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나, 안 해! (2) (173/481)

<173화> 나, 안 해! (2)2021.12.12.

16549490452776.jpg‘아, 저건 얼굴에 집어던져야 제 맛인데.’

따지고 보면 백연 대사야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

16549490452776.jpg‘쫄아서 그런 거 아님. 암튼 아님.’

물론 그의 무위가 구파 장문인 중에서도 수위에 들 정도이긴 하지만, 절대 후환이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16549490452776.jpg“뭐긴요. 보시는 대로죠.

16549490452791.jpg“사표라니, 출사표를 잘못 쓴 건 아닌가?”

16549490452776.jpg“……설마 농담하신 겁니까?”

16549490452791.jpg“크흠.”

역시 아재 개그는 시대를 초월하는 것일까? 근본 없는 농을 던진 백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16549490452791.jpg“어째서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16549490452776.jpg“이미 아실 것 같긴 합니다만, 신뢰할 수 없는 아군을 등 뒤에 두기는 어렵죠.”

하지만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애초에 천화가 임무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따로 들은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였고, 그들이 가짜 서신을 백연 대사에게 가져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화를 견제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으니까. 더불어 그들이 천화에게 망신을 당하고 악감정을 품은 당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천화가 이처럼 반응하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16549490452791.jpg“흐음. 이해하네. 사천당가의 집요함은 누구라도 두려워할 만한 것이니……. 그래서 자네를 멀리 보낸 것이기도 하건만, 그들이 뭔가를 한 모양이군.”

사천당문이 천화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 다행히도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지만 꽤 위협적이었을 테고, 실패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이 더 집요하게 천화를 괴롭히려 들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백연은 안타까워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한을 잊지 않는 사천당문의 집요함은 천화가 불문에 귀의하지 않는 이상, 자신조차도 막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호의 큰 동량이 곤란에 처한 것을 구해줄 수 없음을 통탄했다. 이런 식으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이들이 쓰러진 게 몇 번이던가. 무림에 환멸을 느껴 젊은 나이에 은거해버린 이들이 몇이나 되던가. 어쩌면 그 덕에 구파일방 오대세가라는 세력 구도가 유지되는 것이고, 자신 또한 그 덕을 누리고 있는 것이었지만, 강호명숙이자 어른으로서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16549490452776.jpg“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두려워할 건 제가 아니라 당문이죠.”

하지만 천화는 그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정정해주었다. 서로 척을 지었을 때, 두려워해야 할 쪽은 자신이 아니라 당문일 테니까.

16549490452791.jpg“대단한 자신감이군. 세외인들이 자네에게 친근하게 군다지만, 이곳은 중원일세. 당장 활동하지 않는 도왕의 이름만으로는 당문의 그늘을 벗어나기 힘들 걸세.”

16549490452776.jpg“압니다. 도왕께서 나선다면 당문도 납작 엎드리기야 하겠지만, 그 전에 제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겠죠. 원래 용서가 허락보다 쉬운 법이니, 도왕께서 나서거나 중재한다면 당장 눈앞의 위험이 사라지겠지만 그 전에는 별 짓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16549490452791.jpg“……잘 알고 있군. 자네가 먼저 죽는다면 도왕께서도 당문과 정면으로 대립하지는 못할 걸세. 그분의 무위가 대단하다 한들, 사천당문을 상대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이니까 말이야.”

협박처럼 들리지만 천화를 걱정해주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천화도 반발하는 대신 미소를 지어보였다.

16549490452776.jpg“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저를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광오하다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백연 대사는 어딘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고작해야 개인일 뿐인데, 높게 쳐줘도 절정 급의 무위를 갖춘 후기지수에 불과할 텐데 허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16549490452791.jpg“자네……. 알겠네. 이렇게 되면 자네를 더 붙잡을 수도 없겠군. 부디 조심하게. 자네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방법으로 선을 써올 수도 있음이니.”

16549490452776.jpg“그러시죠. 이 친구도 함께 나갈 겁니다.”

천화가 설영까지 지목했지만, 백연 대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지켜줄 수 없으니 붙잡을 수도 없다. 그들을 위해 정파 연합에서도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당문을 몰아세울 수는 없으니 말이다.

16549490452791.jpg“그리하게. 다만 자네들의 사퇴 사유는 내가 임의로 처리를 해야 할 듯싶은데.”

