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이무기와 용 (4)2021.11.21.
“키약! 캭! 캭!!”
퍼엉 펑 펑!! 조금 전까지 호수의 물을 조종해 설영을 몰아치던 이무기가 이제는 되레 물줄기에 두드려 맞고 있었다.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사용하는 빙백신장에 맞고도 멀쩡히 힘을 회복하던 녀석이, 물 안에서는 자가 치유력까지 급격히 상승하던 녀석이 이제는 물줄기에 맞아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는 것이다.
‘이거, 설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천화로서도 황당한 일이었지만 곧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격’이라는 것이다. 단철우쯤 되는 벽을 넘어선 고수라면 모를까, 궁도들이 사용하는 빙백신장 따위로는 이무기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듯이, 이무기의 수준으로는 신수인 은룡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같은 속성의 공격이기에 비늘이 뭉개지고 살점이 푹푹 파일 만큼의 타격은 아니었지만, 은룡의 공격은 확실하게 이무기에게 통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이무기가 천화를 뱉어냈고, 주인임을 인식하기 때문인지 은룡이 부리는 물줄기들은 천화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설영! 괜찮아?”
감탄하는 것도 잠시. 천화는 얼른 설영에게 달려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당한 내상을 입은 모양이지만 다행히 뼈가 부러지거나 호흡이 끊길 정도는 아니었다. 요상단을 먹고 운기를 하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을 정도의 타격임을 확인하고, 손짓으로 북해빙궁의 무인들을 불렀다. 엉망이된 설영과 나예린을 그들에게 맡기고 서둘러 전선으로 복귀했다.
“쀼웃!!!”
콰앙! 쾅! 쾅!! 전투는 여전히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은룡이 두들겼고, 이무기는 얻어맞았다. 덩치로 보자면 수백, 아니 수천 배까지도 차이가 나는 둘이었지만 우습게도 몰아치는 것은 은룡의 쪽이었다.
‘좋지 않군.’
허나 그것도 마냥 낙관적으로만 보기는 어려웠다. 보다 상위의 능력을 지닌 존재라지만 이만한 힘을 다루기에는 버거웠는지 슬슬 은룡이 지쳐가는 것이 눈에 보인 까닭이다. 이대로 은룡이 이무기를 쓰러뜨리거나 내쫓을 수도 있겠지만, 저항이 계속될 경우 오히려 은룡이 먼저 지쳐 쓰러질 수도 있었다.
[크하하하! 모처럼 힘이 넘치는구나!!!]
그런 이쪽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혈마검이 잔뜩 취해 날뛰고 있었지만, 역할은 다하고 있으니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 모두를 호수 밖으로 물린 천화가 은룡의 곁에 섰다. 다시 놈의 입안으로 뛰어들든, 다를 수든 내든 이제는 혼자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무리가 되더라도 해야 한다. 이 정도로 영악한, 신수에 가까운 영물이라면, 만약 여기서 살아 도망칠 경우 다시 찾기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기운을 기억했다가, 접근하기만 해도 도망을 치고 그들이 떠난 다음에는 마음껏 북해인들에게 분풀이를 할 테니, 이전보다 못한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천화는 무명검을 고쳐쥐었다. 무형신보를 밟으며 놈에게도 짓쳐들었다.
“쀼웃!!!”
쿠화아아아아-!!! 그런 천화를 보조하듯 은룡이 더욱 힘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갑작스런 은룡의 등장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이무기도 이제는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체구에서 나오는 방어력과 생명력이 아니었다면 일대일로 겨루어도 은룡의 압승으로 끝났겠지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인지 어떻게든 방어에 나서는 것이다. 일부는 몸으로 때우고, 일부는 똑같이 물줄기를 일으켜 상쇄시키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실제 은룡이 놈을 몰아붙이고는 있지만 치명적인 피해는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길게 끄면 수세에 몰리는 것은 이쪽이 될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렇다면…… 단번에 간다!’
그렇기에 천화도 발걸음에 힘을 더했다. 은룡이 세밀하게 조종하고 있다지만, 턱밑이 뚫려나간 고통을 기억하는지 이무기 또한 천화를 견제해왔기에 고인물의 눈으로 최적의 동선을 찾아낸 뒤, 가젤처럼 튀어올랐다. 놈에게 가까워져갔다.
“비뢰만리!”
적당한 거리에 이르자 비영검을 먼저 날려보냈다.
“캬학!!”
