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해룡출도 (2)2022.01.25.
“본노는 초운학이라고 하네. 자신을 죽인 이의 이름쯤은 알고 가는 것이 좋겠지.”
“흠. 죽일 사람의 이름을 굳이 알고 싶지는 않은데. 이왕 들었으니 말해보시죠. 묘비에 뭐라고 적어드릴까요?”
“어리석군. 그만큼이나 내공을 소모하고서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설영과 흑우, 은룡이 떠나갈 동안 마교의 장로 초운학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노리는 것은 오직 천화뿐이라는 듯, 다른 이들쯤이야 언제든지 목숨을 취할 수 있다는 듯 그에게만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원한다면 조금은 기다려줄 수도 있네만. 운기라도 할 텐가?”
그리고 한껏 여유를 부렸다. 그냥 붙어도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 천화가 상당한 내공을 소모한 상태라는 것 또한 간파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알아차렸군.’
그의 말처럼 천화는 지금 내공의 3할 가량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한 것이라고는 발을 몇 번 구른 것이 전부였지만, 음공은 기본적으로 상당한 내공 소모를 요하는 무공이었다. 게다가 다수의 기혈을 뒤틀리게 만들었으니 제 아무리 천화라 할지라도 상당한 내공의 소모는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놈의 말처럼 이곳에서 운기조식을 할 수도 없었다. 천화만변무상심법은 안정성이 높은 편이지만, 운기 중에는 무방비일 수밖에 없고 잘못 충격을 받으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교놈들을 믿고 한가하게 운기를 하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에이, 겨우 이 정도로 뭘 운기씩이나.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텐데 쉬엄쉬엄 회복하죠 뭐.”
“나중에 억울하다고 눈도 못 감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때문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절했지만, 초운학은 음흉하게 웃으며 받아쳤다. 남의 속을 긁는 것이라면 천화가 몇 수는 더 앞서 있었지만 말이다.
“영감님 나이라면 억울할 것도 없지 않아요? 자식들도 다 키워놨겠다, 손주도……. 앗, 설마 아직도 동정이신가? 앗아아……!”
부들부들 불끈 쥔 초운학의 손이 떨려왔다. 그가 익힌 무공은 동자공이었으니까. 마공이자 동자공이라는 특성을 가짐으로써 남들보다 월등히 빠르게 강해질 수 있지만, 동정을 상실하는 순간 그동안 쌓아왔던 내공도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비운의 무공. 이미 그가 누구인지, 어떤 무공을 가진 인물인지 알고 있던 천화였기에 치명타라 할 수 있는 잔인한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놈,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 말 앞에 초운학도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여유롭던 기세가 날카로워졌고, 가공할 마기를 흘리며 천화를 압박했다.
“커헉……!”
“초, 초 장로님. 마기를 거둬주……!
덕분에 된서리를 맞은 것은 다름 아닌 현 해남파의 무인들이었다. 위문호를 비롯한 그의 수하들이 아직 그의 곁에 남아있던 것이다. 그 모습이 영 마뜩찮았는지 초운학이 혀를 차며 마기의 방향을 조절했지만, 천화는 여전히 영향을 받지 않았다. 천화만변무상심법으로 쌓은 정순한 내공이 마기에 저항하기도 했고, 그가 두르고 있는 운철 장비들이 마기를 흩어버렸기 때문이다.
“계속 눈싸움만 할 겁니까? 아니면 늙어서 다리에 힘이 없으신가?”
“죽여 주마!”
먼저 덤벼든 것은 초운학이었다. 천화의 도발에 넘어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기운이 흐트러질 만큼 어설픈 인물이 아니었기에, 그가 뻗어내는 강기는 대기를 터트릴 만큼 강력했다.
“어휴. 힘 쓸 일이 없으셨나? 힘이 넘치시네!”
그 검을 천화는 회피했다. 무명검이 있는 이상 직접 부딪히는 것도 문제는 없었지만, 굳이 힘을 뺄 필요는 없으니까. 초운학이라면 이미 무신지로에서 붙어보았던 자이기도 했기에, 검로를 예측하며 아주 가볍게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죽여 주마!!”
그것이 약올랐지만 초운학은 침착을 유지했다. 상대는 어쨌든 자신과 같은 초절정의 고수였고, 그들과 같은 고수들의 싸움에서는 흥분하거나 방심하는 순간 결판이 나기도 하니까. 초운학의 검이 잘게 떨리는가 싶더니 동시에 천화를 베어냈다. 그의 무공인 염동폭쇄검(念動爆碎劍)의 절초인 환염파쇄를 펼친 것이다.
“이크! 이제 수전증까지 오셨나?”
천화가 재빨리 무형신보를 펼쳐 회피해 보았지만 이번만은 완전히 피해낼 수 없었다. 소매의 일부가 마치 손톱에 할퀸 것처럼 네 갈래로 잘려나갔다. 떨친 것은 일검이지만 순간적으로 흔들리며 네 개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극쾌라 할 수 있는 일격이었지만 결국 피해가 없으면 그만이다. 천화는 개의치 않았고 역으로 반격까지 날렸다. 공격 후 회수되는 검을 따라 초운학의 품으로 파고든 것이다.