후기지수 모임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지만, 인룡단장이 첫 임무를 마치자마자 그만둔다는 것은 정파 연합으로서도 부담이 있을 터였기에 천화는 흔쾌히 수락했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백연 대사라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 줄 수 있을 테니까. 약간이나마 명성에 누가 될 말이 나올 수도 있고, 당문 등 자신과 사이가 좋지 못한 문파들이 음해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하지만 세외의 세력이나 도왕의 이름 때문에라도 어느 정도 선은 지킬 테니, 상관없었다. 결국 이 바닥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니까. 정 억울하거나 열이 받으면 그들을 찍소리도 못하도록 만들 만한 힘을 갖추면 그만이었다.

16549490452791.jpg“그럼, 이제 무엇을 할 텐가? 설마, 사천당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라도 할 생각인가?”

16549490452776.jpg“뭐, 못할 건 없겠죠. 하지만 일단…….”

백연 대사의 안타까운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받으며 천화가 씨익 웃었다. 예상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16549490452776.jpg“무공을 익힐 겁니다.”

16549490452791.jpg“무공을?”

이미 절정의 무위를 갖춘 천화인데 무공을 익힌다? 백연 대사는 그저 수행을 쌓겠다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천화의 말은 사실 문자 그대로였다. 좀 더 정확히는 ‘독문 무공’을 익히겠다는 것이었지만.

16549490452776.jpg‘이제 슬슬 익힐 때가 됐지. 몇 가지만 더 준비한다면…….’

당장은 독을 무효화시키는 은룡이 있다 해도 사천당문을 향해 쳐들어가는 것이 어렵다. 은룡이의 힘도 무한한 것은 아니니, 그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면 결국 해독이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까지 익혀낸다면 어떨까? 무신지로에는 수많은 고인물들이 있었지만, 천화를 그중에서도 랭킹 1위로 만들어주었던 바로 그 무공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무공의 경지부터가 달라질 테니 충분히 단신으로 당문에, 사천성 전체에 싸움을 걸어볼 만했다. 본래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천천히 쌓아올릴 생각이었지만, 당문뿐 아니라 마교의 걸음도 빨라지고 있으니 이쯤에서 자신도 발맞춰 속도를 높이는 것도 좋겠지.

16549490452776.jpg“예. 그럼 저희는 이만 나가봐도 되겠죠?”

끄덕 백연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천화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역시 이런 자리는 자신과 맞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상석에 앉아 모두를 내려다보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16549490452776.jpg“아참, 당문이 혹 서신을 가져오거든, 첫 글자만 읽어보라고 전해주십시오.”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돌아서며 백연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세로 드립. 아니, 세로로 글을 적는 이곳에서는 가로 드립이라고 불러야 하려나? 천화가 가짜로 적어 개방을 통해 넘긴 서신은 그 내용이 애초부터 별것이 없던 까닭에 원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앞글자만 읽어보면 천화가 숨겨놓은 글을 읽을 수 있게끔 쓰여진 것이다. 암호까지는 아니지만 재미난 장난이었다. 받은 이들은 부들부들거리겠지만 말이다.

16549490452776.jpg‘찰진 욕은 역시 현대인들이 한 수 위지.’

덕분에 속이 편안해진 천화는 설영, 흑우, 은룡과 함께 전각을 빠져나왔다. 야수궁주만 잠시 만나본 뒤, 곧장 목적지를 향해 이동할 참이었다.

16549490483272.jpg“우리도 슬슬 돌아가야겠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어. 그나저나 자네는 다시 만날 때마다 큰 성장을 이루어내는군. 다음에도 기대를 해봐도 되겠나?”

16549490452776.jpg“물론입니다. 그때는 정말 입을 못 다무실걸요.”

씨익 세주안과 천화가 서로를 보며 마주 웃었다. 백연 대사와의 면담 후 바로 이어진 야수궁주와의 만남에서는 큰 소득이랄 것이 없었다. 세주안은 빙궁주마저 친구로 만들어버린 천화의 능력에 감탄했고, 이무기를 길들인 은룡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애초에 북해빙궁과 거리가 멀 뿐이지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아닌지라, 나중에 한번 방문해 보아야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천화와 설영도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이야기에 남만으로 올 것을 제안하긴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지금 가야 할 곳은 딱 정해져 있으니까.

1654949048328.jpg“아빠, 제발……!”

16549490483272.jpg“안 돼. 그리고 또 가출을 했다간 정말 제대로 혼쭐이 날 줄 알 거라. 롱롱이 너도, 이 녀석 도와주면 그때는 제대로 벌을 받아야 할 거다.”

그 과정에서 세주연이 계속해서 천화와 같이 강호행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간단히 무시당했다. 당장 벌을 받다가 도망치듯 가출을 해버린 그녀가 아니던가? 적어도 이전의 벌과 이번의 벌을 합쳐서 치르기 전까지는 남만에 붙들려 꼼짝할 수 없을 터였다.

