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도왕의 추천장 (2)2021.09.21.
“말도 안 돼!!”
천화와 설영을 데려가기 위해 내려온 스님이 방장의 말을 전하자 대답이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바로 남궁훈.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천화가 소림 방장의 초청까지 받자 순간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하면서. 나름 심계가 있는 인물인 것처럼 행동하긴 했지만, 천화가 보기엔 아직 애송이였다. 사람 좋은 것처럼 행세하지만 결국 저 중에서도 가장 자존심이 강해 자신보다 잘난 인물이 있다는 것을 참지 못하는 애송이.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저자는…….”
“소협은 뉘십니까?”
천화를 데리러 온 소림승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지 크게 반응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표정조차 변하지 않은 채 슬쩍 고개를 돌려 그의 정체를 물었다.
“남궁세가에서 온 남궁훈이라고 합니다.”
“남궁창룡이셨구려. 헌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궁창룡의 이름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적어도 소림 앞에서는 그 위세 높은 남궁세가의 이름도, 남궁창룡의 별호도 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그의 별호를 알고 있긴 하지만 그뿐. 상대에게는 남궁훈이라는 이름도 그저 힘 좀 쓰는 골목대장 같은 느낌일 뿐인 것이다.
“흠흠. 잠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허나 저자는 그리 대단한 이가 아닙니다. 방장께서 만나실 만한…….”
“그것은 소림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남궁세가에서 소림의 행사에 관여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 그것이 아니라…….”
무심한 핀잔. 그 한마디에 남궁훈의 기세가 확 눌렸다. 그의 말처럼 누가 있어 소림의 행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소림 방장이 만나겠다는데, 그가 인정을 했다는데 그냥 돌려보내라고? 남궁훈이 아니라 그 아비라도 감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분들께 사과하고 물러서시지요. 이 분들은 소림의 귀한 손님이십니다. 함부로 이야기하거나 대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남궁훈이 실언을 했다는 듯 찔끔 몸을 떨며 물러섰다. 사과까지 하라고? 저런 놈에게? 내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구겼지만, 그는 어서 사과를 하라는 듯 단호한 눈빛으로 천화의 곁을 단단히 지키고 섰다.
“우헤헤헤.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방정맞은 웃음을 짓는 천화의 모습에 더욱 사과를 하기 싫어졌지만 어쩔 수 없다. 이곳은, 상대는 소림이니까. 자칫 가문에도 피해가 갈 수 있는 일이기에 부들거리며 들릴 듯 말 듯 소리를 내었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뭐라고? 작아서 안 들리는데~?”
이때다 싶었는지 천화가 속을 긁어놓자 주변이 술렁거렸고, 용화지회의 다른 인물들도 슬쩍 뒤로 물러섰다. 애초부터 나선 적이 없다는 듯 발을 뺀 것이다. 자칫하면 자신들 역시 체면을 구기거나 사문에 누를 끼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여기까지 왔으니 저희도 방장께 인사를 드리고 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마침 아버님께서 방장께 전해드리라고 한 것도 있으니…….”
의리가 없다면 없는 행동이었기에 남궁훈도 힐끔 그들을 노려보았지만, 지금은 눈앞의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다.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전하라 한 것이 있다면 방장 역시도 당연히 만나줄 것이라 기대하며 물귀신처럼 따라붙었다.
“현재 본사는 외인의 방문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전하실 것이 있다면 무림대회가 시작된 후에 따로 청해주시지요.”
허나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무엇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중요한 무언가라면 따로 전서구라도 먼저 보내었겠지. 무림대회는 소림에서 여는 것이기는 해도 이미 구파일방, 오대세가를 비롯한 여러 대문파들과의 협의를 통해 열리는 것인 만큼 남궁세가가 따로 전달할 만한 사항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가지고 온 것도 그저 축하 선물 정도의 것이었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 생각한 남궁훈이 꾀를 낸 것에 불과했다.
“더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접수를 마치고 사흘 뒤에 다시 찾아주시지요.”
