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방해꾼들 (3)2021.10.26.
휘리릭! 여인, 아니 세주연이 뛰어오른 순간 천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을 뻗었다. 비영검과 분리된, 비영사가 날아가 치마 속에 있는 크고 우람한 무언가를 휘감았다.
“읏차!”
“꺄악!!!”
쿠웅!!! 그리고 천화가 힘껏 당기자 여인의 몸뚱아리가 둘로 갈라졌다. 정확히는 롱롱이와 목마를 타고 있던 세주연이 분리가 된 것이었다.
“이게 무슨?!”
꼬리를 붙잡혀 강제로 끌려내려온 롱롱이가 먼저 땅 위에 안착했다. 롱롱이가 제대로 힘을 썼다면 불안정한 자세라도 날아가는 것은 천화 쪽이었을지 모르지만, 살기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소극적은 반응을 보이느라 어쩔 수 없이 끌려 내려온 것이다. 그 공룡처럼 생긴 괴이한 외형에 모두가 경악하는 사이, 허공에서는 세주연이 버둥거리며 떨어졌다.
“끄응. 어쩔 수 없군.”
세주연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제대로 땅에 안착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옷이었다. 자신의 체격보다 두 배는 족히 커다란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까닭에 그 속에서 몸이 꼬여 버둥거리게 되었다.
“공자님……!”
버둥거리는 세주연을 천화가 가볍게 안아들었다. 공주님 안기라 불리는 자세였지만, 워낙 옷이 치렁치렁한 까닭에 마치 포대기로 둘러싼 아기를 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가씨!!!”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세주연의 두 눈에서 꿀이 떨어지려는 그때, 저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매에 올라탄 채 허공을 배회하던 야수궁도 맹거가 그녀를 발견하고 떨어져내린 것이다.
“치잇…….”
이렇게 된 이상 숨길 수도, 도망을 칠 수도 없다. 단순히 무력만으로 뿌리치고 달아나는 것이라면 가능할 테지만, 애초에 그녀가 가출을 한 이유도 천화를 다시 만나기 위함이었으니까. 사뿐히 천화의 품에서 내려온 세주연이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며 인피면구를 찢었다. 특유의 귀여운 얼굴을 드러내며 스스로의 정체를 밝혔다.
“아가씨.”
“맹거 아저씨. 한 번만 못 본 척해주면 안 돼요?”
아이에게 어른 옷을 입혀놓은 꼴이라 여전히 옷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세주연이 맹거를 설득했다.
“죄송합니다. 일단 돌아가셔서 궁주님께 허락을 받으신다면…….”
“우씨! 아빠가 그걸 허락해 줄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세주연이 태어날 때부터 곁에서 지켜본 그였지만, 궁주의 명이 우선이었다. 그 또한 세주연이 위험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더구나 북해까지는 먼 길이다. 아무리 정파 연합의 행사라지만, 세주안이 믿고 있는 천화와 설영이 있다지만 허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저씨, 이렇게 나오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아가씨?”
휘이이익! 그러자 세주연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모아 길게 소리를 내자 맹거의 영물인 거대한 매가 호응하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빼액-!! 그냥 곁으로 다가온 정도가 아니다. 아예 세주연의 편이 되어버렸다. 날 때부터 엄청났던 세주연의 친화력 때문인지, 주인을 버리고 그녀의 편에 선 것이다. 더 이상 가까이 온다면 당장이라도 공격할 기세였고, 그런 것은 녀석만이 아니었다.
“롱롱아.”
“크로롱!!!”
롱롱이 역시 세주연의 뜻에 따랐다. 세주연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야수궁주인 세주안의 가장 강력한 영물 중 하나인 녀석이다. 녀석이 마음먹고 살기를 발산하자 절정 고수라도 위축될 만큼 매서운 기세가 뿜어져나왔다.
“큭…….”
가출하는 세주연을 야수궁도들이 막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힘으로 막아세우기엔 롱롱이가 너무 강했고, 세주연이 마음만 먹는다면 영물을 빼앗겨버리고 마니까. 그렇다 해도 본신의 무공 역시 뛰어난 이들이긴 하지만, 세주연 역시 만만치 않았다. 언중걸과의 격돌에서도 알 수 있듯 타고난 신력이 무시무시했기에, 무공 수위는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충분히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게다가 야수궁도들이 세주연에게 상처를 입히려 할 리 만무했으니 생각보다 가출은 쉽게 이루어졌을 터였다.
“흠. 그럼 이렇게 하죠.”
“천화 님?”
“맹거 님은 궁주님께 소식을 전해주세요. 아가씨는 아무래도 포기하지 않으실 것 같으니, 제가 책임지고 무사히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래도 중원에 그냥 두는 편이 더 위험할 것 같네요. 딱히 북해빙궁이 남만야수궁과 적대관계인 것도 아니고요.”
“앗! 지금 저를 책임지시겠다는……!”
