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수련동 (1)2022.01.30.
“뭐야? 분위기 왜 이래?”
꽤나 많은 기력과 심력을 소모했는지 흥건해진 땀을 닦으며 몸을 돌린 천화가 경직된 분위기에 놀랐는지 질색을 했다.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의도였지만, 이미 그의 무위를 엿본 이들의 표정은 쉽게 풀어지지 못했다.
“무히히힝?”
같은 장소를 계속해서 빙글빙글 도느라 어지러웠는지 살짝 비틀거리는 흑우가 머리를 비벼올 뿐, 누구도 쉽게 입을 떼거나 움직이지 못했다.
“아직 바다가 찰 텐데, 저대로 둘 거야? 슬슬 정리를 하지.”
어색한 분위기를 어쩔 수 없다고 여겼는지 천화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마인들의 공격을 피해 바다에 뛰어든 남해도 주민들의 입술이 벌써 파래진 것이다.
“아……! 이제 괜찮다. 모두 올라오도록!”
그제야 정신을 차린 주자엽이 남해도 주민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위문호가 어찌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주민들은 주자엽을 새로운 해남파의 장문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헤엄을 쳐 뭍으로 올라온 뒤, 내공을 일으키거나 서로 몸을 감싸안으며 체온을 올렸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단 제압해뒀지. 처분은 알아서 해.”
이제 정신을 차렸는지 주자엽이 다시 천화에게 다가와 물었고, 천화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답을 했다. 처분은 그에게 맡기겠지만, 만약 허튼 동정심으로 풀어주지 않기를 기대했다. 그런 나약한 심성이라면 그를 완전히 믿어주기 어려우니까. 쓰임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결연하고도 싸늘한 주자엽의 표정을 보니 그러지는 않을 듯싶었다. 이후의 처리는 간단했다. 주자엽이 수하들을 부려 마인들의 시체를 수거했고, 남해도의 주민들을 이끌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천화, 설영과 함께 다시 저잣거리로 향했다. 천화가 제압해두었다는 위문호와 일당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장원까지 모조리 파괴하다니, 이런 악독한 놈들!”
“크흠흠.”
다시 마을 쪽으로 돌아온 주자엽이 초토화된 저잣거리와 절반가량이 파괴되어버린 해남파의 장원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뜨끔한 천화는 혹여 물어내라고 할까 싶어 짐짓 모르는 척을 했고, 주자엽은 계속해서 분통을 터트리며 위문호와 춘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천화님! 한 놈도 빠짐없이 모두 제압해두었습니다!”
“개방?”
“어. 내가 불렀어. 마교가 얽힌 만큼 정보를 적당히 만져줄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
그런 그들을 춘삼이 개운한 얼굴로 맞이했지만, 상황을 파악한 주자엽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해남파가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도록 정보를 적당히 조작해 퍼트려줄 인물로 개방의 인사를 부른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의 뒤로 쓰러진 이들의 몰골 때문이었다.
“……저 중에 누가 위문호입니까?”
“커흠. 이놈입니다.”
매일같이 복수의 칼을 갈던 주자엽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엉망이 되어 있었다. 춘삼이 삼복구타봉법을 이용해 고기 다지듯 다져놓은 것이다. 덕분에 춘삼이 멋쩍은 듯 먼 산을 바라보았지만, 어딘지 기분은 개운해보였다.
‘연습 많이 했네, 많이 했어.’
일단 전수하기는 했지만 과연 충분한 성취를 보였을까 의심하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춘삼은 훌륭한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위문호.”
“사, 살려다오……. 내가 다 잘못했다.”
어쨌든 덕분에 위문호를 찾아낸 주자엽이 놈에게 다가갔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대번에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째서 아버님을 배신한 것이냐.”
하지만 주자엽이 듣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친 까닭에 묻지 못했던 질문의 답을 찾고 싶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더냐?”
“마교, 마교에서 그것을 원했다.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그것을 살 길이라 여겼던 것일까? 위문호는 주자엽의 말을 냉큼 받았다. 모두 마교의 짓이라고. 자신은 살기 위해 그들을 따랐을 뿐이라고.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너도 보이 않았느냐고 변명했다.
“그럼 죽었어야지. 그들과 싸워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함께 싸웠어야지.”
하지만 주자엽은 냉정했다. 아버지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을 테니까. 설령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족과 같은 이들을 배신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미, 미안하다.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 목숨만은 살려다오. 내가 어릴 적 너를 얼마나 예뻐했는지 기억하지 않느냐?”
