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흑우의 신위 (2)2021.12.30.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언성을 높이느냐!”
황광이 다시 한 번 발끈했으나 진왕의 바로 곁에 있는 호위에게 제지당했다. 무위로 보나, 호위로서의 지위로 보나 그녀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왕의 눈치를 보기 때문인지 일단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부들거리는 것이 눈빛으로 사람을 잡아먹을 기세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영물처럼 보이기는 한다만, 이들은 무림의 기준으로 절정 고수라 불려 마땅한 경지에 올랐다. 정말 괜찮겠느냐?”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좋다. 한번 겨루어보거라.”
진왕이 판을 깔자 곁에 있던 다른 세 명의 호위도 앞으로 나섰다. 가장 실력자인 여성 호위는 진왕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나서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이미 자존심이 많이 상한 듯 저마다 기세를 뿜어내며 자리를 잡았다. 진왕의 호위가 저들뿐인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한낱 미물 따위를 앞세운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마치 그 다음은 너다라고 말하는 눈빛이었지만 천화는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다음 같은 건 없을 테니까. 더불어 흑우가 다치는 일 따위도 없을 테니까.
‘응. 너넨 안 돼.’
이전에는 몰랐지만, 녀석의 피를 마시고 경지를 뛰어넘으면서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흑우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를.
“덤벼보거라.”
차마 무인의 자존심상 선공을 취할 수 없다는 듯, 황광과 호위무사들은 한데 뭉쳐 자리를 잡은 채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천화가 흑우를 바라보았다. 놈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심드렁한 눈으로 돌아보는 흑우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이기면 오늘 밤, 고기 무제한.”
“무후훗!!!!”
그 말에 흑우의 눈이 돌아갔다. 푹 하고 크게 콧김을 내뿜으며 앞발로 땅을 긁었다. 돌진 준비. 허나 그보다 먼저 시린 기운이 주변에 퍼져나갔다. [영물 흑우가 ‘빙한지대’를 사용했습니다.] [일정 반경의 모든 것들이 얼어붙습니다.] 땅이 굳었다. 일정 반경 안에 위치한 모든 것에 서리 같은 하얀 기운이 내려앉았다.
“읏?”
그것은 상대인 호위무사들의 몸 역시 마찬가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른 내공을 피워올리며 몸이 굳는 것은 면했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빙한지대의 효과인 ‘오한’ 효과를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10초에 한 번씩 발동하고, 20회 중첩시 결빙 효과가 적용되는 능력이다 보니 이대로 눈싸움을 벌이며 200초만 지난다면 얼어붙은 놈들을 볼링핀처럼 날려버릴 수 있을 터였다.
“조심하십시오.”
그 영향이 진왕의 근처까지 미쳤지만, 곁에 선 호위가 기운을 발산하자 놀랍게도 서리가 그들 주위를 피해 내려앉았다. 그녀의 무위를 보여주는 한 수였다.
‘최절정쯤인가? 저 정도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거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천화 역시 마찬가지다. 기운을 발산했기 때문이 아니라, 흑우의 주인이기에 피해에서 제외된 것이다.
‘뭐, 이쪽도 전력을 다한 건 아니니까.’
최절정급의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썩 달갑지 않은 사실이지만 천화는 실망하지 않았다. 흑우 역시 전력을 다해 기세를 뿜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전력으로 빙항지기를 내뿜었다면 서리가 아니라 얼음이 얼었을 테지.
“무우우우우!!”
그렇다하더라도 시간은 흑우의 편이었지만 녀석은 기다리지 않았다. 어려운 상대라면 모를까, 굳이 그런 지루한 수고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푸륵 콧김을 내뿜은 뒤, 저돌적으로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어마어마한 돌진력으로 박치기를 시도했다.
“네 주인을 원망하거라!”
호위무사들 쪽에서 나선 것은 황광 혼자였다. 검강까지도 필요없다는 듯, 검기를 뽑아낸 그가 홀로 앞으로 나서며 검을 내리쳤다. 그 일격에 흑우가 피를 뿜으며 침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콰앙!!!
“커헉……!”
허나 격돌의 순간,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분명 정확하게 머리를 내려쳤건만, 흑우의 머리에는 생채기하나 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황광의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뒤에 멀뚱히 서있던 동료들과 함께 구석에 처박아버렸다.
“무히히!!”
됐지? 라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흑우. 하지만 천화는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으로 상대를 가리켰다.
“크으으윽!”
