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세 가지 기연 (3)2021.10.17.
모종의 거래가 성사된 순간, 청수 도장의 기도가 바뀌었다. 진정한 절정 무인의 기도가 뿜어져나오며 검에서 뿜어지던 기운 역시 함께 변화한 것이다. 검강. 아직 다루는 것이 완전하지 않은지 천화의 눈에는 살짝 어설퍼 보였지만 절정 무인을 상징하는 그것이 놈의 검에서 뿜어진 것이다.
‘은근히 겉멋이 있구만.’
사실 천화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절정 무인이 되면 검강을 임의로 뽑아낼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그와 같이 완성되지 못한 절정 무인에게 있어 가장 효율이 좋은 것은 초식과 함께 일으켰을 때였다. 초식을 통해 검강을 생성해낼 때 내공의 소모가 가장 적었고, 더 위협적인 것이다. 상대 또한 어느 시점에 검강이 뻗어나올지 모르니 긴장하게 되는 법이었고. 허나 녀석은 대놓고 억지로 검강을 뽑아내고 있었다. 상대를 미리부터 긴장시키고, 대비하게 만드는 안 좋은 습관이었다. 물론 그만큼 일반 공격조차도 무시무시해지긴 하지만. 후웅!! 맞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몽둥이 휘두르듯 휘둘러대면 맞겠냐?”
사실 피해내기는 오히려 쉬워졌다. 검강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느라 되레 움직임이 둔해졌으니까. 게다가 천화는 그가 검강을 뽑아낸 순간부터 철저하게 회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 허공에 칼질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것도 피해보시죠.”
순간 청수 도장의 검이 출렁거렸다. 물결치듯 요동치는가 싶더니 엇박자를 타고 천화의 몸을 갈랐다.
“피했쥬? 하나도 안 맞쥬? 어림도 없쥬?”
허나 이번에도 천화는 얄밉게 도망쳤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상체만 비틀어 피해내며 그를 조롱했다.
“진짜는 이겁니다!”
하지만 그때, 검을 쥐지 않은 청수 도장의 좌수에 막대한 기가 모여들었다. 검강을 머금은 일격은 미끼였고, 진짜는 이쪽이었다. 태청산수. 무당이 자랑하는 장법 중 하나였다.
“양의심공?”
그 순간, 천화는 깨달았다. 청수 도장이 양의심공을 익혔다는 것을. 양의심공은 말 그대로 의지를 둘로 나누는 공부였다. 흔히 양손으로 각각 동그라미와 세모, 세모와 네모 따위를 동시에 그려낼 수 있음으로 증명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양의심공을 제대로 익혀낸다면 서로 다른 두 가지 무공을 동시에 펼쳐낼 수 있기에, 변수를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무당의 비밀 무기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청수 도장이 그 능력을 이용해 검과 장을 동시에 뻗어내고 있었다.
“흥!”
동시라고는 하나 미묘한 시간차는 분명히 존재한다. 정말 둘을 동시에 뻗어내려면 공격자의 자세도 완전히 망가져버리니, 동시에 무공을 운용하되 도착하는 것은 순서대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 태청산수와 유운검의 조합은 만만치 않았다. 태청산수는 정심한 내공으로 상대의 내력을 흩어버리며 타격을 입히는 수법이었으니까. 장법 자체의 위력도 강력하지만 상대를 약화시키고, 거기에 양의심공을 이용해 검강까지 뻗어오니 위태롭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인의 멀티태스킹 능력을 얕보지 마라!!!”
하지만 천화 역시 내공의 운용이나 동시 작업 능력이라면 자신 있었다. 사실 말이 양의심공이지, 그 기술이 꼭 무당파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무공이 아니라 심공이라 이름 붙여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저 좀 더 쉽게 의지를 나눌 수 있을 방법을 가진 것일 뿐, 그들의 전유물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천화 역시 무신지로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무공을 익혔고, 사용해왔기에 여러 무공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 또한 가능했다.
“이중극점!”
“큭?!”
태청산수에 마주치는 것은 칠성무적권. 찰나에 한 지점을 두 번 가격하는 이중 극점이 녀석과 부딪혔다. 태청산수에 의해 자연히 흩어져야 할 기운이지만, 천화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상대의 탁기를 부수어버리기에 태청산수로 맞고 나면 시원한 느낌마저 들기 마련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당의 내공이 상대보다 정순하다는 전제하에서의 일이다. 부딪혀도 사라질 탁기가 없으니, 어찌 약해지고 흔들릴 수 있겠나? 천화만변무상심법으로 쌓은 내기는 정순하기 그지없었고, 칠성무적권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피해를 입고 주춤 밀려나는 것은 천수 도장이었다.
“호아파참!”