“그래. 그랬지. 당신은 내게 있어 숙부 같은 존재였고, 형 같은 존재였다.”
두 눈에 분노가 치솟았고, 음성은 차가워졌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마교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털어놓아라. 그들이 어떻게 접근해왔는지, 어떤 지령을 받았는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말하마.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하마.”
당장이라도 검을 떨쳐 그의 목을 베고 육신을 갈가리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참으며 이야기하자, 위문호도 얼른 화답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전후 사정에 대해, 그간 벌인 사업에 대해, 앞으로 무엇을 할 계획이었는지에 대해. 설마 이대로 용서를 하려는 것일까? 천화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가만히 그것들을 함께 들었다. 개방 소속인 춘삼까지 자리에 있었지만 위문호는 제 목숨을 구제받기 위해 머뭇거리지 않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컥!”
푸욱! 그리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때, 주자엽은 주저 없이 놈의 단전에 검을 박아넣었다.
“어째서……?”
자신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었냐는 듯한 눈빛. 이미 깨어진 단전으로부터 내공이 흩어지고 폭주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되겠지만, 주자엽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몸을 베어갔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자신의 아버지가 당했던 것처럼. 놈의 비루한 몸뚱아리를 여섯 조각으로 잘라 죽였다.
“그가 남해도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의 것을 할 수 있게 해준 것뿐입니다. 도움이 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머리를 숙이는 주자엽.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해준 천화를 위해 최대한 분노를 억누른 것이다. 저 빌어먹을 작자가 내뱉는 숨소리 하나가 끔찍하게 싫었지만, 놈이 알고 있던 작은 정보 하나가 천화에게 도움이 될까 싶었으니까.
“참고가 됐다. 그럼 일단, 정리부터 하지. 어이, 거지!”
“옙!”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는 알겠지? 가서 제.대.로. 알리도록.”
“옙! 절대 해남파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 마음을 읽은 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춘삼을 부르자, 눈치 빠르게 그가 대꾸했다. 이미 죽어버린 위문호의 짓이라고는 해도, 마교와 손을 잡았던 사실 자체가 해남파에 큰 굴레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잘만 정보를 가공한다면, 오히려 해남파가 마교를 물리친 것으로 포장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어쨌든 장문인을 두 번이나 잃은 까닭에 약해졌다 여길 수도 있지만, 여전히 어지간한 대문파쯤은 눈 아래로 둘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정파 연합에서도 그들을 몰아세우지는 않을 터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처음 정보를 전달하는 이의 역량에 달린 문제였기에, 굳이 멀리있던 춘삼을 이곳까지 부른 것이었다. 하오문을 이용하는 것이 더 빠르고 편리할 수는 있지만, 구파일방 오대세가가 주축인 정파 연합에 영향을 끼치기에는 개방을 통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으니까. 영향력에서든, 신뢰도에서든 말이다.
“저, 그럼 먼저 가봐도 될까요?”
“그래. 만약 이상한 소문이 돌면…… 면담이 필요하겠지?”
“넵!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혹여나 또 ‘교육’을 당할까 두려웠는지 슬그머니 천화의 눈치를 보던 춘삼은,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신법을 극성으로 발휘해 자리를 떠났다. 남해도를 빠져나갔다. 이전에도 무서웠지만, 마교의 장로인 초운학을 찢어발기는 모습까지 본 뒤였기에 천화에 대한 공포심이 더욱 커진 것이다.
“그럼 바깥일은 저 녀석에게 맡기고 일단 내부 단속부터 다시 하지.”
“예!”
그렇게 외부 단속이 끝났으니 이제 내부를 단속할 차례다. 위문호에게 가담했던 문도들에 대한 처분도 결정해야 했고, 전투의 여파로 파괴된 곳들도 복구해야 했으며 그들이 해남파를 차지한 동안 벌인 일들을 파악하고 수습할 필요도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끝난 후에는, 정식으로 장문인의 자리에 오르는 취임식을 거행해야겠지. 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할 일이 많았기에, 주자엽은 자신을 믿고 따라준 수하들을 움직여 바쁘게 일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천화와 설영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주자엽과 함께 위문호가 벌였던 일들을 조사하고 파악했다.