“건방진!”
허나 초운학도 만만치 않았다. 회수하던 검을 다시 찔러갔고, 동시에 왼손으로 조법을 펼치며 천화를 공격했다. 그 순간, 천화의 대처가 남달랐다. 쏘아지는 검은 무명검으로 밀어내고, 조법은 내공을 가득 불어넣은 손목으로 쳐냈다. 까강! 운철로 만들어진 시갑이 손목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상처 하나 없이 튕겨낸 것은 물론, 마기를 흩어내며 초운학의 가슴을 훤히 열어젖혔다.
“철산고.”
퍼엉!! 그리고 그대로 어깨와 등을 가져다대며 내공을 터트렸다. 그가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였기에 운철의 힘에도 어느 정도 마기를 일으킬 수 있던 것이지, 일류나 절정급만 되더라도 그 한 방에 가슴뼈가 으스러지고 부러진 뼈에 장기가 질려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쳇. 이 정도로는 안 된다는 건가. 소림도 그렇고, 몸 튼튼한 게 고자들의 특징도 아니고 원.”
무려 삼 장여를 그대로 날아가버렸지만 초운학이 신법을 발휘해 공중에서 몸을 뒤집었다. 시큰한 가슴어림의 충격에 놀라면서도 불같은 노성을 토해냈다.
“진정 살려두어서는 안 될 놈이구나!”
“언제는 살려주려고 하셨수?”
천화도 지지 않고 받아쳤지만 전력을 다한 초운학의 공세를 실로 가볍지 않았다. 변화가 일품인 남해삼십육검을 펼쳐 초운학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고 내기의 유동에 주목했다. 콰앙!!
“쳇. 이건 장르가 다르잖아!!”
염동폭쇄검이 무서운 이유. 바로 극쾌와 극환의 검식 속에 매서운 폭발의 힘이 깃들어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심지어 검이 닿지도 않은 곳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따지고 보면 천화가 사용하는 용호십삼검은 화염을 일으키니 피장파장이었지만, 막상 당하는 입장이 되면 미칠 노릇이다. 막았다고 생각하면 폭발이 강타하고, 그것을 의식하다 보면 귀신처럼 날아드는 검의 변화에 홀리고 마니까.
‘남해삼십육검을 쓰길 잘했군.’
그나마 큰 피해로 이어지지 않은 건 천화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무공이 남해삼십육검이기 때문이었다. 남해삼십육검은 바다를 닮은, 물의 기운을 이용한 무공이니까. 전부는 아니지만 염동폭쇄검의 폭발력을 일부나마 억눌렀고, 충분히 내공을 이용해 견뎌낼 만큼의 충격으로 약화시킨 것이다. 만약 용호십삼검을 사용했다면 양측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폭발에 휘말리고 말았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이득 볼 게 없으니까.’
만약 그럴 경우, 누가 유리하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천화도 불괴기공을 지니긴 했지만, 마공을 익힌 초운학 역시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회복력을 지녔으니까. 똑같이 타격을 받아서는 답이 없는 것이다. 그런 단순한 소모전으로 갈 경우, 결국 내공 대결처럼 변질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군.”
결국 이번에는 천화가 그를 뿌리치며 거리를 벌렸다. 내공의 양은 더 적을지 몰라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는 천화였지만, 이대로는 시간만 끌 뿐이니까. 설영과 흑우, 그리고 해왕검을 든 주자엽이 있으니 저쪽이라도 딱히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좋아. 보여주지.”
그 순간 천화의 눈빛이 변했다. 기수식 따위는 내다버린 빈틈투성이의 자세로 다시 한 번 기운을 끌어올렸다. 우우우웅-!! 천화만변무상심법 상의 내공이 전신으로 흩어지고, 무명검에 깃들었다. 일반의 검이라면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릴지 모를 막대한 힘이었지만, 무명검은 기분 좋은 울음을 터트렸다. 청아한 검명. 단순히 내공을 밀어넣는다고 일으킬 수 없는 검의 공명이었다. 검과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공명의 울림이었다.
“신검합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린 초운학의 표정이 일변했다. 자신 역시 애검에 내공을 불어넣어보지만, 검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 방에 끝내주마.”
긴장한 초운학에게 미소를 지으며 천화가 내공을 휘돌렸다. 천무십이검 상의, 이제는 무상천검에 녹아든 운기 경로에 따라 내공을 휘돌리자 몸 안에 급격히 내공이 차올랐다. 역혈마공 따위로는 따라올 수 없는 기운의 증폭. 이미 절반가량까지 떨어졌던 천화의 내공이 가득 차올랐다. 그뿐 아니라 같은 내공이라도 성질이 달라졌다. 패도적이고 파괴적으로. 천화의 기질에 반응하듯 거친 성질로 바뀐 내공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약간이지만 주변의 기운들과 공명하며 거대한 힘을 일으켰다.