“이 요물 같은 것이!”
그곳에는 분노한 호위무사들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반인이었다면 대번에 가슴뼈가 함몰되어 즉사를 했겠지만, 나름대로 절정 고수들이다 보니 순간적으로 내공을 폭사시켜 충격을 완화한 것이다. 그렇다 한들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직접 타격을 받은 황광은 노기어린 목소리를 내는 것과 달리 쉽게 몸을 운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후.”
반면 흑우는 한숨 같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마치 그들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다시 한 번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이미 오한 중첩은 쌓이고 있는 상태. 아직 움직임에 크게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노와 자신감이 그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정면 승부를 노리는 것이다.
“죽어라!!”
우우우웅!!! 네 명의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검강을 뽑아올렸다. 정면에서 제각기 다른 부위를 노리며 검을 내리쳤다.
“무우!!”
쩌엉! 허나 검이 닿으려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흑우의 몸이 파랗게 빛나는가 싶더니 검강을 막아낸 것이다. 검강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분명 검강밖에 없을 텐데, 영물이라고는 해도 고작 소의 가죽 따위가 막아내다니? 순간 그들은 혼란에 빠졌고, 흑우는 제 멋대로 날뛰었다. 일단 머리로 황광을 들이받았다. 그와 동시에 머리를 털듯 흔들며 양쪽에 난 뿔을 이용해 다른 두 호위의 옆구리를 찔렀다. 조금만 각도가 틀어졌어도 그대로 배가 뚫리고 내장이 끊어졌겠지만, 다행히 사정을 보아준 덕분에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휘익- 퍼억!! 마무리는 돌려차기. 영물이긴 해도 이게 소가 낼 수 있는 움직임인가 싶을 만한 몸놀림으로 몸을 회전시킨 흑우가 뒷발을 돌려차서 마지막 한 놈을 날려버린 것이다. 쩌저적!! 그러자 놀랍게도 얻어맞은 이의 몸의 일부가 얼어버렸다. 천화가 빙신이라고 놀렸던 얼음의 몸. 그 효과가 발동하며 흑우의 방어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 힘을 믿고 흑우도 자신있게 공격을 감행할 수 있던 것이었고, 그 효과는 대단했다.
“…….”
“…….”
흑우의 압도적인 위용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진왕의 곁에 선 여성 호위마저 긴장을 했는지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 모습이었다. 이 상황에서 만약 천화와 설영, 흑우가 진왕을 노린다면? 과연 자신이 저들을 막고 진왕을 대피시킬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는지 경계어린 눈빛으로 흑우와 천화를 돌아보았다.
“승부가 난 것 같군요.”
“실로 놀랍군. 영물 중의 영물이도다.”
“무히히히!”
진왕의 칭찬에 기분이 좋았는지 흑우가 실없는 웃음을 흘렸지만 여전히 긴장 상태는 유지되었다. 상처 입은 호위들은 빠르게 점혈하여 상태를 돌보았지만 다시 덤빌 용기는 없었는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인지 침묵했고.
“이미 승부가 나기는 했으나 나는 자네의 실력도 견식을 해보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나?”
사실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다. 천화의 무력이라면 진왕이 어디에 있든, 잠입하여 목을 따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호위들 중 가장 실력이 좋다는 이들마저 쓰러진 상태였으니, 시간을 끌고 도망칠 시간을 버는 것조차 어려울 터였다. 그럼에도 진왕은 대담하게 나섰다. 오히려 천화의 무위까지 견식하고 싶다는 것이다. 천화가 무공 시연을 빙자하여 자신에게 검을 날릴 수 있음에도.
‘어차피 똑같다는 건가? 그렇다 해도 대담하군.’
그 모습에 천화도 감탄했다. 다른 왕야들이라면 혹여 천화가 자신의 목숨을 노릴까 노심초사하며 얼른 물리려고 했을 테니까. 어쨌든 천화가 마음먹는다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똑같지만 말이다.
“그건…….”
댕- 댕- 댕- 댕-
“해적이 나타났습니다!!!”
천화가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급한 타종소리와 함께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 중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무척이나 다급한 모습인 것이, 평범한 해적의 습격은 아닌 듯싶었다.
“무슨 일이냐!”
“해적이 항구 쪽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냥 해적이 아닌 듯싶습니다!”
진왕을 의식한 지부대인이 호통을 치듯 소리를 질렀지만, 병사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냥 해적이 아니면 무어란 말이냐! 제대로 고하거라!”
