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포달랍궁과 마라혈교 (4)2022.03.22.
“그러니까, 교주가 죽었다고? 붉은 머리를 한 무인에 의해서?”
“……예. 그리고 흉수는 성배에 담긴 힘을 강제로 취했습니다.”
살아남은 술법가가 전한 이야기는 놀라웠다. 보이지 않던 마라혈교의 교주가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분명 무신지로에서는 꽤나 후반까지 버티다가 포달랍궁과 일전을 벌이면서 전사하지 않았던가? 아직 죽기에는 많이 이르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를 죽인 자들이 성배의 힘을 취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아니, 아니. 그러면 그자가 교주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라혈교의 율법대로라면 그게 맞을 텐데?”
“아닙니다. 성배는 그자를 거부했습니다.”
“거부했다?”
“예. 성배가 그자의 손을 밀어내는 것을 모두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자신의 안에 담긴 힘도 허락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자는 그것을 억지로 취했습니다. 힘은 폭주했고, 놈을 막아서던 교주님께서 돌아가셨지요. 그 후에 당연히 자멸을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지요. 저희는 그런 자를 교주로 모시지 않습니다.”
성배의 힘을 억지로 취한다? 그것이 가능한 일이던가? 고인물들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화경에 오른 자신조차 약간이라면 모를까 절반 이상 차 있는 성배의 힘을 흡수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기에, 천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또 다시 튀어나온 붉은 머리라는 표현. 그자는 대체 누구이길래 이 같은 일을 벌이는 것일까? 예정된 미래를 바꾸고 있는 것일까?
“그게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예.”
시기도 참으로 미묘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대로라면, 붉은 머리가 성배의 힘을 탈취하고 마라혈교의 교주를 죽인 것은 화령검왕이 죽은 시기와 비슷했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천화는 마라혈교가 당한 것이 먼저라는 판단을 내렸다. 놈들이 흑풍사를 부리며 좀 더 시간을 보내고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도 있고, 아마 힘을 얻은 뒤 시험해보기 위해 화령검왕을 죽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무인이라는 작자들은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그렇다면 마라혈교는 왜 이제 와서 포달랍궁을 공격한 것일까? 그 의문 또한 완벽하지는 않지만 얼추 해소가 되었다. 그 붉은 머리를 보낸 자들이 포달랍궁이라 생각했고, 교주마저 죽은 판국에 정면 승부로는 답이 없으니 포달랍궁의 궁주와 정예들이 빠지는 틈을 타 승부를 걸었다가 천화 일행을 맞닥뜨린 것이다.
‘뭔가 좀 이상하게 돌아가긴 하는 것 같은데…….’
결론적으로, 붉은 머리가 누구인지 또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라혈교의 추측대로 사실은 포달랍궁의 인물이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도 여러모로 무리가 있었다. 포달랍궁의 궁주가 정예들과 함께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굳이 화령검왕을 공격해가며 힘을 시험할 필요가 있었을까? 글쎄. 그들이 중원 침공을 계획하지 않는 이상 그런 짓을 할 이유도 없었고, 마라혈교를 완전히 끝장내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포달랍궁이라면 마라혈교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으니, 교주까지 죽인 마당에 아예 끝장을 보는 편이 나았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본진을 기습당하는 일도 없었겠지. 그들을 무시해서라고 보기에는 남아있는 여력이 너무 컸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지?”
머리를 조아린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그들을 보며 설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본의 아니게 마라혈교의 성물인 성배의 힘을 일부 흡수했지만, 그렇다고 마라혈교의 교주 행세를 할 생각은 없었다.
“교주가 되면 어떤 제약이 있지?”
“교주께 어찌 제약 따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은 세상의 수호자요, 이 세상 어디에도 있으신 분이시니 장소의 제약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세상의 수호자는 무슨. 남의 피를 쪽쪽 빨아대는 모기 같은 놈들인 주제에. 하고 싶은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일단 천화는 꾹 참았다. 잘만 이용하면 교통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마라혈교는? 이곳에서 떠나 자리를 옮길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건…… 아닙니다. 성물이 이곳에 있으니 저희는 떠날 수 없습니다. ‘그날’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저들이 말하는 ‘그날’이 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성물 때문에 떠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했다. 제단 위에 놓인 성배는 무신지로에서도 아무리 애를 쓴들 옮길 수 없는 물건이었으니까. 외공을 극성으로 익힌 이들도, 화경급의 내공을 모조리 쏟아부은 이들도 실패했던 일이고, 꼼수를 써서 제단을 파괴하고 옮겨보려 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제단에는 파괴 불가 효과가 걸려있는지 무슨 짓을 해도 멀쩡했던 것이다. 행동제약이 사라진 지금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신 술법 따위가 잔뜩 걸려있을 수 있었기에 무리할 필요는 없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생각을 정리한 천화가 설영과 잠시 작전을 짰다. 이 상황을 이용할 방법을 찾았다. @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나중에 포달랍궁과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괜찮아, 괜찮아. 포달랍궁 쪽에서 시비를 털기야 하겠지만 술법이라면 그놈들도 그리 밀리지는 않거든.”