결국 남궁훈은 마지막으로 축객령까지 받은 뒤 몸을 돌렸다. 다시 쭈뼛거리며 배첩을 내밀고 접수를 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천화와 설영은 그의 인도를 받아 소림사를 향해 나아갔다. 안타깝지만 임봉곤의 출입은 허락되지 않았기에 먼저 내려가 금무성을 만나기로 하고, 두 사람만 그를 따라 소림사에 발을 들였다.
[정말 괜찮은 거야? 그 녀석들…….]
그렇게 스님을 뒤따라 산을 오르는 동안 설영이 못내 걱정이 되었는지 전음을 보냈다. 나름대로 통쾌하긴 했지만 그래도 용화지회가 아닌가? 무림에서도 내로라하는 문파 또는 가문의 대표 후기지수들. 장차 무림을 이끌어갈 인재들이었다. 자칫 그들과 척을 지게 된다면 앞으로의 강호행이 꽤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괜찮아, 괜찮아. 무림이 그놈들 것도 아닌데 뭘.]
아니, 어쩌면 그들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서 그들은 언제까지 무림의 지배자일 수 없었다.
‘소림도 마찬가지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천화는 자신을 인도하는 이를 슬쩍 쳐다보았다. 용화지회라 자칭하는 이들조차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는 소림에서 꽤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사대금강. 소림의 수호신이라는 신승을 제외하고 대외적으로 가장 강한 무승이라고 알려진 인물 중 하나였다. 그들 중 얼굴이 알려진 이는 둘 정도에 불과했지만, 사대금강이라는 이름답게 그들과 비등한 수준의 강자가 둘이나 더 있는 것이다. 바로 눈앞의 인물을 포함해서.
“이쪽입니다.”
그를 따라 조용히 산을 오른 천화와 설영은 외진 길을 따라 다시 이동했다. 방장의 명으로 공사에 필요한 인부를 제외하고 외인의 출입이 제한된 산문을 넘은 유일한 인물들이기에 굳이 드러내어 주목을 받게 할 이유가 없는 데다, 인피면구를 썼다 하나 설영의 육감적인 몸매를 동자승들이 보기라도 한다면 한동안 심마에 휩싸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무림대회 동안 일정 배분 이하의 어린 스님들은 출입이 제한되게 될 터였다. 물론 재주껏 숨어서 사람들을 구경하겠지만.
“들어가시지요. 방장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굽이굽이 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전각에는 소림 방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소림 방장이 기거하는 곳이라고 보기엔 수수해 보였지만, 천화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 쏟아부은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수수하지만 초라하지 않은, 오히려 기품이 느껴지는 실내 장식을 위해 중원 최고의 장인들을 불러 짓고 채워넣은 전각인 것이다. 때문에 감탄하는 설영과 달리 심드렁한 표정으로 휘적휘적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런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인은 본 사를 맡고 있는 백연이라고 합니다.”
“천화입니다. 별호는 그리 내세울 만한 게 못 됩니다.”
“설영입니다.”
소림 방장의 면전에 대고 악마라는 말이 들어간 별호를 내뱉기가 민망해서이긴 했지만, 그 또한 예의를 차리는 것이니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가 둘을 부른 이유는 도왕 때문이니, 악마든 마귀든 상관없기야 하겠지만.
“겸손하시구려. 최근 두 분의 명성이 호북 일대를 진동시켰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제가 또 한 겸손 하죠! 아,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야 저도 편하게 하죠.”
“천화, 너…….”
백연이 칭찬하자 바로 태세를 전환하는 천화의 모습에 설영이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천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뭐라 말을 하든 방장은 개의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고분고분하고 얌전하게 나왔다면 그는 천화와 설영을 얕잡아보았을 터였다. 어쩌면 이용해먹으려고 들었을지도 모른다. 도왕과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도를 차지 않은 것만 보아도 후인은 아닐 터였고, 저만큼이나 젊은 나이에 이만한 실력을 가졌다면 써먹을 곳이 꽤 많은 것이다.