“와, 이 새끼 소금까지 밀매했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광주에서 벌인 사업들도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그 사업들을 급격하게 확장시킬 수 있던 배경, 즉 돈이 어디에서 났는지가 궁금했는데 그것이 밝혀졌다. 바로 소금의 밀매. 이 시대에는 소금이 무척이나 귀한 자원이다. 때문에 황실에서 허락해준 일부 지역, 일부 단체에서만 소금을 만들고 유통할 수 있었으며 엄중하게 관리가 되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곳 남해도이고 해남파였고. 헌데 위문호는 그것을 빼돌려 뒷돈을 만들었다. 잘못 걸리면 삼족을 멸하는 정도가 아니라 해남파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미친 짓거리였지만, 위문호는 대담하게도 장부를 조작하고 생산량을 속여 몰래 팔아먹었다. 그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광동성 일대에 사업을 문어발식으로 확장한 것이고. 더구나 불법적이고 세간의 질타를 받을 수 있는 일들까지 서슴지 않고 벌인 까닭에 어마어마한 자금이 모여있었다. 천화가 도방을 털어먹으며 나름대로 해남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생각했지만, 그들이 보유한 금액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정도다.
“어쩔 셈이야?”
“불법적인 것들은 모두 처분할 겁니다. 밀매 사실을 밝힐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환원을 해야겠지요.”
때문에 그것의 처분에 대해 묻자 주자엽은 주저 없이 사업을 정리할 뜻을 밝혔다. 도방을 폐쇄하고 고리대금업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은 물론, 그동안 고리대금업에 걸려 파산한 이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산파의 빚도 사라지게 될 테고, 임봉곤 역시 풀려나게 될 테니 천화도 제법 만족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머지 사업들이 남긴 했지만, 그것까지 일시에 처분해버리면 광동성의 경제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기에 적당히 관리하기로 했다. 더불어 거기서 벌어들이는 수익들은 적당한 사회공헌을 통해 어느 정도 지역 사회에 돌려주기로 했고. 그밖에 마교로 전해지던 자금은 당연히 없앴고, 천화와 상의하여 그들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들을 마련했다. 바로 남만야수궁과 만금상단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야수궁이 있는 남만땅과 남해도는 멀다면 멀지만 가깝다면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육로를 이용해 광서성을 거쳐 이동할 경우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바닷길을 이용한다면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남만야수궁의 고수들 중에는 물에 사는 영물들을 다루는 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마교에 대한 방비는 어느 정도 될 터였다. 반대로 야수궁이 난처한 상황에 빠졌을 때, 해남파가 도울 수도 있고. 거기에 만금상단을 통해 그들에게 허락된 소금 판매권을 행사함으로써 굳건한 협력 관계를 만들기로 했다. 소금은 큰돈이 되는 사업이고, 당장 천화 덕분에 남만과의 교역도 진행하는 중이니 남해도까지 손을 뻗히는 것은 그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렇게 벌어들이는 수익의 일부로 무인들을 사서 남해도의 방어에 힘을 보태는 것쯤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아니겠지. 이 건은 금무성이나 만금상단과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들이 아니면 다른 거상들이라도 얼씨구나 달려들 테니 걱정은 없었다. 물론, 이 소금 판매 건에서 발생하는 수익 중 일부는 천화에게도 돌아올 터였다.
“정말 그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천화 님께서도 남해삼십육검을 익히셨으니…….”
“됐어. 귀찮은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럼에도 받은 것이 워낙 컸기에 주자엽은 더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사실 해남파의 법도에 따르자면 남해삼십육검을 익힌 천화가 해남파의 장문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다른 이라면 몰라도 천화라면 기꺼이 양보하겠다는 듯 주자엽이 그를 추대했지만, 천화는 남해도에 묶여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적당한 이익을 챙기는 쪽으로 결정하며, 더 이상 해남파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 그리고 ‘그곳’은…….”
“원하시는 만큼 사용하십시오. 필요하신 물건은 얼마든지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원래대로라면 장문인만 알고 있어야 하는 어떤 장소를 사용할 권한을 얻은 것이다. 그것을 천화가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만도 했지만, 이미 진 남해삼십육검까지 알고 전수해준 그가 아닌가? 주자엽은 천화를 거의 조부 모시듯 하고 있었기에 허락은 쉽게 떨어졌다.
‘거기도 그대로일지 모르겠군.’
무신지로 때와 같다면, 이곳에서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천화.”
“응?”
그렇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지고 전각 밖으로 나왔을 때, 설영이 불현듯 진지한 얼굴로 천화를 돌아보았다.
“우리, 한판 하자.”
“……뭐?”
살풋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말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