그때 천화가 나섰다. 어차피 세주연이 물러날 것 같지도 않고, 힘으로 제압하는 것도 무리다. 천화가 돕는다면 마혈이든 훈혈이든 짚은 다음 데려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만약 롱롱이가 작정하고 탈출을 돕는다면 남만까지 데려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정체가 드러난 세주연이 더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데리고 다녀오는 것이 나을 것이다. 더구나 최근 마교가 움직이기 시작했기에, 세주연처럼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가 돌아다니기에는 영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 녀석까지 왔다면 이래저래 도움을 받을 만한 것도 있을 테고.’
물론 다 써먹을 데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일단 천화 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아마 곧 몇몇 궁도들이 뒤를 따르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하시죠.”
잠시 고민하던 맹거는 천화의 제안을 수락했다. 달리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천화와 설영의 기도가 달라졌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절정 고수. 저 젊은 나이에 절정의 경지를 밟은 것이다. 그것은 옆에 있는 설산빙화 나예린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무엇보다 천화의 성장이 괄목할 만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절정의 경지는 아니었으니까. 아니, 몇 개월 전 남만에서 만났을 때는 일류에도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던 수준이었다. 게다가 롱롱이까지 함께하니 큰일이야 나지 않겠지.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천화가 슬쩍 기도를 드러내보이자 수긍한 그는 다른 야수궁도들이 뒤따르게 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물러났다. 세주연과 천화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다른 일행들에게도 양해를 구한 뒤 일단 자리를 떠났다. 가장 기동력이 높은 것은 그였기에 남만으로 먼저 날아가고, 다른 인원들이 그들의 뒤를 쫓아 빙궁까지 이동을 할 터였다.
‘흠, 얼어죽지는 않겠지.’
과연 북해의 혹독한 기후를 그들이 견딜 수 있을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고수들이니 어떻게든 되겠지. 남만이 좀 덥기는 해도 춥거나 서늘한 장소, 계절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동사를 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천화가 인룡단장이자 사절단장의 권한으로 세주연을 받아들이고 비로소 진짜 이동을 시작했다. @ 사절단의 물품들은 인원수에 맞춰 준비가 되었지만, 고작 한 명이 추가된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먼 길이었고, 만약의 상황들을 대비해 제법 여유 있게 식량과 소모품들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는 길이 꽤 멀고 대로를 이동하기 때문에, 중간중간 들르는 마을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보급을 하면 그만이었다.
“공자님, 공자님. 저건 뭐예요?”
다만 처음 출발할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세주연이 천화의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었고, 이미 안면이 있는 설영은 천화의 뒤, 흑우의 등 위에서 가만히 둘을 지켜보며 말을 몰았다. 다른 여인을 뒤에 태우는 것에 대해 세주연이 반발하기는 했지만, 설영의 품에서 떠날 생각을 모르는 은룡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작지만 신수인 은룡이를 곁에 두고도 태평할 수 있는 것은 흑우밖에 없었으니까. 다른 말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설영이 올라타는 것을 거부했다. 그렇다고 말을 타지 않고 그 먼 길을 걸어갈 수는 없었기에 설영은 천화의 뒷자리를 고수했다. 그녀 역시 지켜보는 것인지 째려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묘한 눈초리를 하고 있긴 했지만. 그 뒤로, 무표정한 나예린과 침울한 모습의 언중걸이 다른 일행들을 이끌고 따랐다. 나예린이야 원래부터 차가운 표정과 말투로 유명한 인물인지라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언중걸은 세주연에게 박살이 났던 까닭에 잔뜩 위축된 모습으로 잠자코 뒤따르는 것이다. 나머지 일행은? 나름대로 자기 지역에서는 이름을 좀 날린 이들이었다. 정파 연합에서 천하상단과 손을 잡고 붙여준 쟁자수와 표사들이었다. 선물로 준비한 물품들이 제법 많았기에 그것을 관리할 인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화가 딱히 알아보거나 관심을 보일 만한 인물은 없었다. 어차피 정파 연합이라는 깃발 아래 움직이는 그들에게 위해를 끼칠 만한 이들은 거의 없을 테니까. 북해로 가기 위해 그들이 가로지르는 산서성에는 구대문파나 오대세가가 없었지만 인근에 하북팽가와 화산파, 종남파가 있고 소림과도 인접해있으니 그들의 간접 영향권이라고는 할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정파 연합의 첫 행사를 방해한다?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다가는 큰 코 다치는 법이지.’
위험요소는 분명히 존재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천화는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에, 최단거리로 북해까지 이동하기 위해 산서성을 종단하는 길을 택했고, 초반에는 관도를 따르는 대신 으슥한 길을 따라 이동하며 자신들의 종적을 감추려고 애썼다.
“또…… 노숙인가요?”
“며칠만 더 참아주시죠.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
그러다 보니 마을을 거치지 않고 지나쳐 노숙을 하는 일들이 잦았다. 그나마 식량을 넉넉히 챙겨왔기에 배곯는 일은 없었지만, 다들 제법 이름난 무가의 자식들인지라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천화, 너……. 설마 활동비 아끼려고 이러는 건 아니지?”
