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해적은 좋은 경험치 공급원이죠 (2)2021.12.23.
“……뭐야, 저 사람들은?”
객잔에서 푹 쉬고 일어난 천화와 설영은 식사를 위해 1층으로 내려가려다가 순간 멈칫거렸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부터, 심하게 부담스러운 눈길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수십 명의 무리들이 있었으니까.
“으흠. 식사하기는 글렀네. 밥 먹는데 저렇게 보고 있으면 분명 체할 테니까.”
아무래도 시간으로 약속을 잡지 않았던 것이 문제인 모양이다. 언제부터 기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객잔 주인의 표정이 영 좋지 못한 걸 보면 꽤 오랫동안 저기에 있던 것 같았다.
“일단 나갑시다.”
결국, 천화는 식사를 잠시 미루고 그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만한 인원이 우르르 모여 있으면 저잣거리라도 오해를 살 수 있었기에, 일단 부두가로 향한 뒤 가만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은인께 인사드립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소문주였다. 그들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정식으로 천화에게 감사를 표한 것이다. 오는 동안 귓속말을 통해 대략의 상황 설명을 들은 설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지 않았지만 꽤나 놀라는 모습이었다.
무려 해남파이니까. 세외사궁이나 구파일방 오대세가까지는 아니지만, 한때 그들과 비견이 될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이들로 알려지지 않았나? 아무리 그 잔당에 불과하다지만 천화를 은인이라 부르며 머리를 조아리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인사는 됐고, 이제부터 시험을 보도록 하지.”
“예. 어떤 식으로 증명해보이면 되겠습니까?”
“마침 적당한 상대가 있군.”
천화는 당장이라도 익힌 무공을 시연해보일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저 먼 바다 위에 떠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예? 저건…… 해적들이로군요.”
천화가 가리킨 방향에는 검은 깃발을 단 배들이 떠있었다. 일반인들의 안력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였지만, 천화와 해남파의 무리들에게는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저들을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해적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만약 약했다면 그 수가 어떻든 진작 토벌되어 얼씬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중원의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긴 하지만, 확실히 무력만 놓고 보자면 중원의 고수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특히 바다 위에서는. 허나 해남파 역시 바다의 패왕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상대를 확인하고도 누구하나 주눅들거나 겁을 먹은 기색이 없었고, 당장이라도 천화가 지시만 내리면 바다로 뛰어들어 그들을 도륙할 기세였다.
“그래. 하지만 잠시 기다리도록.”
“알겠습니다.”
천화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그들을 잠시 제지했다. 저 먼 바다에 있는 놈들을 처리해봤자 별 의미는 없으니까. 이왕 하는 것, 생색은 좀 내야 하지 않겠나?
“해적이다! 해적이 나타났다!!!”
“도망쳐!!”
“관군, 관군을 불러와!!”
잠시 기다리자 곧 항구가 소란스럽게 변했다. 어느새 해적선들이 일반인들의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것이다. 조금 있으면 해적선이 항구에 닿을 터였다. 그때 과연 놈들이 보급 따위만을 하고 떠날까? 그럴 리가. 놈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노략질이었고, 이미 복주를 비롯해 주변 여러 도시들이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놈들의 접근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이들은 없었다. 출항을 준비하던 어선의 선원들이 혼비백산 달아나기 시작했고, 몇몇은 관군을 부르기 위해 관아로 달려갔다.
‘소용없는 짓이겠지만.’
하지만 의미 없는 일이다. 관아에서도 인원을 보내기는 하겠지만, 그들을 막는 것은 쉽지 않다. 무공 실력의 차이도 차이겠지만, 진짜 전투가 일어나는 것은 저 위이니까.
“쏴라! 배를 격추시켜라!!”
해적선이 항구에 닿기 전, 몇 척의 배가 그들을 막아섰다. 복주를 지키기 위해 배치된 관군의 배였다.
“크아아악!!”
“제길, 화살이 통하지 않는다니!”