병사들의 호들갑에 진왕의 눈치를 보며 다시 호통치자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해적의 수괴인 것 같습니다. 해적선 수십 척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뭣이?!”
해적들이 작정하고 이쪽으로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동안에는 기껏해야 한 번에 열 척 정도가 오면 많이 몰려온 것이었는데, 천화와 해남파 무인들의 활약이 지나쳤던지 저들이 작정을 하고 몰려든 것이다.
“잘됐군요. 진왕 저하, 저들을 통해 보여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다. 함께 가지. 모두 서둘러 채비하거라! 백성들이 조금의 피해도 입어서는 아니 된다!”
천화의 제안에 진왕도 흔쾌히 응했다. 어차피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도 저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함이니까. 천화와 진왕이 항구로 갈 뜻을 밝히자 지부대인도 바빠졌다. 진왕의 위치가 애매하다 한들, 왕야급의 인물이 아닌가? 굳이 그의 줄을 타지 않더라도 잘 보이면 한 단계 위로 올라갈 수 있음은 자명했기에 즉시 모든 관군을 동원했다. 해적들이 상륙한다면 전 병력을 이용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테니까.
“서둘러라! 저들보다 먼저 항구에 도착해야 한다!”
그렇게 항구로 달려가자 병사의 말처럼 바다를 까맣게 메운 해적선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대장선. 다른 해적선들보다 세 배는 족히 커다란 배가 위풍당당하게 선두에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 깃발은…… 쿠로다 해적단입니다!”
그것을 확인한 누군가가 소리쳤다. 쿠로다라면 왜구들 중에서 가장 큰 해적단 중 하나였으니까. 그들을 비롯하여 몇몇의 대형 해적단들이 서로 견제하고 대립하며 바다를 나눠먹고 있는 것이다. 만약 모든 해적단을 통일하는 자가 나온다면 그 피해가 무시무시하겠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강제로 남에게 통합되지 않을 만큼 쿠로다의 힘과 세력이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저들이 어찌……!”
지난 연이은 해적선 격파에 열이 받은 것일까? 아니면 진왕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사로잡기 위해 출정한 것일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지.’
어느 쪽도 말이 되었기에 천화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이 격파한 해적선 중 쿠로다 해적단 소속도 제법 있었고, 또 진왕을 사로잡는다면 아주 유리한 위치에서 편안하게 약탈을 벌일 수 있을 테니까. 왕야의 목숨이 달렸는데 관군 따위가 어디 제대로 저항이나 하겠나?
“잠시 물러나주시겠습니까?”
점점 다가오는 수십 척의 배들. 그들을 바라보며 천화가 주변을 물렸다. 쿠로다 본인이 직접 움직인 것에 잔뜩 긴장 중인 이들이 주변에 가득했지만, 천화는 느긋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한 발 한 발 마중하듯 걸음을 옮겼다.
“천화 님, 저희도 돕겠습니다.”
“괜찮으니까 대기해. 설영, 너도.”
점점 가까워질수록 무시 할 수 없는 압박감으로 다가오는 배들을 바라보며 해남파 무인들이 함께할 뜻을 밝혔지만 천화는 거부했다. 지금은 자신의 힘을 보여줄 때였으니까.
“크하하하하하! 이렇게 알아서 한데 모여주니 일이 쉬워지는구나! 잠자코 있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때 대장선 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역시 상당한 고수인 듯, 이쪽의 상황을 모두 보고 있는 듯싶었다. 그리고 저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진왕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후우.”
그때, 천화가 무명검을 들어올렸다. 천무십이검의 경로에 따라 내공을 휘돌렸다. 천무문에서는 사용하지 못했던 후반부 삼 초식 중 첫 번째를 이용하여 몸 안의 내공을 증폭시켰다.
‘크으, 이 맛이지.’
몸 안에 가득 차오르는 벅찬 기운을 느끼며 천화가 무명검을 꼿꼿이 세웠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천무십이검의 후반부 삼 초식은 세 개이되 하나였으니까. 몸 안의 내공을 특수한 경로로 휘돌려 증폭시키는 천무일검. 그리고 그 힘을 일검에 담아 일시에 쏟아내는 천무이검. 아직 삼검까지는 무리였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무명검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막대한 기운이 검에 가득 들어찼다.
“천무이검. 멸절.”
팔 할의 내공을 담아, 바다를 향해 내리그었다.
“?!”
“저, 저게 무슨!!”
그 순간, 바다가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