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해적은 좋은 경험치 공급원이죠 (1)2021.12.21.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 피를 뽑지 않으려는 흑우와 극적 타협을 이룬 천화는 간신히 한 사발의 피를 뽑아 입안에 털어넣었다. 그와 함께 시린 냉기가 몸속을 타고 돌았다.
‘미친……. 대체 공청석유를 얼마나 퍼마신 거야?!’
내공이 약했다면 대처를 하기도 전에 장기가 얼어버렸을 테고, 내공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제대로 운기하지 못한다면 혈맥이 얼고 막혀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터였다. 공청석유를 고작 한 모금 들이켰던 것이 아닌 듯, 이제는 꽤 희석이 된 상태일 텐데도 천화는 내부가 얼고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천화만변무상심법에 따라 새로 유입된 기운을 다스리고 변화시켰다.
“쀼우!!”
가부좌를 튼 천화의 몸이 팽창했다. 몸이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내공이 들어찬 것이다. 그러고도 여력이 남았던지 금방이라도 피부가 찢어지고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천화, 버텨야 해!”
그런 천화의 상태가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에 은룡을 제외한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흑우가 걱정스레 천화를 바라보았고, 설영은 천화의 상태가 신경 쓰였지만 주위를 경계하며 호법을 섰다. 천화라면 이겨내겠지. 믿는 수밖에 없으니까. 이를 악물고 운기하는 천화의 머리 위로 은룡이 빠르게 기어올랐다. 길게 울음을 내뱉자 밝은 빛과 함께 평온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 되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천화의 의지와 능력.
‘이까짓 기운 따위에 질 것 같으냐!!’
그런 면에서 천화는 최고였다. 한때 고금제일인의 칭호를 얻었던 이. 폭발적으로 불어난 내공을 제 의지에 따라 통제하기 시작했다.
“쀼!!”
부풀어오르던 천화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팽창을 멈추었다. 천화만변무상심법에 따라 단전으로 갈무리되며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몸은 다시 부풀어올랐고 팽창과 수축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아…….”
천화가 하얀 김을 내뿜으며 감았던 눈을 뜬 것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시작한 지 약 한 시진이 지난 뒤였다.
“이 새끼, 대체 얼마나 쳐먹었길래…….”
“무히히힛!!!”
이제 멀쩡해 보이는 모습에 눈총을 받은 흑우가 바보같이 웃었지만, 천화는 진심으로 놀라는 중이었다. 아무리 천고의 영약인 공청석유를 먹었다지만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일 테니 피 속에 흐르는 영약의 기운이 많이 옅어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라면 흑우가 대체 얼만큼의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별호 : 최절정 고수를 획득하셨습니다.] [한서불침에 이르셨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막대한 내공을 얻은 것도 사실이었다. 지독한 냉기를 견디고, 몸 안에 극음의 기운을 일부 품음으로서 더위와 추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한서불침까지 얻었으니까. 더불어 절정 고수가 품을 수 있는 최대한의 내공 한도까지 내공을 획득하는 것을 넘어, 그보다 한발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별호 : 초절정 고수를 획득하셨습니다.] 몸이 터질 듯 부풀어오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몸이 견딜 수 있는, 하단전이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내공을 채워넣은 것. 그러고도 내공이 남아 문제였지만 천화는 그것을 전신 세맥에 퍼트리고, 나아가 중단전과 상단전에 밀어넣는 것으로 해결했다. 만약 천화가 일반적인 절정 수준의 무인이었다면 남아도는 내공을 어찌하지 못하고 몸이 터져 죽어버렸거나, 몸 밖으로 배출하며 아깝게 유실시켜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걸어본 길이었다. 최절정을 넘어 다음의 경지로 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발을 내딛은 결과였다.
“너 대체……?”
그렇게 훌훌 털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천화를 보며 설영이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경지 자체가 가늠이 되지 않았으니까. 이전에는 천화에게 특별한 힘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긴 했어도, 적어도 내공의 경지에서는 자신이 앞섰다. 내공을 다룸에 있어서는 천화가 조금 더 나을지 몰라도, 내공의 절대량만은 확실히 우위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허나 이제는 깜깜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절벽이 솟아오른 듯, 그 끝이 보이지도 가늠되지도 않는 모습에 눈만 껌벅거렸다.
