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무공은 됐고요, 꿀이나 빨렵니다 (2)2021.08.26.
“자네에게 무공을 전수해주겠네.”
손무양이 설영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직접 나설 수는 없으니, 그녀에게 자신의 무공인 진천십팔도를 전수한다. 천화의 예상대로라면 고작 이틀 남짓의 짧은 시간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녀의 오성을 믿고 무공을 전수하여 위험에 최대한 대비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예? 무공을요?”
그 말에 설영이 화들짝 놀란 것은 당연했다. 그 누구도 아닌 도왕이 아닌가? 아무리 도와 검의 쓰임이 다르다 하나,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배움을 얻는다면 크게 성장할 것이 분명했다. 당장 그 짧은 대련으로 절정의 벽을 허물기도 했으니까.
“따라오게.”
대뜸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다시 마당이자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슥 천화를 바라보는 것이, 천화가 자신도 배우게 해달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을지 자못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이미 익힌 무공들 숙련도 작업하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새로운 무공은 무슨.’
그러나 천화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당장 그가 익힌 용호십삼검은 도왕의 진천십팔도에 비하면 손색이 있는 무공이었지만, 그 또한 어디까지나 거쳐 가는 단계일 뿐이니까. 장차 무공을 높이고, 무신지로에서 사용하던 독문무공인 무상천검을 익히기만 한다면, 진천십팔도가 아니라 세상 그 무엇이라도 두려울 것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무슨 무공을 설영에게 전수할지 궁금하기도 했기에,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따랐다. 근처에서 악마금이나 튕기며 숙련도 작업이나 할 작정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도왕은 천화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지만, 어쨌든 연무장에 나서는 것은 설영 혼자였다.
“지금부터 자네에게 가르칠 것은 진천십팔도라네. 나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들어준 무공이지.”
그리고 놀랍게도, 도왕이 설영에게 전수하는 것은 그의 독문무공인 진천십팔도였다. 도식을 검식으로 바꾸어 가르치기는 하겠지만, 패도적인 성향을 지닌 혈마검법과도 잘 어울리기에 그 형과 내공의 운용 방식을 배우는 것은 설영에게 커다란 기연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천화도 그 점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진천십팔도는 설영이 벽에 막히면 넌지시 찔러주려고 생각하던 무공 비급의 하나였다. 원류검법이 직선적이고 패도적인 혈마검법에 유연함을 더해주는 것이라면, 진천십팔도는 이름 그대로 하늘을 떨게 만드는 강맹하고 패도적인 힘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무공이니까.
“일단 잘 보게.”
도왕은 호흡을 고르며 기수식을 취했다. 느린 동작으로 한 동작 한 동작을 천천히 펼쳐보이며 형을 익힐 수 있도록 배려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내공이 담긴 것도 아니건만 그 식에 담긴 거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무공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혼을 빼앗기고 바라볼 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천화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금을 연주할 따름이었다. 디리리링- 투웅 퉁 퉁- 천화의 입장에서 진천십팔도는 알고 있는 무공이었다. 어떤 호흡으로 펼치는지, 어느 부분에서 나아가고 물러서는지가 머릿속에 훤하게 그려졌기에 그에 맞춰 연주를 시작했고, 도왕의 시연은 마치 춤 한 사위와 같아보였다.
“아……!”
그리고 그것은 설영이 진천십팔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연주를 통해 진천십팔도의 흐름을 들여다 볼 수 있었으니까. 그것은 시연을 마치고 호흡을 가다듬는 도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네, 혹 나와 만난 적이 있던가?”
“그럴 리가요.”
당연히 그럴 리는 없었다. 도왕의 활동 시기는 가장 최근으로 잡더라도 벌써 몇 해 전이니까. 만약 그때 만났더라도 천화의 나이를 생각할 때, 진천십팔도를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녔을 리가 없는 것이다. 천하에 다시없을 기재라 할지라도 결단코 그것은 무리였다.
“그런가? 대단하군. 무공의 흐름을 읽어낼 줄 안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축복이지.”
그게 아니라면 천화가 한눈에 진천십팔도의 흐름을 읽어냈다는 뜻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능히 천재라 부를 수 있는 영역이었기에, 도왕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천화에게 뭔가가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역시 보통의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탐이 났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시죠.”