1654949048328.jpg“히잉……. 공자님, 소녀가 보고 싶으시더라도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셔요.”

마치 천화 자신을 정인인 양 이야기하는 세주연의 모습에 조금 난처하기는 했지만, 곧 제압당해 끌려간 덕분에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 다시 떠날 시간이었다.

16549490505931.jpg“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이전에는 천화가 어디로 간다고 말하면 설영은 뭔가 생각하곤 했는데, 혈마검을 봉인하고 홀가분해진 것인지 이번에는 딱히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순수한 궁금증일 뿐,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다는 반응이랄까?

16549490505935.jpg

  혈마검이 사라지며 혈마화를 할 수 없게 되기는 했지만, 병기의 이점 자체로는 크게 뒤지지 않는 보검 ‘서리’를 얻은 까닭에 무공이 약해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통짜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무려 패왕 등급의 보검이었으니까. 혈마화를 통한 강제적인 경지 상승은 사라졌어도, 이미 절정 수위에 다다른 무공까지 약해진 건 아니라는 소리다. 그것만으로도 무림에서 충분히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강자라고 부를 수 있으니까.

16549490452776.jpg“우리 바다나 보러 갈까? 오빠 믿지?”

하지만 천화는 정확한 장소를 말하는 대신 수상쩍은 말만 던질 뿐이었다. 농담이기도 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말할 경우 누군가 엿듣고 정보를 흘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6549490452776.jpg‘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알면 헛짓거리를 하지 못하겠지만…… 그걸 안 하면 이놈들이 아니지.’

이렇게 해도 어떻게든 정보를 알아내어 감시를 붙이든, 훼방을 놓든, 그도 아니면 습격을 해 오든 하겠지만, 사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말을 조심하는 건, 당장의 귀찮음을 약간 덜기 위해서일 뿐.

16549490452776.jpg“흑우야, 가자!”

1654949050595.jpg“무우우우우!!”

세주안과 세주연을 배웅한 뒤, 설영을 뒤에 태운 천화가 발을 구르자 흑우가 길게 소리를 지르며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감시의 눈길들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지만, 과연 그것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16549490452776.jpg“오늘 내에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배터질 때까지 고기를 먹여준다!”

1654949050595.jpg“무히히히히힛!!!!”

투다다다다다다다다다- 그 말에 흑우가 콧김을 내뿜으며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체력이라면 하루 종일 전력질주를 하고도 여유가 있겠지. 덕분에 뒤쪽이 어수선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천화를 따라붙기 위해서는 그들도 전력을 다해 달려야 하는 것이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개고생을 할 그들을 향해 히죽 웃어보인 천화가 흑우를 재촉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거짓말처럼 숭산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 숭산에서 내려온 천화와 설영은 그대로 곧장 남하했다. 목적지로 향하기 전, 일단 무한에 들러 대장장이에게 맡겼던 물건을 챙겼다.

16549490452776.jpg‘오, 잘 빠졌네.’

  [북두의 검][패왕] 무려 패왕 등급의 장검. 사실 공격력만 보자면 설영의 새로운 만년한철제 무기인 ‘서리’에 비해 뒤지지만, 삿된 기운을 파괴하는 운석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삿된 기운을 가진 상대와 싸우거나 주술, 진법 따위를 갈라내고 이겨내는 것에는 훨씬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겠지. 특수한 조건에서 진정한 패왕급의 힘을 발휘하는 무기라는 뜻이다.

16549490452776.jpg‘이러면 잠시 가지고 있는 것도 괜찮겠군.’

원래 천화는 이것을 얻는 대로 고불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그가 익힌 내공과 운철의 기운이 묘하게 공명을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승의 경지로 가는 데 도움을 줄 테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검이 잘 빠졌다면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어차피 당장 고불이 마교와 싸울 것도 아니고, 소수 민족의 통합과 안정화가 중요한 상황이니 미리 조치해둔 대로 만금상단을 통한 식량과 생필품 지원만 하더라도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겠지.

16549490452776.jpg“꽉 잡아. 이제 진짜 달린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천화는 소지품창에 잘 넣어둔 뒤, 다시 흑우를 재촉해 길을 떠났다. 보다 더 남쪽으로. 무한이 위치한 호북성을 지나 강서성까지 넘어 계속해서 달렸다. 누구도 익힐 수 없었기에 자신의 독문 무공이 되었던 그것이 기다리는 복건성을 향하여.

1654949051982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