그런 작은 비검쯤은 물줄기로 방어할 필요도 없다는 듯, 녀석이 기합을 내질러 튕겨내려 했다. 하지만 비영검은 평범한 검이 아니다. 무려 운철과 만년한철을 섞어만든 패왕 등급의 검이었기에, 충격파에 가까운 놈의 기합을 뚫고 몸에 틀어박히는 데 성공했다.
“은룡아, 지원 부탁해!!”
그와 동시에 천화의 몸도 뛰어올랐다. 거미줄처럼 뿜어낸 비영사를 빨아들이듯 회수하며 허공으로 날아오른 것이다. 목표는 놈의 턱 밑. 자신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들어간 뒤, 내부에서부터 놈을 끝장내는 것이 목표였다.
‘흑우를 소환해도 좋을 테고.’
지금 밖에서 놈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시선을 끄는 중인 흑우를 뱃속에서 소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터였다. 역소환 후 재소환을 하면 자신의 곁에 나타날 테고, 금강토룡 때와 같이 살점을 뜯어먹어도 괜찮지 않겠나? 그때처럼 이무기가 호수의 물을 들이켜 익사시키려 들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문제는 없다. 이쪽에는 수룡이자 신수인 은룡이 있으니까. 녀석 또한 곁으로 불러들인다면 방어가 될 터였다. 그렇기에 일단 놈의 뱃속으로 무사히 들어가기만 한다면 승리의 확률이 매우 높았다. 산성 위액이 위협적이겠지만, 그 또한 액체이니 은룡이 어떻게든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고 다시 한 번 놈의 턱을 꿰뚫을 기세로 날아들었다.
“쀼쀼!!”
그때, 은룡이 다급한 경고성을 토했다. 그 순간 이무기가 일으킨 물줄기 하나가 선회했다. 강력한 기운이 실린 물줄기가 변칙적으로 방향을 틀어 천화를 노린 것이다. 비영사를 풀어낸다면 속도를 늦출 수 있겠지만, 그럴 경우 자칫 비영검과의 연결이 끊어질 수도 있었다. 검기마저 버텨내는 비영사이지만 준 신수급이라 할 수 있는 이무기의 힘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까불지 마라!!”
허나 천화는 멈추지 않았다. 비영사를 풀거나 더 빠르게 당기는 대신, 무명검을 휘둘러 물줄기를 후려쳤다. 파앙! 갈라내려는 것이 아니다. 천화는 놀랍게도 무명검의 검면으로 물줄기를 때렸다. 그와 동시에 자세를 낮추고 검면을 발로 밟았다. 푸화아악!! 이 세계에는 없는 기술이 펼쳐졌다. 서핑.
검을 발판 삼아, 서핑보드 삼아 역으로 물줄기를 타고 날아오른 것이다. 평범한 검이라면 물줄기에 담긴 내력을 버티지 못했겠지만, 무명검이었으니까.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모습으로 천화의 몸을 안전하게 밀어올렸고, 천화는 더 빠르게 이무기의 머리 부근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극점폭발!”
거기서 다시 도약! 그와 함께 고인물의 전매특허인 장비 교체가 이루어졌다. 발끝에 닿아있는 무명검을 정확한 순간에 소지품창으로 돌렸고, 비영검과 비영사도 마찬가지였다. 장착을 해제하여 소지품창으로 돌림과 동시에 자유로워진 몸을 힘껏 휘돌려 주먹을 내질렀다. 칠성무적권 제삼초. 극점폭발. 단순히 강하게 끌어모은 내공을 일점에 쏟아붓는 것이 아니다. 극점타격이 아닌 폭발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내기를 한계까지 응축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내공이 집중된 주먹이 이무기의 비늘을 뭉개며 파고들었고, 그 순간 응축시켰던 내공이 폭발했다.
‘됐다.’
퍼엉! 천화에게 가격당한 이무기의 입 주면이 터져나갔다. 휑하니 구멍이 뚫린 턱 밑 정도는 아니었지만, 살점이 비산하고 커다란 입이 쩍 벌어졌다. 고오오오오오오오-
“이런 씨……?”
다시 비영검을 날리고 입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막대한 기운이 놈의 목구멍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브레스. 판타지 계열의 게임이었다면 그렇게 표현을 했겠지. 숨결을 내뿜어내듯, 몸 안에서 생성된 물대포가 천화를 정확히 겨냥했다. 이대로 입안으로 들어가려 했다간 그대로 놈이 뿜어낸 물대포에 맞아 곤죽이 되고 말 터였다.
“쀼우우웃!!!”
쿠르르릉!!! 어쩔 수 없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놈의 입에서 멀어지는 순간, 천화의 뒤편에서도 피부가 저릿한 어떤 기운이 뿜어졌다.
“번개?”
