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진룡무쌍 (2)2021.10.10.
천화가 정말 재채기 덕분에 우연히 놈의 검을 피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매화향을 맡으니 괜스레 코가 간지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재채기까지도 완벽히 천화의 통제하에 있었으니까.
“……다시 가겠습니다.”
그런 사실을 눈치챈 것일까? 아직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일진 도장은 다시 한 번 신중하게 기수식을 취했다.
“매화노방(梅花路傍).”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시작을 알리는 초식이 펼쳐졌다. 느릿한 듯 살랑거리며 움직임 일진의 검에서 매화 꽃잎 같은 검기가 피어올랐다. 나중에는 검기가 아니라 검강으로 매화를 피워낼 수도 있겠지만 아직 성취가 부족한 것인지, 천화에게는 쓸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인지 피어나는 매화는 분명 검기였다.
“매화접무(梅花蝶舞).”
허나, 그렇다고 그가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땅을 쭉 밀듯이 박차고 달려들자 그의 검이 변화했다. 매화 꽃잎이 살랑거리며 날라오른다고나 할까? 일진의 검이 나풀거리며 연검처럼 휘청거렸다. 두 눈을 현혹시켰다.
“어디서 장난질이냐?”
보통의 경우 저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에 말려버린다. 떨어지는 꽃잎을 손으로 잡기 어렵듯, 그의 검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검을 섞다가 놓쳐버리는 것이다. 코앞에서 팔랑거리는 검을 놓치면? 죽는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였지만 그것을 잡는 것이, 또 참아내는 것이 쉽지 않기에 화산파가 오래도록 구파의 자리에 있는 것이겠지. 쐐애액-! 까앙! 그러나 천화는 조금 다르게 대응을 했다. 검을 섞는 대신 비영검을 던져 흐름을 끊어낸 것이다.
“?!”
비뢰투술도 아닌 그저 평범한 투척술. 검기조차 버텨낼 수 있는 비검이라는 것이 특이하긴 했지만, 고작 그것에 초식의 맥이 끊겨버리자 일진 도장으로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실수를 했던가? 아니면 우연일까? 천화가 또 다시 일을 내는 것은 아닐까 주변이 소란스러워졌지만 일진 도장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번부터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천화의 진짜 실력이라 한들,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일진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처음부터 검을 뻗어냈다. 매화노방. 매화접무. 검끝에서 매화 모양의 검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매화토염(梅花吐艶).”
‘젠장, 이 정도면 사술 아닌가?’
마침내 꽃잎들이 한데 뭉쳐 한 송이의 매화꽃을 이루어졌다. 매화 봉오리가 터지며 다시 한 번 진한 매화향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에취! 에취! 에취이!!”
천화가 스며들 듯 파고드는 검격을 재채기와 함께 날려버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장난하듯 가볍게 피해내고 있지만, 천화로서는 다른 의미에서 죽을 맛이었다. 이래서야 어디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나? 휴지 같은 걸로 코를 틀어막고 싸우든가 해야지 원!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자세를 고쳐잡는 순간, 일진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껏 펼쳐놓은 검세를 추슬러 한꺼번에 쏟아내었다.
“매화낙락(梅花落落)!!”
피어나던 매화송이가 스스로 찢어졌다. 검기가 다시 매화 꽃잎으로 흩어졌고, 몇 개나 되는 것이 동시에 천화를 향해 떨어져내렸다. 기공까지 더해진 변초의 극치! 이것이 현재 일진 도장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연계였다. 초반부 초식도 이럴진대 중반부, 후반부로 넘어가면 어떠할까. 극성으로 익혀내면 온 세상이 매화로 뒤덮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혹자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만천화우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현란한 무공답게 시야가 아득하게 메워졌다.
“장난치다 걸리면…… 손모가지가 날아가는 법이지!!”
그 순간, 천화가 천천히 내뱉던 숨을 멈추었다. 몸의 잔떨림조차 잡아내고 한순간에 검을 떨쳐냈다. 조룡연아참. 변화 대신 일격 일격이 강력한 살상력을 가진 연격이 일진의 검을, 아니 손목을 노려갔다.
“!!”
그와 함께 일진 도장의 손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계속해서 검을 떨쳤다가는 상대를 베는 대신 자신도 손목이 잘려나가게 생겼으니까. 때문에 검격을 멈추고 오히려 손목을 베이지 않게 방어하는데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이 정도로군.’