“죽어라!!!!”
그 순간, 먼저 짓쳐든 것은 초운학의 쪽이었다. 천화의 변화에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또 다른 마공을 사용하여 전신 근육이 울룩불룩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그의 검이 천화를 공격했다. 염동폭쇄검. 의지에 따라 상대를 폭쇄시킬 수 있다는 초운학의 독문무공이 극성까지 발휘되었다. 남해도 전체를 날려버릴 기세로 쏘아져갔다.
“자기네 앞마당이 아니라고 너무하는구만!”
그 모습에 천화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저것을 막든, 부수든 주변에 초토화되는 것은 막기 어려웠다. 지형이 바뀔 만한 파괴력을 지닌 일격이었지만 자신이 알 바 아니라는 듯 무자비한 힘을 방출하는 초운학을 보며 그제야 기수식을 취했다.
“너한테는 무상천검도 아깝다.”
사용하는 것은 남해삼십육검.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것이 있었다. 아홉 초식, 서른여섯 번의 변화를 일검에 담아내었다.
“해룡.”
이것이야말로 남해삼십육검의 진수라고 할 수 있었다. 천무십이검이 그러했듯, 남해삼십육검 또한 그 검로를 하나로 모으면 단 하나의 초식이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출도.”
“!!”
그 순간 천화의 검 끝에서, 아니 천화의 전신을 통해 뿜어진 강기의 용이 초운학을 집어삼켰다. 그가 휘두르던 검도, 염동폭쇄검의 폭발도 강기의 용 앞에서는 그저 입안에서 통통 튀는 먹잇감의 재미난 식감에 지나지 않았다. 콰과과과과광-!!!!!
“……이런.”
해룡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거대한 흔적이 남았다. 초운학의 강기가 좀 더 저항을 해주었다면 적당히 상쇄되었을 테지만, 오랜만이라 힘 조절에 실패했던 것인지 뒤편에 있던 저잣거리와 조금 떨어져 있던 해남파의 장원의 절반이 박살 난 것이다. 그리고 초운학은, 그야말로 갈려나갔다.
“끄응. 간만에 힘을 좀 썼더니 온몸이 쑤시는구만.”
‘초운학이었던’ 것들이 남긴 했지만 그뿐. 해룡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위문호를 비롯한 현 해남파의 무인들은 공포에 떨었다. 초운학과 겨루었으니 천화의 상태도 온전치 못할 것이다. 지금 몰아친다면 놈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합리적인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골수까지 깃들어버린 공포는 천화를 향해 적의조차 내보일 수 없게 만들었다.
“히, 히익!”
오히려 천화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흠칫 놀라 몸을 떨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들 따위는 그저 발구름 한 번으로 제압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작은 움직임 하나, 들숨과 날숨 하나하나에 겁을 집어먹었다.
“야.”
“예, 옛?!”
“계속할 거냐?”
“아닙니다!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그래? 그럼 일단.”
사실 천화의 상태는 그들의 예상처럼 썩 좋지 못했다. 외상과 내상은 거의 없었지만, 휑하니 비어버린 단전은 고작해야 1할 정도의 내공만을 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물론 무명검이 검강조차 막아낼 수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저들 정도는 가뿐히 요리할 수 있지만, 용왕 바위 쪽으로 몰려간 이들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는 이들에게 힘을 빼기가 싫었다.
“대가리 박아.”
“예?”
“싫으면 내가 직접 심어주고.”
“아닙니다! 박겠습니다!!”
쿠웅 쿵 쿵- 천화의 한마디에 위문호를 비롯한 해남파 무인들이 땅에 머리를 박았다. 어차피 항복을 한다 한들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주자엽의 선택이었다. 남해삼십육검을 익혔다면 장문인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고, 그것을 이용해 해남파를 차지할 수도 있겠지만, 천화는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야, 거지! 나와!!”
“……?”
그들이 빠짐없이 땅에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을 살핀 천화가 허공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흠, 아직 안 온 건가? 이 새끼가 빠져가지고…….”
“아닙니다! 여기 왔습니다!!”
갑자기 여기서 거지를 찾는다고? 다들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천화가 다시 한 번 입을 여는 순간 누군가 자신의 기척을 드러냈다. 춘삼. 하북에서 개방의 분타주를 맡고 있던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물론 지금은 분타주도 아니었다. 단개라는, 개방의 감찰자가 되어 떠돌던 그가 미리 천화의 연락을 받고 인근에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이놈들 제압해서 데리고 있어. 반항하면 뭘 해도 좋은데, 그래도 숨은 붙여놓고. 대신 한 놈이라도 튀면…….”
“절대 못 도망가게 하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그 순간 춘삼의 눈빛이 퍼렇게 빛났다. 무슨 짓을 해도 좋단 말이렸다? 한 놈이라도 도망치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애초에 싹을 자르는 의미에서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놓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며 타구봉을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그럼, 금방 오지.”
그렇게 춘삼이 일단 놈들의 혈도부터 제압하는 모습을 보며 천화가 용왕 바위를 향해 신법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