“에이~. 내가 설마 그러겠어? 그거 몇 푼 아끼려고?”
“응. 너라면. 충분히.”
“흠흠. 기분 탓이야, 기분 탓.”
그것은 설영 또한 마찬가지. 의심 가는 것이 있었기에 눈을 가늘게 뜨고 천화를 바라보았고, 불만이 없는 것은 오직 세주연뿐이었다.
“남만에서도 노숙은 자주 해봤지만 공자님과 이렇게 함께하니 기분이 새롭네요. 뭔가 낭만적이에요!”
어쨌든 그렇게 숭산에서 출발한 지 약 열흘이 지났을 때, 천화가 저 멀리서 느껴지는 수상한 기척을 느꼈다.
‘열흘이면 제법 잘 버텼네.’
“천화.”
“천화 님.”
그와 거의 동시에 설영과 후방에 있던 나예린이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들 역시 절정고수였기에 느낀 것이다. 상당한 무위를 지닌 무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물론 기우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저들의 기세가 너무 흉흉했다. 살기를 자제하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저들의 배치나 이동 경로 자체가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도록 이루어졌으니까.
“모두 정지.”
그것을 알기에 천화도 즉시 행렬을 멈춰세웠다. 상대를 미리 알아차렸다고는 하나 피해 가기는 무리다. 실력 차이도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화물이 있으니까. 북해빙궁에 전달해야 할 물건들이니 버리고 떠날 수도 없고, 각자 짊어지고 이동하기에도 양과 부피가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천화는 이동속도를 높여 그들을 확인하거나 산개하는 대신, 오히려 행렬의 위치를 조정했다. 길게 늘어선 구도에서 오밀조밀하게 뭉치도록 지시한 것이다.
“천화 님, 하지만…….”
나예린의 우려처럼 그렇게 할 경우 오히려 포위되기 쉬울 수도 있었지만, 천화는 개의치 않았다. 도망칠 수 없다면 뭉치는 것이 나으니까. 그편이 보호하기도 더 쉬울 테고 말이다.
“흐흐흐. 고놈들, 어르신들이 행차하신다고 공손하게 모여 있구나.”
잠시 후, 적으로 보이는 무리가 그들에게 접근했다. 대놓고 악당스러운 대사를 치는 것이, 모두의 예상이 틀리지 않은 듯싶었다.
“흠. 산속도 아닌데 녹림 흉내를 내는 건, 머리가 비었다는 걸 인증하는 건가?”
그런 놈들을 향해 천화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들이 이동하고 있는 곳은 산속도 아닌데 놈들의 복장이 녹림십팔채의 그것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무복의 가슴어림에 새겨진 문양까지 녹림의 그것이었지만 급하게 만든 듯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아무래도 신분을 감추려는 수작인 것 같은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믿을 리가 없는 분장이었다.
“그러기에 제가 다른 걸 하자고…….”
“크흠. 시끄럽다!”
속이 뜨끔했기 때문일까?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살기를 피워올렸다. 하는 짓이 영 멍청해 보이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벌써 피부가 따끔하게 쏘아지는 기운들이 놈들의 경지를 이야기해주고 있었으니까.
‘절정 고수는 다섯 정도인가?’
절정 고수만 다섯. 그밖에 일류 고수가 수십이고 이류급도 드문드문 섞여 있다. 이정도면 꽤 커다란 문파의 전력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기에 모두가 긴장했다. 그에 반해 이쪽은 천화와 설영, 나예린만이 절정 고수이고 일류급도 고작해야 열 명 남짓이었으니까. 나머지는 이류였고, 쟁자수들은 삼류 이하의 수준이었다. 만약 정면으로 부딪힌다면 어떻게든 그들을 쫓아내더라도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수준의 격차였다. 아니, 만약 세 사람이 상대 절정 고수들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전멸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판이었다.
“천화 님. 제게 맡겨주십시오.”
잔뜩 긴장한 나예린이 양해를 구하자 천화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미 놈들의 복장을 놀려먹은 판에 자신이 나섰다가는 일단 칼부림부터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디서 나오신 분들입니까?”
그렇기에 나예린이 나섰다. 최대한 중재를 하거나, 돈을 쥐여서라도 돌려보낼 수 있다면 그러고자 하는 것이다.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것이 분명하지만 정파 연합의, 인룡단의 첫 행사였으니 가급적 마찰을 줄이고 임무를 성공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보면 모르겠느냐. 녹림의 영웅들이시다!”
“와, 철면피, 와, 뻔뻔함, 와…….”
허나, 뻔뻔하게 녹림임을 주장하는 그들의 모습에 천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을 들은 자칭 녹림인들의 복면 너머 얼굴도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말을 하는 건 대장 혼자였지만, 부끄러움은 모두의 몫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