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해룡출도 (3)2022.01.27.
‘저 녀석이라면 잘해주겠지.’
뒷일을 춘삼에게 맡기고 몸을 날린 천화는 빠르게 내공을 회복시켰다. 내공 증폭을 위한 운기를 거두었기에 보유 내공은 1할 밑으로 떨어졌지만,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내공이 회복되는 중이었다. 무상천검을 획득하며 그 특성이 천화만변무상심법에 깃들에 된 영향도 있었지만, 그가 화경의 경지에 한 발 걸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직 화경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화경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주변 기운과의 공명은 과거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내던 것이었으니까. 주변의 기운들을 피부 호흡하듯 자연스레 끌어들여 내공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천화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할, 3할……. 빠르게 내공이 차오른다. 주변의 기운들을 급하게 빨아들인 것이다 보니 그 질이 썩 좋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당장 써먹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끄응. 힘 조절 연습은 좀 필요하겠군. 숙련도 작업도 좀 하고.’
하지만 천화는 그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당장은 괜찮겠지만 만약 초운학 같은 고수가 둘 이상 덤벼든다면 곤란하다. 이리저리 시간을 끌며 싸울 수야 있겠지만, 연속으로 처치하거나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초운학 정도의 고수는 마교에도, 정파에도 적지 않은 숫자가 도사리고 있었다.
‘백대고수라 불리는 자들……. 슬슬 놈들의 동태도 파악해둘 필요가 있겠어.’
천하십대고수의 아래로 흔히 백대고수라 불리는 자들이 그렇다. 정파와 사파를 더한 숫자이긴 하지만 초운학 정도 되는 고수가 무려 일백 가량이 있었고, 마교에도 백대고수급이라 할 수 있는 마인들이 오십 가량 있었다. 물론 절반뿐이라 해도 무시할 수 있는 전력은 아니다. 저것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무공의 수위를 이야기하는 것일 뿐, 마공을 폭주시켜 힘을 얻는다면 능히 백대고수들을 상대할 이들이 일백은 가뿐히 넘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할 때, 정과 사는 무조건 손을 잡아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오랜 세월을 준비하고 힘을 기른 마교에게 잡아먹히고 말 테니까. 하지만 무신지로에서는 그러지 못했고, 초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상당한 힘을 잃었으며, 힘의 우위에서 마교가 앞선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사파 중 일부는 배신을 했다. 마교에 붙어 목숨을 연명하려 했다. 무림의 숨겨진 힘, 은거기인이라 불리는 전대의 고수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대항조차 할 수 없었겠지. 그나마도 버티고 저지하는 것이 고작일 뿐, 마교를 패퇴시키고 물러나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고인물들과 다른 플레이어들의 공이었다.
‘여기에는 없는 자들이지.’
허나 지금은, 이곳에는 고인물도 플레이어도 없다. 오롯이 천화 혼자만의 힘으로 그들에게 대항할 힘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이다. 그렇기에 굳이 세외사궁 중 야수구과 북해빙궁을 포섭한 것이고, 해남파와 도왕을 구한 것이다. 고인물들을 완벽히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제때 돕는다면 기회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결국 혼자 해야 해.’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마교를 완전히 막아 세울 수 없다.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그들의 야욕을 저지하고 다시 십만대산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무리다. 무신지로에서 그러했듯, 결국에는 자신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천마를 꺾고 그들을 말살시키려는 정파를, 무림맹주를 막아내야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부족했다. 더 큰 힘이 필요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기는 한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천화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무신지로에서야 중요 분기 임무에 따라 움직이느라 별 의구심을 갖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조금 이상한 것이다. 중요 분기 임무는 왜 정사대전을 막으라고만 했을까. 천화가 당시 정도, 사도, 마도 아닌 정사지간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마교에 투신한 플레이어들은 마교천하를 이루도록 임무를 받았고, 정파 계열의 플레이어들은 마교를 물리치고 다시 정파무림에 평화를 되찾으라는 임무를 받았으며, 사파 계열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선택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천화라면, 역으로 그가 스스로 세력을 일으키는 등의 방식으로 천하를 지배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어째서 중요 분기 임무는 정사대전을 저지하는 것에서 그친 것일까?
‘열린 결말 같은 것도 아니고…….’
천화로서도 잘 가늠이 되지 않지만 천천히 생각을 해볼 만한 일이었다. 어느 쪽을 택해도 같은 결과라면 더 쉬운 쪽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가 숨겨진 선택지와 같은 정사지간의 위치에서 정사대전을 막아내었기 때문이라는 느낌적인 느낌도 들었다.