경험 부족, 그리고 각오의 부족에서 온 실책이었다. 만약 손목을 베일 작정을 하고 검을 휘둘렀다면 천화의 어깨든 목이든 베어낼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상처입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공격을 무디게 만들고 실수를 유발했다. 무사히 손목을 간수하는 대신, 스스로 수세에 몰리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뭐, 물론 외팔 검수가 되는 것보다야 비무에서 한 번 패배하는 것이 백번 낫긴 하지만. 그리고 불괴기공을 익힌 천화라면 어지간한 상처쯤은 금세 회복을 할 수 있을 테지만.
‘날 상대하기엔 십 년은 이르다. 임마!’
아니, 십 년 뒤에도 탈탈 털렸던가? 뭐, 그때 실력으로 지금 덤비면 가능성이 있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상황을 역전시킨 천화가 집요하게 손목을 노리고 덤벼들자, 이제는 일진 도장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모든 변화는 최종적으로 손목에서 나오니, 손목을 노려 변화를 막는 것은 분명 훌륭한 방법이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자신의 검을 읽어내고 파고들 수 있는 것일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비무가 아니었다면 멱살을 잡든 무릎을 꿇든 뭐라도 해서 물어보고 싶을 만큼.
‘어설퍼, 어설퍼.’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천화의 눈에는 훤히 다 보였으니까. 그동안의 경험이 다르고, 지식이 다르다. 한껏 변형을 일으킨 투로로 움직인다면 또 모를까, 고지식하게 초식대로 변초를 일으키니 맞아주는 게 바보 같은 일 아닌가? 게다가 변화의 중심은 손목이지만, 더 큰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손목뿐 아니라 팔 전체, 온 몸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 근육에 가해지는 힘의 크기나 결만 보아도 이미 대략의 공격 방향을 파악할 수 있는 천화였으니, 아직 여물지 않은 손목과 경험으로 속이려해 봤자 타짜 앞의 아마추어다.
“졌습니다.”
“엥? 벌써?”
그렇게 몇 번의 검을 부딪히지 않는 공방이 오갔을까. 모르는 이들이 보았다면 그저 둘이서 한바탕 칼춤을 추었다고 생각할 만한 지루한 움직임일 뿐이었음에도, 일진이 어느 순간 멈춰서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재미없는 녀석.’
좋게 이야기하면 자신의 분수를 알고, 냉정한 판단을 할 줄 아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화는 뭔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의 눈빛 속에는 분명 무언가 비장의 한수가 있어보였으니까. 이 상황을 일발역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무언가를 가지고도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물론 천화에게는 통하지 않았겠지만, 무인으로서의 호승심보다 후일을 도모하고 자신을 감추는 것에 더 무게를 두는 그 행동이 달가울 리 없었다.
“승자는 진룡무쌍 천화 소협!!”
그렇게 다소 허무하게 8강전도 끝이 났다. 준결승인 4강과 결승전은 다음날 진행이 예정되어있었고, 예상대로라면 우승자가 가려진 후 어떤 중대발표가 있을 터였다.
‘어느 정도까지 대응할지는 모르겠군.’
과연 무림맹을 창설할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가시화된 위협이 너무 적었으니, 정파 놈들이라면 그보다 소극적인 대응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늘 미적대다가 한 방 얻어맞고 나서야 부랴부랴 움직이는 것이 놈들이니까. 그러나 무진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것이나, 자신 때문에 앞당겨져 일어난 사건들을 생각하면 당장 무림맹을 창설하고 마교 발호의 싹을 자르려 한다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역시 내일이 되어야 알 수 있겠지. 자신과 마찬가지로 4강에 올라온, 내일의 상대들을 슥 훑어 확인한 천화는 누구든 별 상관없다는 듯 식사와 휴식을 하고, 어스름이 깊어질 때쯤이 되어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시진뿐이라니, 그냥 군침이나 흘리라는 소리구만.”
4강에 든 이들에 대한 특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용하시겠습니까?”
“예.”
바로 장경각의 이용이다. 소림에서는 후기지수 중 가장 강한 네 사람에게, 보상으로 소림의 모든 불경과 무학이 모여있다는 장경각을 한 시진 동안 열람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그것이 아주 큰 혜택인 양 고드름을 피우면서.