“혹여나 아직은 도전할 생각하지 마. 혈마검의 도움이 있다면 모를까, 지금 상태로는 무리니까.”
“……그렇겠지.”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혈마검이 도와주었다면 자신 역시 가능했을지 모를 일이라는 소리였다. 혈마신공의 특성상 순수한 내공만으로 따지자면 곧 최절정의 경지가 닿을 것이라 예상하던 설영이었기에, 심마는 더 크게 찾아왔다.
“왜, 후회해?”
“아니. 전혀.”
아쉽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천화가 두 단계나 급성장하며 벽을 넘어 강해진 것은 아찔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자신도 만만치는 않으니까. 혈마검이 없더라도 혈마신공은 능히 화경을 바라볼 수 있는 절대의 무공이다. 따라잡혔다면, 다시 따라잡으면 그만이었다. 자신은 그의 호위무사이니까.
“두고 봐. 금방 다시 따라잡아주고 말 테니까.”
“흠, 그런 플래그는 좋지 않은데.”
“또 무슨 소리야?”
천화가 실없이 대꾸했지만 어쨌든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지며 경계를 풀었다. 천화 역시 고생을 했지만, 호법을 서는 것 역시 상당한 심력소모를 요하는 일이었으니까. 더구나 지금처럼 위험한 기운들이 주변에 쫙 깔린 상태에서는 말이다.
“천화.”
“알아. 그리고 아는 친구들인 것 같네.”
지금의 설영으로서는 천화의 경지를 쉬이 짐작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감지한 것을 그가 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렇기에 굳이 주변에 강한 기운들이 모여들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헌데 아는 친구들이라니. 대체 누구일까?
“잠시만 나갔다 올게. 금방 돌아올 거야.”
“으흠. 알겠어.”
설영은 따라나설까 하다가, 침상에 주저앉았다. 지금이라면 적어도 천화가 위험할 만한 일은 없을 테니까. 저벅 저벅 그렇게 객실 밖으로 나온 천화는 가만히 1층으로 내려갔다. 이어 수상한 이들이 섞인 식당에 눈길을 한 번 슥 준 뒤, 아예 객잔의 밖으로 나섰다.
‘일단은 사람이 적은 편이 좋겠지.’
조용히 따라나서는 이들의 기척을 느끼며, 적당히 속도를 조절해 어딘가로 이동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이르러서야 멈추어섰다.
“흠,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웬 놈이냐.”
“그건 뒤를 밟은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오면서 착용한 것인지 검은 복면을 착용한 이들이 흉흉한 기세로 물었지만, 천화는 능청맞게 대답할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해남파에 대한 정보를 캐고 다니는 것이지?”
“뭐, 내가 심마니도 아니고 캐내지는 않았는데. 그저 하오문에 간단한 의뢰를 했을 뿐이라구?”
스르릉! 그 말에 놈들이 먼저 검을 빼들었다. 해남파에서 온 자들. 한때 용왕채라는 이름의 수적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그들의 정체였다. 복건성으로 가라고는 했지만, 그들이 자리 잡은 게 정확히 어디인지는 천화로서도 알지 못했다. 그저 물을 좋아하는 놈들이니 바닷가와 인접한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하오문에 의뢰를 했는데, 아무래도 정보가 새어나간 모양이었다.
“자, 이렇게 하면 알겠나?”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듯 분위기가 흉흉했지만,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천화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남만에서 주로 사용하는 영물의 탈을 뒤집어썼다. 그들이 기억하는 자신은 바로 이 모습이니까.
“당신은……?!”
“은인을 뵙습니다!”
그와 동시에 복면인들이 칼을 거두고 일제히 부복했다. 천화가 그때의 그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천화의 맨 얼굴을 본 것은 그들로서도 처음이었지만, 이미 반로환동의 고수쯤으로 믿고 있는 터라 개의치 않았다. 또한 그가 전해준 진 남해삼십육검 역시 익히며 매일같이 감탄하고 있지 않았던가? 때문에 이전보다 다들 무공 수위가 높아진 상태였고, 제법 여유를 찾아 하오문이 자신들을 수소문하는 것까지 파악하고 역으로 천화를 찾아올 수 있었다.