검강과는 부딪히지 않는다. 유일 등급의 검이라면 검기를 씌워 어떻게든 비벼볼 수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나중에 대장장이 영감에게 수리를 맡겼을 때 한바탕 잔소리를 들을 테니까.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타 다시 한 번 검강을 피해낸 천화가 바닥을 쓸듯 낮게 깔아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용호십삼검의 예리함과 난폭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번만은 물밑의 상어처럼 광폭하게 천수 도장의 몸을 물어뜯었다.
“안 돼!!”
비무장 밖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천수 도장의 도복이 뜯겨나갔다. 내기를 일으켜 몸을 보호해보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히 보호 할 수 없었는지 가슴에 할퀸 듯한 상처가 남았다.
“아직……입니다!”
그러나 천수 도장도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빼냄과 동시에 기묘한 곡선으로 검을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태극혜검?’
다른 이들은 저게 무슨 짓인가 싶을 터였다. 상처를 입고 힘이 빠져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그 정체를 알고 있는 천화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태극혜검. 무당 최고의 검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절대 방어의 검식이 그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하, 재능충이 또…….”
그 모습에 천화조차도 쉽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가 태극혜검을 얼마나 깊이 익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공격하는 순간 당하는 것은 이쪽일 테니까. 물론 뚫어내려면 어떻게든 뚫어낼 수 있겠지만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터였다. 태극혜검은 최강의 방패라 부를 만큼 방어에 특화되어있고, 무엇보다 역습에 초점이 맞추어진 무공이니까.
“지금 천수 도장이 밀린 건가?”
“설마 진룡무쌍이 이번에도 이기는 거야? 진짜 용들을 다 잡아내고서?”
따라서 당장 누가 우세하다고 콕 집어 이야기하기는 어려웠지만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는 법이다. 조금 전의 공방은 누가봐도 천화의 우세였고, 입은 상처 또한 작지 않았기에 승부가 완전히 기울어진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이 천수 도장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상처까지 입은 상태. 급히 점혈을 하고 싶지만 자세를 아주 잠깐이라도 풀면 당장 천화가 짓쳐들어올 것 같았기에 그럴 수도 없다. 천화에게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천수 도장이 자멸할 것 뻔히 보였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지. 휘익! 여전히 녀석에게 간격을 내어주지 않은 채, 팔을 휘둘렀다. 비영검을 집어던졌다.
“……?”
천수 도장은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저 알 수 없는 행동이 자신을 속이고 빈틈을 만들기 위한 술책이라 생각한 것이다.
“흐으읍!”
허나, 그러거나 말거나 천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비영검에 묶인 비영사를 말아쥐더니 내공까지 이용해 힘껏 잡아당겼다.
“으랏차차!!!”
쩌적- 쩌저적!
“대체 무슨 짓을……!”
후우웅!!!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와 이어 육중한 무언가가 날아드는 소리까지 들리자 천수 도장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무너진 담벼락에서 떨어져나온 바윗덩이가 그를 덮치고 있는 상태였다. 비영검에 섞인 만년한철에 내공이 더해지자 엄청난 흡착력을 보이며 담을 무너뜨리고 돌덩이를 붙잡은 것이다.
“컥!!”
미리 대비를 했다면 검강으로 바위를 잘라낼 수 있을 터였다. 하다못해 폭파시키듯 터트려서 막아낼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대응이 너무 늦은 까닭에, 그것이 불가능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날려 피하려던 천수 도장은, 가볍게 비영사를 움직여 바윗덩이를 인도하는 천화 때문에 그대로 치이고 말았다.
“…….”
“…….”
격통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 천수 도장. 승부가 갈렸지만 누구도 함부로 입을 떼지 못했다. 아니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설마하니 무인 간의 대결에서 돌덩이를 날려 끝장을 볼 줄 그 누가 상상이냐 했으랴!
“더 해요?”
정적을 깬 것은 천화 본인. 이미 검을 가져다 댈 것도 없이 확실하게 승부가 갈렸기에 귀찮다는 듯 짝다리를 짚고 귀를 후비던 그가, 승부가 났음을 알렸다.
“스, 승자는 천화 소협!”
“아아아아……!”
“거기 동작 그만! 내 돈에 손대지 마! 손모가지 날라가니까!”
진행자조차 별호를 이야기하는 것을 까먹을 만큼 얼떨떨해하고 있는 사이, 천화가 득달같이 비무대를 달려내려가 배당금을 챙기고 있었다.
“흠흠. 그럼 먼저 들어갑니다!”
대부분이 청수 도장에게 걸었기에 배당금을 실로 어마어마했다. 금자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전표로, 그것도 묶음으로 지급된 돈을 챙기고서 저도 머쓱해졌는지 혼자 숙소로 돌아가버렸다. 다음 경기는 보지도 않고서.
‘굳이 볼 필요도 없지. 누가 이길지도 뻔한 데다, 누가 올라오든 의미 없으니까.’