‘대단한 일이긴 하지. 문제는 원하는 서책이 있어도 한 시진 안에 찾을 수나 있을지 모른다는 거지만.’
사실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주로 불경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만 이곳에서 기연을 만나 실전된 줄로만 알았던 무공의 비급을 얻거나, 큰 깨달음을 얻어 무공을 진일보 시켰다는 이야기는 옛날뿐 아니라 최근에도 왕왕 들려오는 이야기이니까. 그것이 반드시 소림의 인물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때문에 소림사 장경각은 무인들이라면 한 번쯤 방문해보고 싶어 하는 장소였다. 다만, 한 시진은 너무 적었다. 장경각에 있는 책만 적어도 수만 권은 될 텐데, 그중에서 무엇이 어디 있는지 알고 읽는단 말인가? 현대의 도서관처럼 정리가 잘 되어 있거나 검색으로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머지 세 사람도 그저 기웃거리다가 별 소득 없이 돌아나왔을 확률이 높았다. 그나마도 한 명씩 개별 입장을 하게 했기에 서로 부딪히거나 방해가 될 일은 없겠지만, 반대로 둘이 힘을 합쳐 무언가를 찾아내는 협동 전략도 쓸 수 없다는 소리니까. 심지어 무신지로에서도 따로 검색 시스템을 제공하지 않아서, 간신히 장경각에 들어갈 기회를 얻거나 몰래 숨어들어간 이들이 곤혹스러움을 표하곤 했지.
‘그나마 다행인 건 대략의 위치는 안다는 정도이려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찾아낸 이들은 존재했다. 고인물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구역을 나눠 뒤져보면서 장경각 내에 숨겨진 비급을 찾아보았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던 무언가를 천화는 알고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아니고, 비급의 이름과 대략적인 위치 정도가 고작이기는 했지만, 서두른다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으리라.
“받으십시오. 이 불이 꺼지면 나오셔야 합니다.”
장경각을 지키던 스님이 천화에게 등잔 하나를 건넸다. 딱 한 시진 동안만 켤 수 있도록 준비된 등잔이겠지. 천화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가 직접 등잔에 불을 밝혀주었고, 똑같은 등잔에 불을 붙여 자신의 곁에 두었으니 시간을 속일 수도 없을 터였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부에서 무엇을 하는지까지 감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천화는 장경각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즉시 어느 지점을 향해 잰걸음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서고에 불이 붙지 않도록 한쪽에 등잔을 잘 놓아둔 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점을 뒤지기 시작했다.
‘왜지? 왜 없는 거지?’
허나 아무리 찾아도 원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오래된 무서가 발견되기는 했지만 천화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었고, 나머지는 순수한 불경들이었기에 천화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찾아야 할 것은 이것 하나만이 아니었으니까.
‘설마 위치가 바뀌진 않았겠지.’
다른 것부터 찾아야 할까? 아니다.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 그쪽이라고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 다시 한 번 집중해서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찾지 못할 것도 염두에 두었다. 무신지로에서 장경각이 처음 열린 것이 지금보다 몇 년 후였으니까. 이 많은 서책의 위치를 그사이 재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지만, 혹여 누군가 읽고 제자리에 두지 않아 발견된 것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얼핏 듣기로 그사이 장경각에 작은 화재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기에, 아직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화재 속에서 숨겨진 서책을 몇 권 발견했을 수도 있고, 배치를 조금 바꾸었을 수도 있음이니.
“혹시 이걸 찾으시는가?”
그렇게 천화가 집중해서 다시 서가를 훑고 있을 때, 아무도 없어야 할 공간에서 귀신처럼 나타난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
아무리 집중을 했다 하나, 혈마검을 차고 있지 않다고는 하나 바로 곁에 나타날 때까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그것은 그가 천화를 아득히 웃도는 실력자라는 뜻이었다. 허나 이번 무림대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지나가면서조차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딱히 소림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인물은 아닌 것이다.
‘이 할배, 이때는 그래도 주름이 별로 없었네.’
하지만 천화에게는 잊을 수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 소림신승. 최후의 순간 소림을 수호하기 위해 나타난다는 소림의 수호신이 바로 그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