“잘하고 있군.”
그렇게 내공을 회복하며 쭉쭉 달려나가자 곧 용왕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용머리 바위라고도 부를 수 있을 만큼 용의 형상을 닮은 바위가 인상적인 그곳의 앞에서 한 무리가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바로 주자엽과 그 수하들. 그리고 설영과 흑우였다. 전력 외라고 부를 수 있는 나머지 남해도 주민들은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상태였지만, 걱정이 되었는지 멀리 도망을 가지는 않고 있었다. 어쩌면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에 자신이 있으니 언제든 몸을 빼낼 수 있다는 생각일지도 모르지. 그래서인지 마인들도 굳이 무리를 해서 바다로 뛰어들지는 않았다. 저들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것은 눈앞의 적들을 처리한 뒤에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 것인지, 마기를 잔뜩 끌어올린 채 그들을 몰아쳐가고 있었다.
“쀼우웃!!!!”
“아?”
아니다. 어쩌면 자신이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설영의 품 안에 있겠거니 생각했던 은룡이 바다 위에서 솟아오르며 물로 이루어진 구체들을 쏟아낸 것이다. 퍼엉! 펑! 펑! 정확히 마인들에게 날아가 폭발하는 물의 구체들. 유도 기능이 내장된 것처럼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대는 데다, 상당한 기운이 담겼는지 절정 고수인 그들조차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쩌저적! 충격도 충격이지만 흑우와의 연계도 매서웠다. 흑우가 끌어올린 빙한지기가 놈들이 뒤집어쓴 물을 즉시 얼려버린 것이다. 물론 얼음에는 어떤 기운이 담긴 것이 아닌지라 금방 내공을 끌어올려 부숴내긴 했지만, 그 잠깐 동안 만들어진 틈이 문제였다. 시야가 제한되고 손발이 어지러워진 것을 이용해 주자엽과 해남파 무인들이 놈들을 공격해가는 것이다.
“무우우우!!!”
콰앙!!! 그들이 여의치 않을 때는 흑우가 직접 달려들어 머리로 받아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흑우의 돌진은 마치 트럭에 치이는 것 같은 충격이니까. 제대로 방비하지 못한다면 절정 고수라 할지라도 뼈가 부러지고 정신이 아득해질 만한 위력이었기에, 마인들도 속수무책이었다.
“해복번시! 해시신루! 해공비운!”
주자엽 역시 흑우와 은룡에게 뒤지지 않는 놀라운 무위를 떨치고 있었다. 해왕검의 특수 효과가 발동하며 그가 익힌 남해삼십육검의 성취가 한 단계 뛰어오른 것이다. 고작 1성의 성취 차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간혹 그 1성의 차이가 거대한 벽을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었다. 평소에는 막막하게 앞을 가로막던 벽이 사라지며 새로운 영역을 맛본 주자엽은 무아지경에서 검을 떨쳐갔고, 그것이 다시 그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있었다. 혈마검을 통해 절정의 경지를 맛보았던 설영이 손쉽게 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듯, 그 역시 해왕검을 통해 비슷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굳이 끼어들 필요가 없겠는데?’
반면 설영은 침착하게 마인들을 하나하나 베어 넘기고 있었다. 무리할 필요도 없고, 흥분할 필요도 없다. 이미 절정의 단계가 완숙해져 최절정의 경지를 눈앞에 둔 그녀였기에 어지간한 마인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까. 장로급의 인물인 초운학이 직접 나섰기 때문인지, 아니면 해남파와 천화를 무시한 까닭인지, 초운학이 초절정의 고수였던 것에 비해 다른 마인들은 마기를 폭주시킨다 하더라도 최절정까지는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충분히 설영이 감당하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서지 않을 이유도 없지.’
이대로 두어도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무난하게 우위를 점해갈 것 같았지만, 천화는 굳이 지켜만 보지 않았다. 은잠무영보를 펼쳐 소리도 기척도 없이 마인들의 뒤로 돌아갔다.
“컥?!”
은잠무영보는 기본적으로 살수의 무공이었다. 바로 등 뒤로 돌아갈 때까지 상대는 아무런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고, 단거리에서의 이동 속도 또한 여느 상승 보법들에 뒤지지 않았다. 무명검은 점을 찍듯 가볍게 놈들의 심장을 꿰뚫었고, 주변의 마인들이 알아차릴 새도 없이 그들의 신체를 절단했다.