천화가 사라진 이후, 천화와 연결된 무기가 장외로 나갔으니 장외패를 선언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심한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묵살당했다. 천화가 결승까지 올라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이들은 많았지만, 명문 정파 체면에 그것은 너무 비루해보였으니까. 더군다나, 바로 옆에서 남만야수궁주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는 중이었으니까. 결국 천화의 승리는 아무 문제없이 인정되었다.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다음 경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바람을 잡았다. @ 무림대회의 마지막 날. 묘한 분위기 속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후기지수 비무대회의 마지막 경기가 준비되고 있었다. 결승전에서 맞붙을 이는 천화와 무진. 제법 안정적으로 절정의 무위를 갖춘 무진이 청성파의 숨겨둔 한 수였던 자성 도장을 꺾고 결승에 올라온 것이다.
“……왜 이리 늦는 겐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는 잠시 측간에 다녀온다고……. 다시 사람을 보내 확인해보겠습니다.”
헌데, 막상 비무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는데 비무를 치를 사람이 오지 않았다. 당연히 오지 않은 사람은 천화였다. 아침부터 복통을 호소하며 측간에서 살다시피 하더니, 비무가 시작할 시간이 벌써 일각이나 지났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문에 마지막 비무를 보기 위해 구름떼처럼 몰려든 관중들이 혹여 천화가 두려워서 도망을 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지만, 속 시원하게 이유를 알릴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무인이 설사 때문에 지각하고 있다는 말을 대중에게 하기에는 영 모양이 빠졌으니까. 천화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무림대회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당한 배려가 필요했다.
“어서 사람을 보내보게. 서둘러.”
다시 한 번 사람을 보내 천화를 찾으라 지시했다.
“어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때, 바지춤을 추스르며 천화가 나타났다. 정말 측간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모습으로. 기다리던 관중들도 그것을 대충 알아차렸지만, 애써 모르는 척을 해주었다. 어쨌든 배탈이야 생리현상이 아닌가? 무인도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지. 이건 인정이지.
“그럼 이제 마지막 비무를 시작…….”
꾸르르륵-
“으윽! 잠깐만요!”
허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진행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기다렸던 비무를 시작하려는 찰나, 굉음에 가까운 소리가 천화의 뱃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와 함께 천화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뭔가. 이제는 비무를 시작해야 하네.”
“일각, 아니 이각만 더 미룰 수는 없겠죠?”
“무리네. 이미 많이 지체를…….”
“기권! 그럼 기권하겠습니다. 그럼 됐죠? 저는 이만.”
토다다다다다다- 그렇게 제 할 말을 마친 천화가 괄약근을 조이며 종종 걸음으로 사라져버렸다.
“…….”
그 모습을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던 내빈과 관중들이 뒤늦게 이 상황을 알아차렸다.
“뭐, 뭐야. 기권이라고?”
“그럼 비무는 없는 거야? 결승은?”
“허어, 이거 참……! 살다 살다 별 일을 다 보겠구만.”
황당했지만, 눈앞에서 보았으니 어쩌겠나? 이렇게 되자 마음이 다급해진 것은 주최측과 내빈들이었다. 과정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상대가 무진이니 멋진 비무를 선보여줄 테고 그것으로 만회하며 마지막으로 중대발표를 할 참이었으니까. 헌데 그 중간 과정이 사라져버렸으니 당황스러운 것이다. 이대로 발표를 해도 좋을까? 분위기가 영 아닌데?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측간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천화는 인근 전각의 지붕에 찰싹 달라붙어 주변을 살폈다.
‘원래 오디션 대회 1등은 고달픈 법이지. 우승한 놈은 이리저리 불려다니면서 돈도 제대로 못 받고 죽도록 일만 해야 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그걸 하냐?’
모든 것은 거짓이고 연기였으니까. 뱃속에서 요동을 치는 소리가 나던 것도 모두 천화가 스스로 조종한 것이다. 기권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무리 천화라지만 아무 이유 없이 결승에서 기권을 해버린다면 후폭풍이 제법 있을 터였기에 이런 수를 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먹혀 들었다. 애초에 우승자와 준우승자의 보상이 금전적인 것 이외에 큰 차이가 없었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 돈이라면 안목품평회를 통해 넘치도록 벌었으니까. 우승 상품으로 소환단쯤을 걸었거나, 내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다른 영약 다수를 걸었다면 모르겠지만, 고작 금자 몇백 냥 차이 때문에 굳이 개고생을 해가며 비무를 치를 이유가 없었다. 천화는 홀로 미소를 지으며, 억지로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소림방장 백연의 말에 주목했다. 과연 어떤 발표를 할 것인가. 그것에 따라 천화의 계획도 일부 수정이 될 수 있었기에 가만히 지붕에 누워 경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