“그래. 다시 보니 반갑군.”
“저희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그렇다.”
간단히 건넨 인사에 그들이 감격스레 대꾸하자, 천화는 약간의 거짓말을 섞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이용하고 더 수월히 다루기 위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그것이 그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터였다.
“어쩐 일로……. 혹, 저희를 도와주시려는 겁니까?”
그래서일까? 그들의 눈빛이 순간 불타올랐다. 진 남해삼십육검이라는 비급까지 전해주고, 이곳을 점지해준 그가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은 한 가지 추측으로 이어졌다. 남해도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해남파를 다시 되찾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힘을 키우던 그들이기에, 사실 천화의 뜻이야 어떠하든 오직 하나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 주인이 너무 집을 오래 비우면 개가 주인 행세를 하는 법이지.”
천화도 그 장단에 맞춰주었다.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으니까. 어차피 그대로 둔다면 현재 해남파를 장악한 이들은 마교 쪽에 붙게 될 테고, 중원 무림에 큰 타격을 주게 된다. 물론 그것을 이용해 정사대전을 촉발시킬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들 하나가 협력하지 않는다고 일어나지 않을 정사대전도 아니니, 애초에 접수해두면 꽤 괜찮은 전선이 형성될 터였다. 남해도와 남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그 둘이 협력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남쪽의 패권은 손에 쥘 수 있을 테고, 거기에 그보다 살짝 북쪽에 위치한 고불과 소수민족들까지 협력한다면 제3의 진영조차 만들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해봐야겠지.”
“예?”
“이건 남이 떠먹여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설혹 잠시 해남파를 되찾는다 해도 금방 비슷한 일이 일어나겠지.”
그러나 그들이 바라는 대로 거저 먹을 수 있게 해줄 생각은 없었다. 자리를 얻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니까.
“소문주, 아니 이제 문주인가? 그를 불러와라. 자격이 있다면, 함께 일을 도모해볼 수도 있겠지.”
“예!!!”
“그럼 내일 다시 보도록 하지.”
해남파의 인원들이 희망으로 불타올랐다. 힘이 넘치는 대답과 함께 서둘러 자신들의 본거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수련은 제법 열심히 했나 보군.’
그들의 표횰한 신법을 보며 천화는 제법 만족했다. 해남파의 정예 중 정예들이라 할 수 있는 데다, 자신이 건네준 비급까지 성실히 익혔는지 무공의 수위들도 제법 높아져 있으니 몰이꾼으로는 딱이라고나 할까? 내공의 급상승으로 절정을 초월한 압도적인 무력을 손에 넣은 천화였지만, 그들을 이용한 경험치 노가다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레벨 업에 따른 능력치 상승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300레벨 달성 특전이 필요했으니까. 100레벨과 200레벨 때 획득한 무공 진화가 아닌, 또 다른 특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천화는 어떻게든 그것을 달성할 생각이었다. 그것을 통해 독문 무공인 무상천검을 완성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해적들과 해남파의 잔당들을 이용할 참이었다. 시험. 준비 상태를 시험한다는 아주 훌륭한 명분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다만 시험 문제가 몇 개일지, 채점은 어떻게 할지. 그건 전적으로 시험 문제는 내는 쪽의 마음이 아니겠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덕분에 그들은 잔뜩 구르게 되겠지만, 그 정도로 해남파 장문인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남는 장사일 터였다. 때문에 천화는 전혀 죄책감을 갖지 않았다.
‘어차피 가는 길목이니, 겸사겸사 나쁘지 않겠어.’
그들을 바짝 굴려 300레벨을 달성한 뒤, 해안을 따라 남해도로 이동할 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쪽으로 비스듬히 북상한다면 다음 목표가 나타난다. 사천당문. 힘을 되찾는 대로, 감히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낸 그들에게 제대로 값을 치르게 해줄 참이었다.
‘너넨 다 뒈졌다.’
지금도 충분히 일전을 걸어볼 만하지만, 좀 더 압도적인 실력차를 보여주기 위해 천화는 잠시 이곳에서 힘을 기르기로 결정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