도왕이 노골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부담스러워진 천화는 손을 휘휘 저었다. 다시 연주에 집중하며 악마칠음의 숙련도 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의 변화 하나하나가 천화에게는 경험치 덩어리와 같았으니까. [악마칠음(4성)이 악마칠음(5성)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천화는 연주를 했고, 도왕은 무공을 전수했다. 다만 특이한 것은, 모든 무공의 전수가 육성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거참, 이미 알고 있다니깐.’
일반적으로 문파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무공 전수는 전음으로 이루어지거나 비급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마치 천화가 들으라는 듯, 도왕은 모든 구결과 초식 운용, 내공 운용에 대한 내용을 육성으로 전달했다. 고작 은자 몇 냥을 주고 배운 무공조차 남이 훔쳐보거나 들을까 노심초사하고, 혹여나 훔쳐배우는 것을 발견하면 멍석말이 등으로 죽도로 두들겨 패서 응징하는 것을 생각할 때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도왕의 독문무공인 진천십팔도는 문파가 아닌 개인에게만 전수되는 것이었으니까. 후계자조차 두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도왕이 천화와 설영에게 동시에 무공을 전수한다는 것은 보고도 믿기 힘들 만큼 특이한 일인 것이다. 허나 도왕은 개의치 않았다. 제대로 된 진천십팔도가 아닌, 검식으로 변형된 형태라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도왕은 그들을 후계자로 삼을 작정을 한 듯 세세하게 자세와 내력 운용 등을 짚어주며 설영의 발전을 성심성의껏 도왔다. 무공 전수는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도왕이라는 조력자를 얻었으니 약간의 투자는 당연한 것이 아니겠나? 천화는 소지금 중 일부를 풀어 인근의 객잔에서 요리들을 넉넉히 배달시켰고, 도왕이 아내를 편한 곳에 숨길 수 있도록 얼마간의 자금도 융통해주었다. 물론 도왕의 이름을 대면 당장 전장에서 밀릴 수 있는 돈이 어마어마하겠지만, 빚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그동안에도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생활해오던 그였으니까. 그렇게 푸짐하게 식사를 마치고 힘을 낸 도왕은, 얼추 형을 익혀낸 설영과 지도 대련을 하며 더 자세히 무공을 들여다보았고 설영이 미진했던 부분들을 고쳐주며 무력을 끌어올렸다. 불과 하루 남짓의 지도일 뿐이었지만 설영은 이제 어디 내놔도 부족함이 없는 한 사람의 절정 고수라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전한 곳을 찾는 대로 나도 서둘러 돌아오도록 하지. 부디 보중하게.”
“예. 걱정 마세요.”
그렇게 도왕과 천화가 헤어진 것은 그날 밤이었다. 사건이 예고된 전날 밤이기도 했다.
“빨리 움직이시려면 흑우를 잠시 빌려드리는 건 어때?”
“안 돼. 빠르기는 한데, 그 녀석은 거칠게 움직이잖아. 일반인도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환자가 있으면 절대 무리지.”
아내에게 문제가 생길까, 빠르게 무한을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자신을 가르치느라 시간을 지체한 도왕을 보고 설영이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지만 곧 제재당했다. 흑우는 일반인이 타기에는 너무 빠르고 거칠었으니까.
“괜찮네. 내 아내를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나. 나름대로 신법에 자신이 있는 편이니, 그건 알아서 하도록 하지.”
몸 상태가 정상이라도 문제가 있을 텐데, 지금처럼 쇠약해진 상태에서는 도왕이 잡아준다 하더라도 자칫 몸에 무리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천화가 막은 것이다. 도왕 역시 거절했다. 자신의 아내는 자신이 책임질 테니 걱정 말라는 것이다. 천화가 오늘과 내일, 무엇을 할지를 그에게 이미 공유했기에 두 사람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도왕은 그대로 아내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들더니 다시 한 번 둘에게 감사를 표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도왕의 모습. 신법에도 일가견이 있던 것인지 아내를 편안히 안아들고도 결코 흑우에게 뒤지는 속도가 아닌 것이다. 그의 말처럼 시간에 맞춰 적당한 장소를 찾아 아내를 숨기고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 속도라면 일단 무한을 제때에 벗어나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을 듯싶었다.
“자, 그럼 우리도 일을 시작해 볼까?”
“응.”