강력한 기운의 여파가 아니라 진짜 찌릿한 기운이 천화를 스쳐 이무기에게로 날아간 것이다.
“크와아앙!!!!!”
그 벼락에 적중당한 이무기가 울부짖었다. 지금까지 당한 어떤 공격보다도 크게 고통스러워하며 까맣게 타버렸다.
“허?”
화들짝 놀란 천화가 돌아보자,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은룡의 작은 뿔 위로 하얀 전격의 파편들이 튀고 있었다. 치이이이이익- 쿠웅!!
“쀼우우우…….”
은룡이가 전격의 힘까지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놀라웠지만, 무리를 했는지 몸이 축 늘어졌다. 그와 함께 이무기의 몸도 그대로 빙판 위에 쓰러졌다.
“잘했어. 은룡아.”
더 이상 호수의 물들도 솟아오르지 않았다. 은룡이도 힘이 빠졌지만 이무기 역시 힘이 다한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정신을 부여잡으며 기절을 하거나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무기는 이미 전투 불능의 상태였고, 가볍게 막타만 치면 끝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무기의 내단이라……. 음기가 강하긴 하겠지만 제법 쓸모가 있겠지?’
기진맥진한 채 숨을 몰아쉬는 은룡을 잠시 쉬게 두고, 천화가 이무기에게로 다가갔다.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얼마나 많은 칼질을 해야 숨을 끊어놓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콧등에 박힌 혈마검 때문에 회복은 하지 못할 테니, 난도질을 하다 보면 끝장을 볼 수 있겠지. 그렇게 되면 레벨 업도 왕창할 수 있을 테고, 이무기의 내단까지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영물이라고 모두 내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무기라면 확률이 높을 테니까. 신수에 가까운 수준으로 성장한 영물의 내단이라면, 음기를 상쇄할 무언가를 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폭발적인 내공 상승을 이룰 수도 있을 터였다. 다시 한 번 경지 상승을 맛보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에 가까워질 수는 있겠지. 아직 음기를 제어하지 못해 공청석유도 처박아두고 있는 천화였지만, 영약과 내단은 다다익선이었다. 간만에 해체 솜씨를 보이고, 영물 고기를 먹어보겠다고 생각하며 무명검을 놈에게 들이댔다. 숨통을 끊어놓을 일격을 준비했다.
“쀼웃!!”
“응?”
허나 그때, 문제가 생겼다. 은룡이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천화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러면서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놈을 살려달라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쀼! 쀼!”
“이놈을 살려주라고?”
“쀼!!!”
“안 돼. 이놈은 금덩이…… 북해의 골칫덩이라고.”
“쀼우, 쀼우!”
천화가 가볍게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은룡이는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아무리 이놈을 빈사상태로 만든 것이 은룡이라지만, 이 말을 들어주어야 할까? 내단도 내단이지만 그 살점을 해체하면 어마어마한 양의 고기가 나올 테고, 비늘 또한 훌륭한 갑옷의 재료가 될 수도 있을 텐데? 다행히 아직 놈이 다시 힘을 회복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에 천화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 뜻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놈이 개과천선을 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들이 사라진 뒤 다시 똑같이 변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때 가서 천화가 은룡이와 함께 다시 찾아온다 하더라도 이번처럼 쉬이 찾고 쓰러뜨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내단이나 다른 부산물의 가치는 차치하더라도 지금 끝장 내는 것이 현명했다.
“쀼우!!”
“안 된다니……. 응?”
설령 은룡과의 친밀도가 떨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연신 도리질을 치는 은룡을 넘어 이무기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알림을 확인한 천화가 그대로 굳어져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된다고?’
천화로서도 처음 보는 놀라운 현상에 대한 알림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신수 ‘은룡’이 영물 ‘물의 이무기’를 길들였습니다.] [영물 ‘물의 이무기’가 신수 ‘은룡’의 휘하로 들어갑니다.] [신수 ‘은룡’의 특성에 ‘영물들의 왕’이 추가됩니다.] 길들이기에 성공했다는 알림. 그러나 천화의 반려동물로 등록된 것이 아니었다. 물의 이무기는 은룡에게 길들여서 녀석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었다. 플레이어가 아닌 영물이 다른 영물을 길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천화로서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기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묘한 감각을 통해 물의 이무기와 심령이 연결되었음을 깨달았다. 물의 이무기는 은룡의 부하가 되었지만, 천화는 은룡의 주인이니 알 수 있는 것이다.
“하……. 이게 무슨.”
“쀼쀼!!”
그것보라는 듯 기분 좋게 소리치는 은룡을 돌아보며, 천화는 그저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