그들은 활을 쏘며 해적들을 견제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고작 화살 따위로 잡아내기에는 해적들의 무공이 제법 고강한 탓이었다. 화살에 내기를 실을 줄 아는 궁사의 일격이 아닌 이상에야, 아무리 많은 화살을 날린다 한들 의미가 없었다. 배에 꽂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배에 구멍을 뚫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제대로 된 피해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반면 해적들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같은 화살을 쏘아도 관군으로서는 막아낼 실력이 되지 않고, 혹여 내공을 실은 투척이라도 한다면 배에 숭숭 구멍이 뚫려버리니, 백병전을 펼치기도 전에 관문의 배가 침몰할 판이었다.
‘아직인가 보군.’
최근 해적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에 황실에서도 주시하고 있다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지 제대로 지원하여 해적 소탕에 나서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슬슬 나서볼까?’
덕분에 민간의 피해가 적지 않을 테지만 천화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관군이 증원되고 다수의 범선을 끌어모을 경우,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방어선 구축이 가능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나설 상황이 많이 줄어들지 않겠나? 해적들을 소탕하고 경험치와 명성을 올릴 생각이던 천화의 입장에서는 미적지근한 관군의 대응이 오히려 반가웠다.
“저놈들이 항구에 닿기 전에 처리하는 걸로 하지.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해적선은 고작해야 세 척. 많다면 많다고 볼 수 있었지만, 복주의 해군 병력이 적기에 가능한 것이지 무모하리만큼 적은 숫자라고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저들 역시 해적단이라기보다는 소수 부대라거나 해적단에서 떨어져나온 떨거지들 정도로 보아야겠지. 그렇다 할지라도 상대할 이가 많지 않은 이곳에서는 폭군처럼 굴 수 있을 테지만 말이다.
“뭐해? 시작해.”
“예!”
천화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표횰한 신법으로 날아오르더니 일부는 물 위를 달리고, 일부는 잠수를 하여 해적선으로 다가갔다. 딱히 대화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각자의 역할을 나눈 것이다.
“뭐야? 저놈들은?!”
갑작스런 그들의 난입에 해적과 관군이 함께 놀랐다. 무언가 물에 빠지는 소리만 들었을 뿐, 잠영 중인 이들까지 모두 파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물위를 달려오는 이들만 하더라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수상비라는 것은 무림인들 중에서도 상당한 고수들만 사용 가능한 것이니까.
“사격 중지! 방어를 굳히고 잠시 대기하라!”
그때 관군 쪽의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해남파 무리의 진행 방향이 자신들이 아닌 해적선 쪽이었기에, 잠시 화살을 쏘아내던 것을 멈추고 수비에 집중한 것이다. 어차피 통하지 않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들이 아군처럼 보이니 잠시 상황을 살피며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자신들의 공격이야 어차피 저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차핫!!”
“오오오오!!!”
그사이, 해적들은 관군 대신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이들을 향해 화살을 쏘고, 돌이나 쇠구슬 따위를 투척했다. 아군이 아닌 이상, 적으로 보는 것이 옳았으니까. 허나, 물 위를 달리는 자들은 조금 전 해적들이 그러했듯 아주 가볍게 그것들을 쳐냈다.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배 위로 뛰어올랐다.
“죽여라!!”
피워내는 기세부터가 심상치 않은 해적들이 각자 무기를 꼬나쥐었다. 이미 배에 올라탔으니 백병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 더 많은 이들이 올라오기 전에, 상대를 쓰러뜨리고 배 위로 뛰어오르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감히 해적들 따위가 걸림돌이 될 순 없지!”
쿠웅! 선두에 서서 물위를 달리던 소문주가 크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결코 작지 않은 범선인 해적선이 순간 출렁거렸다. 모두가 균형을 잃어버렸고, 그렇게 생겨낸 틈을 딛고 그가 미끄러져갔다. 검을 휘둘렀다.
“크악!!”
“조심해라! 수상전에 익숙한 놈들이다!!”
출렁거리는 배의 움직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 그것만으로 해적들은 상대가 수상전에 익숙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렇다 한들 바뀌는 것은 없다. 죽거나, 죽이거나. 자칫하면 이 간단한 전투에 해남파의 명운이 걸릴 수도 있었기에, 해남파 무인들은 한 치의 방심도 없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서 해적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영광으로 알고 죽거라. 이것이 남해삼십육검이다.”