“천화!”
뒤늦게 천화의 등장을 알아차린 설영의 기쁜 외침과 함께, 마인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천화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으니까.
마교의 장로이자 초절정 고수인 초운학의 패배. 그것은 천화가 최소 초절정의 고수라는 뜻이었기에 절망을 내비친 것이다. 초운학과 겨루었으니 천화의 상태도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지만, 적어도 눈에 보이는 외상은 없었다. 가뜩이나 간신히 비등한 형국을 유지하는 지금, 그가 개입한다면 힘의 균형은 급속도로 무너질 터였다.
“산개하라!”
결국, 초운학을 대신해 마인들을 이끌던 이가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는 답이 없으니까. 결사 항전을 벌인다면 한 놈이라도 더 데리고 갈 수 있겠지만, 무의미했으니까. 차라리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아 자신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해남파와 천화, 설영의 존재를, 그리고 저 미친 영물들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흑우야, 돌아!”
“무우우우훗!!!”
하지만 그 또한 허락되지 않았다. 놈들의 낌새를 알아차린 순간, 명령보다 빠르게 흑우가 원을 그리듯 놈들의 주변을 감싸고 돌기 시작한 것이다. 흑우가 그 자체로 결계가 되었다. 이미 얼음의 몸을 발동시켰기에, 강기를 휘두르며 뚫어내려 해도 무리였다. 검을 휘두른 자는 오히려 흑우에게 들이받혀 다시 안쪽으로 튕겨나갔고, 내상까지 잔뜩 입어 피를 울컥울컥 토해냈다.
“슬슬 배고프니까 얼른 끝내자구?”
갇혀버린 마인들의 틈으로 천화가 뛰어들었다. 내공은 아직 3할가량밖에 회복되지 않았지만 자신감 있게 몸을 날렸다. 역혈기공. 혈류가속. 무상천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강화 효과를 끌어올리며 홀로 놈들에게 짓쳐들었다.
“죽여라! 저놈만은 죽여야 한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뒤가 없어진 탓인지 마인들의 눈에도 독기가 올랐다. 어차피 자신들은 이 자리에서 죽는다. 정체는 들켜버렸지만 다른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이 자리에서 죽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들 역시 역혈기공을 끌어올렸다. 품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 삼켰다. 폭혈단. 언젠가 천화도 먹어치운 적 있는, 잠력격발을 위한 기폭제였다. 그 후유증이 무시무시했지만 죽음을 각오한 이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같이 죽자!!”
동귀어진을 각오한 악귀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각자의 마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채로. 하지만 천화는 얼굴색에 변화 한 번 없었다. 그저 무심히, 무명검에 내공을 일으키며 베고 찌를 뿐이었다.
“……어째서……!”
“맞지 않는 거냐……!”
굳이 초식을 사용할 것도 없었다. 아니,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흔히 무인들은 초식이 마치 전가의 보도인 양 휘둘러댄다. 하지만 이처럼 혼자서 다수를 상대할 때,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은 보법이었다. 초식의 기본 전제는 일대일 상황이니까.
“쯧쯧, 요즘 것들은 말이야. 겉멋만 들어서……!”
간혹 다수를 상대하기 위한 초식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초식이란 결국 가장 잘 통하는 투로를 정리한 것이요, 단숨에 가장 큰 힘을 뽑아낼 수 있도록 운기 경로를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불과했다. 때문에 천화는 억지로 초식을 뽑아내는 대신 피하고, 공격하기를 반복했다. 어떠한 자세에서도 몸을 움직이고 밀어낼 수 있는 무형신보를 극성으로 발휘하며 쏟아지는 칼날의 숲을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꼭 한 명의 마인들이 쓰러져나갔다.
“저게 무슨…….”
그 모습을 보며 주자엽도, 설영도 잠시 말을 잊었다. 농담을 던지고는 있지만 설영조차도 저처럼 진지한 천화의 모습은 처음이었으니까. 저것이 천화의 진짜 실력이라는 것일까? 마치 검 그 자체인 듯 날카롭고 싸늘하게 마인들을 베어넘기는 천화는 모습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이제는 무공에 격차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라 해도 저 안에 들어간다면 일 초 만에 반으로 갈라져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잠시 후, 천화가 멈추어섰을 때 움직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마인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었고 설영과 주자엽, 해남파의 무인들은 경악스러운 천화의 무위에 얼어붙어 입도 달싹거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