그렇게 도왕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던 천화와 설영이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내일 무슨 일이 터지고 말 테니까. 그리고 오늘 밤, 마교도들로 보이는 인물들이 다시 회합을 가질 터였다. 단악검은 요양을 지시받았기에 단악검의 모습을 하고서 다시 정보를 캐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잘만 숨어든다면 그들의 계획을 좀 더 자세하게 알아낼 수도 있겠지. 때문에 천화와 설영은 각자 구역을 나누어 수색해보기로 결정했다. 지금의 설영이라면 설사 그들에게 발각되더라도 쉽게 당할 리가 없고, 천화 역시 나름대로의 대비와 자신이 있는 것이다. 고작 하룻밤 사이 모든 곳을 뒤질 수는 없겠지만, 가장 의심이 가는 몇 곳을 정해 돌기 시작했다.
“없어?”
“응. 이쪽에서는 딱히. 그쪽은?”
그리고 허탕을 쳤다. 날이 새도록 돌아다녀보았지만 수상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무려 마교의 행사이니 은밀할 것은 분명했지만, 이래서야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사건을 벌이려는 장소가 어디인지도 불분명했으니까. 결국 어쩔 수 없이 천화와 설영은 짧은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날리고, 사건이 벌어질 만한 장소를 찾아 대기하기로 했다.
“영감님, 다 됐습니까?”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대장간에 맡겼던 물품들이다. 운철을 이용해 만든 그것들이라면 필시 마공을 익힌 마교인들과 싸울 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
“안 계시나?”
허나 대장간 안에 들어선 천화가 소리 높여 불러보아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건 아마도…….”
벽에 걸린 무구들이 그대로인 걸로 보아, 운철을 가지고 야반도주를 하거나 뭔가 화를 당한 것도 아닌 듯싶었다. 딱히 침입의 흔적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천화는 성큼성큼 걸어가 안쪽에 위치한 작업장 문을 열어젖혔다.
“드르렁~. 푸후!”
그러자 벽에 기댄 채 앉아서 잠들어버린 영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밤을 새워 작업을 마치고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영감님. 영감님!”
그러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일은 잘 마친 듯싶었기에, 천화는 그를 흔들어 깨웠다. 평소라면 곤히 자도록 내버려두고 나중에 찾으러 왔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으음? 자네 왔나?”
실눈을 뜨며 상대를 확인한 영감은 쩝하고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고작 이틀 사이에 많이 쇠약해진 모습이었지만, 장인 특유의 자부심 넘치는 모습으로 간단히 주변을 정리했다.
“물건은 다 만드신 겁니까?”
“물론이지. 일단 자네가 요구한 것들은 다 만들어두었네.”
천화의 물음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영감은 한쪽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왔다. 천화가 요구한 물건은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여기 있네. 확인해 보게.”
“오?”
[운철 비갑][유일] [운철 각반][유일] [운철 족형판][유일] 먼저 받아든 것은 양팔과 다리에 낄 수 있는 일종의 방어구들이었다. 비갑과 각반은 각각 손목과 정강이에 착용하는 보호구다. 기본적으로는 방어구라고 볼 수 있지만, 권법과 각법을 사용할 때 종종 부딪히는 위치들인 만큼 내공을 불어넣어 검기나 검강 따위와 부딪히는 공격용으로도 쓸 수 있었다. 족형판은 깔창처럼 신발 안쪽에 넣거나 밑창에 박아넣는 용도였다. 일반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각법을 쓰다 보면 발바닥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준비를 한 것이다.
‘이게 이만큼이나 얇게도 뽑아낼 수 있는 거였군.’
그 용도들만 생각하면 꽤나 거창하고 거추장스러울 것 같지만, 그 두께가 무척이나 얇아서 옷 안에 입어도 티가 나지 않았다. 그만큼 내구력도 마냥 높다고 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운철로 만든 것이니 몇 번 쓰고 망가질 수준까지는 아니겠지. 영감이 작정하고 만들었기 때문인지 생각 이상으로 얇게 빠진 그것들을 보며 천화는 나름 만족했다. 이 정도면 들어간 운철의 양이 꽤 적을 텐데도, 제련이 잘 된 까닭인지 하나같이 유일 등급으로 뽑혀 나왔으니까.
“자, 여기 마지막 물건일세.”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내민 물건을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