무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진각이다. 진각을 제대로 밟지 못해 몸과 힘의 중심이 조금만 어긋나도 위력이 급감하고 빈틈이 생겨나기 마련이기에, 진각을 제대로 디딜 수 있는 바닥의 굳건함은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해남파의 보법은 해일에 가까운 파도 위에서도 진각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변화에 유연했다. 쿠웅! 진각이 갑판을 때리고, 그때마다 해남파의 무인들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상대의 목을 따거나, 점점 거세지는 파도와 같은 연격을 펼쳐냈다. 해적들이 수세에 몰리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 그들 역시 바다에, 수상전에 능숙한 수상전의 전문가쯤 된다지만 이쪽은 해왕(海王)이다. 몇 대를 이어 바다에서 생활하며 무공에서조차 바다를 닮으려 했던 해남파의 절초들이 그들을 유린했다. 빠르게 숫자를 줄여갔다.
“으악!!”
“배가 침몰한다!!”
쿠웅!! 하지만 활약하는 것은 선상에 뛰어오른 이들만이 아니었다. 물속으로 잠수한 해남파의 무인들은 배의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침몰을 유도하고 있었다. 물론 해적들 역시 수공을 익혔을 테니, 그저 물에 빠지는 것만으로 무력화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망망대해를 헤엄쳐 도망갈 수는 없는 법이다. 힘이 빠져 죽고 싶지 않다면 관군의 배에 오르거나, 뭍으로 헤엄을 쳐 올라야 할 터. 그렇게 되면 힘이 빠진 놈들을 건져 올리고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 이전에 물속에 도사리고 있던 이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겠지만. 물속이든 바깥이든, 물에서라면 가히 최강을 논할 수 있는 해남파의 진수를 그들이 보이고 있었다.
‘나만 놀고 있을 수는 없지!’
그때, 조용히 그들을 뒤따르던 천화가 눈을 빛냈다. 은잠무영보에 수상비의 묘리를 섞은 탓에, 물 위를 달리면서도 기척이 거의 없어 해남파의 무인들조차 일부는 천화가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휘리릭- 퍼억!
“뭐, 뭐야. 저건?!”
천화가 쏘아낸 비영검이 서둘러 뱃머리를 돌리려던 해적선의 후미에 꽂혔다. 그와 함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천화의 몸. 무려 10장여를 뛰어오른 천화가 그대로 갑판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사후폭염진.”
용호십삼검. 제구초. 사후폭염진. 콰과과과과광!!!! 천화가 하늘에서 떨어지며 그대로 갑판 위에 무명검을 꽂아넣었다. 천무십이검도 강하지만, 파괴력과 범위 공격이라면 용호십삼검도 만만치 않다. 용호십삼검 상의 초식 중 하나인 사후폭염진이 발동하며 그대로 갑판 전체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막대한 내기를 이용해 일정 반경을 폭발시키는 일종의 광역기였지만, 열공참보다도 막대한 내기를 소모하는 까닭에 그동안 펼치지 못하고 있던 초식이기도 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바로 이 맛이지.’
이제 유령선이 되어버린 해적선 위에서 천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배 한 척을 파괴하는 것으로 무려 2레벨을 올렸다. 해적들이 초식에 휩쓸려 죽어나갔고, 해적선 자체에 걸린 경험치까지 먹어치운 덕분이었지만 이 정도면 꽤 순조로운 출발이 아닐 수 없었다. 흑우의 피를 한 사발 들이켠 덕분에 천화의 레벨은 이미 267에 달하고 있었으니까. 레벨이 높아질수록 다음 레벨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경험치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천화가 날듯이 뛰어들어간 해적선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자 화들짝 놀란 이들이 몰려왔지만, 곧 천화의 옷자락 하나 타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리고 두려움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해적선을 폭파시킨 것이 천화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적이라면 두렵겠지만 아군이라면, 이만한 고수가 자신들을 돕는다면 해남파의 수복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만 같았다.
“남은 놈들을 한곳에 모으도록.”
“예!!”
천화의 지시에 다시 해남파 무인들이 바빠졌다. 전의를 상실한 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자들과,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들, 의식을 잃은 채 물 위로 떠오르는 자들까지 모두 제압하고 수거하기 시작했다. 저들만 몽땅 죽여도 상당한 경험치를 쌓을 수 있겠지만, 천화는 아쉬워하면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더 큰 물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같은 것이니까.’
대신 저들을 이용해 해적들의 씨를 말릴 기틀을 마련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