히려 그들의 패도적인 도법을 유린하듯 피해내고 때로는 튕겨내며 베어내고 있는 것이다. 천화가 가르쳐준 진짜 비형칠검을 펼쳐내면서. 재능. 그것도 압도적인 재능이었다.
‘오래 두면 안되겠군.’
나아가 이류급의 무인이 끼어들었음에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며 천화는 살짝 마음이 조급해졌다. 충검의 묘리를 실어 도를 떨어뜨리는 상대의 일격마저 수월히 막아내는 것을 보며, 녀석이 쓰고 있는 힘의 실체를 파악한 것이다. 선천진기. 일종의 생명력이자 영혼의 힘이라 여겨지는 그것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설영도 아마 그것을 확인하고 떼를 쓰는 운휘의 청을 들어준 것이겠지. 날 때부터 상단전이 열리고, 선천의 힘을 쌓아온 만큼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천진기는 잘못 끌어 쓰면 폐인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힘이었다. 저렇게 날뛰다가는 금방 힘이 다해 축 늘어지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힘이 빠져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혹은 폭주하여 한 번 날뛰는 대가로 영영 미래를 잃어버릴 수도 있고.
“흑우, 운휘를 데려가!”
“무우!!”
쿠당탕탕!!! 결국 천화는 흑우에게 명을 내렸다. 그와 함께 돌진한 흑우가 빗발치는 공격들을 몸으로 받아내며 놈들을 날려버렸다. 그러나 어설픈 칼질 따위로는 흑우에게 생채기조차 낼 수 없었다.
“앗! 이거 놔!”
순식간에 운휘의 곁까지 달려가더니, 입으로 녀석의 옷을 물고 장원 밖으로 빠져나가버렸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근처에서 보호하고 있던 설영조차 말리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을 정도였다.
“실전 경험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슬슬 숙련도도 더디게 오르는 것 같은데 그냥 끝내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버둥거리며 사라진 운휘를 확인한 천화가 스산하게 눈을 빛냈다. 이제 마무리를 지을 차례. 이들을 이용해 어느 정도는 더 숙련도를 쌓을 수도 있겠지만 칠성무적권과 용호십삼검은 벌써 4성에, 은잠무영보는 3성에 이르렀기에 이만하면 작업도 충분히 끝났다 할 수 있으니까. 갈 길이 바빴기에 슬슬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설영! 막타만 남겨줘!”
“응!”
천화와 설영. 단둘뿐이었지만 아직 일백 명 가량 남은 무인들을 앞뒤로 포위한 것과 같은 형국이 되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힘도 가지고 있었고.
“더 놀아주고 싶은데, 이쪽도 시간이 부족해서 말이야.”
천화의 눈빛의 포식자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무공 수위로만 따지자면 고작 해야 일류 무인 한 명일 뿐이다. 그와 같은 수준의 고수만 따져도 이곳에 열은 족히 있었고, 일류의 끝자락쯤에 걸쳐있는 패광문주 또한 죽일 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천화는 자신이 있었다. 이 정도의 경험치 수급이라면 내공을 마구 쏟아부어도 충분 할 것 같았으니까.
“후우.”
찰칵 혈마검이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다. 전투 중에 납검을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주변 무인들이 멈칫거렸지만, 천화는 개의치 않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끼기기긱-! 화르륵!! 혈마검이 검집을 긁으며 쾌속하게 발검되었다. 그 순간 후끈한 열기가 주변을 뒤덮었다.
“열공참.”
용호십삼검의 중반부 초식 중 하나가 천화의 손에서 펼쳐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