“허허. 소저는 탓하지 말게. 젊은 무인이 그만한 기개는 가져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어디, 도왕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가?”
꽤 무례한 언사임에도 백연은 옆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하게 웃으며 천화를 대했다.
“예. 부인께서도 이제 거의 다 나으셔서 요즘은 평안하십니다. 아, 소림에도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작은 빚이 있으시다고요.”
그것 보라는 듯 씨익 웃어보인 천화가 간단히 대꾸했다. 인사치레 같지만 그 말에 묘하게 백연의 표정이 굳었다. 도왕 손무양. 그와 소림은 작은 인연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코 그것이 긍정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가 아내를 살릴 영약들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소림에도 방문했던 것이다. 소림 영약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대환단을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실제로 만약 대환단을 먹였다면 도왕의 아내는 큰 차도를 보일 수 있었을 터였다. 독을 완전히 씻어낼 수는 없겠지만, 무인이라면 최대 일 갑자의 내공까지도 얻을 수 있는 희대의 영약인 만큼 혈노침화독의 영향을 받지 않고 기력을 되찾는 것 정도는 가능했겠지.
‘쫄리겠지. 그 빚이라는 말이 은혜가 아니라 원수처럼 들릴 테니까.’
허나 소림은 거절했다. 도왕의 위명이 대단하고, 그가 무슨 일이든 전력으로 소림에 협조하겠다는 약속까지 내걸었지만, 몇 알 가지고 있지 않은 대환단의 가치가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구나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던 강호에서 소림이 도왕의 도움을 받을 만한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문제는 도왕이 같은 조건으로, 비교적 여력이 있는 소환단이라도 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 또한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도왕인지라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그보다 하위의 영약인 복마단 한 알을 선심 쓰듯 내밀었지만, 그 정도는 도왕이 구한 수많은 영약들과 비슷한 수준일 뿐이었다. 기력을 조금 북돋아주기는 하겠지만 차도를 보이는 것까지는 기대하기 어려운, 그저 그런 수준의 영약. 나름대로 성의를 보였다고는 하나 찔리는 부분이 없지 않은 소림이었기에 백연은 그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또 도왕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머뭇거렸다. 일단 천화가 그의 아내와 관련된 일을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영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도왕을 그냥 돌려보낸 이후, 그의 아내가 잘못되어 혹여 도왕이 소림에서 깽판을 치면 어떻게 하나 한동안 노심초사했으니까.
“흠흠. 무탈하시다니 다행이군. 거처를 알려주셨다면 좋은 약이라도 구해 보내드렸을 터인데…….”
“와, 그거 이제라도 주시려고요? 통 크시네!”
“아니, 그 말이 아니라……. 크흠흠. 대환단까지는 무리가 있겠지만 소환단까지는 의견을 내볼 참이네.”
백연은 천화를 슬쩍 떠보려다가 된통 당하고 말았다. 천화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찔러보기 위해 슬쩍 말을 던진 것인데, 냅다 받아쳐버리니 무안해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도왕과 소림과의 관계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이전에는 매몰차게 거절했던 소환단이라는 패까지 꺼내들었다. 아내의 병세가 호전, 아니 거의 나았다면 다시 도왕이 활동을 할 수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최근 마교와 관련된 소식들도 꽤나 들려오고 있지 않던가? 만약 그들이 정말 중원을 침공하려 들 경우, 도왕과 같은 절대 고수의 도움은 무척이나 큰 것이었다. 이제라도 소환단 하나쯤을 던져주고 빚을 지울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여기에 낚일 줄을 몰랐는데.’
이것은 천화조차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기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만약 도왕에게 소환단이 전해진다면 그것 받아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도왕이야 더 이상 영약이 의미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의 부인 역시 소환단을 섭취하면 앞으로 무병장수할 수 있겠지만 이미 먹어치운 영약들이 몸속에 잠재되어 있으니 눈에 띄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만은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말만 잘한다면 소환단을 손에 넣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