취임식은 생략한다. 대신 설영이 마라혈교의 교주 자리에 오르고, 새로운 규칙을 정해주었다. 무고한 민간인들을 희생시키지 말 것. 평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모으던 마라혈교이지만, 의외로 순순히 그 지시를 받아들였다. 희생이 아닌 적당한 갈취쯤이야 할 테지만, 적어도 학살을 일으켜 그들의 피와 그 안에 담긴 힘을 취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또한 교주인 설영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포달랍궁과의 전면전을 피하라는 지시도 내려놓았다. 저들이 공격해온다면 당연히 방어를 해야겠지만, 전면전은 피하고 가급적 회피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당연히, 설영은 다시 이곳에 올 생각이 없었다.
‘마라혈교의 존재만으로도 포달랍궁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견제 효과를 갖겠지.’
마라혈교가 대막 어딘가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포달랍궁은 긴장을 하며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고 그들을 수색하기 위해 북쪽으로 무리해서 올라갈 경우, 또 다른 세외사궁 중 하나인 태양궁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태양신을 믿는 광신도이자 태양만세를 외치며 달려드는 그 미친놈들이라면, 만만치 않은 미친놈들인 포달랍궁으로서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따라서 마라혈교가 숨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미묘한 대치는 성립된다. 포달랍궁이 중원을 돕기도 어렵겠지만, 반대로 뭔가 수작을 부릴 가능성도 낮아지지. 차라리 그들이 대막에 가만히 처박혀 있는 것이 오히려 도와주는 것이었기에 천화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조사단을 이끌고, 흑풍사를 압송하여 중원으로 향했다.
“어허! 속도가 느리다! 발이 보이지?”
“아, 아닙니다!!!”
투다다다다다다- 중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빠르지만 불편했다. 조사가 길어질 것을 예상하고 말과 마차를 몽땅 팔아버린 까닭에 천생 걸어서 이동해야 했을 판이었지만, 다행히 마라혈교에서 사람과 짐을 실을 수 있는 수레는 여러 개나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타고 이동했다. 물론 말은 없다. 마라혈교 역시 대막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곳이다 보니 낙타는 가지고 있었지만 말은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천화는 흑풍사 놈들을 이용했다. 그들을 말로 삼아 힘으로 수레를 끌도록 하고, 표사와 쟁자수까지 모두 수레에 타도록 했다. 아무리 환자가 많다 해도 그들은 무공을 익힌 이들이었으니까. 그것도 꽤 상승의 무공을 말이다. 혈도를 제압했다고는 하지만 근력과 체력은 어지간한 말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고, 오히려 올 때보다 빠르게 중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흐흐흐흐흐흐흐.”
그런 놈들을 구경하며 천화는 실없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대막에서 마지막에 건진 것들이 꽤나 많았기 때문이다. 무려 마라혈교의 교주인 설영의 권한을 이용해 그들이 모아놓은 진귀한 보물들을 확인하고 챙겼기에 지금 소지품창에는 범상한 물건이 없었다.
“으히히힛!”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태양화초였다. 대막에서만 자란다는 극양의 영초이자 공청석유의 한기를 중화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약 중 하나를 손에 넣은 것이다. 태양화초가 자라기 위해서는 극양의 기운뿐 아니라 막대한 생명력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기운을 모으는 마라혈교이다 보니 한 뿌리 가지고 있던 것이다. 절정 고수를 최절정 고수까지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 막대한 기운을 품은 두 영약이기에, 천화로서도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보유한 내공은 큰 의미가 없는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다지만, 내공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더불어 화경의 경지부터는 몸 안에 품을 수 있는 내공의 제한이 해제되어 얼마든지 더 많은 내공을 보유할 수 있게 되니까. 적당한 곳에서 그 둘을 동시에 취한다면 일 갑자는 족히 되는 내공을 추가로 온전히 획득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렇게 조사단으로서는 약간의 소득을, 개인적으로는 막대한 이득을 품은 채 다시 중원 땅에 발을 디뎠다.
“응?”
끼약-! 대막이 있는 신강을 넘어, 청해마저 거의 다 지나칠 때쯤 천화의 머리 위로 한 마리의 매가 빙글빙글 돌며 울부짖었다. 이상한 징조라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천화만은 저 매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하오문의 특급 기밀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매였으니까. 그 발목에 매여 있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띠가 그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삐익!”
천화가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 길게 소리를 내자 매가 급강하를 시작했다. 마치 공격을 해오는 듯싶었지만, 천화는 가볍게 손을 들어 녀석이 앉을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흑우와 은룡 때문인지 중간에 멈칫 속도를 줄이긴 했지만 녀석도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자리를 잡았고, 천화는 발목에 매인 작은 통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미 청해로 넘어오자마자 처음 들른 마을에서 하오문 지부를 통해 대막에서의 정보를 전하고, 요청한 것이다.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인 화령검왕의 죽음과 관련된 사실은 정파 연합에서도 기밀로 취급할 만한 것이지만, 소문내지 말라는 지시는 듣지 못했으니까. 하오문에 그것을 전하는 대신, 붉은 머리에 대한 추적과 정보를 요청한 것이다. 과연 이 안에 붉은 머리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을까? 하오문의 정보력은 믿을 만한 것이지만,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인물인 데다 어디로 갔는지 행방조차 묘연한 인물이기에 기대와 침착을 가지고 그것을 확인했다.
“……어?”
순간 천화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충분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그 반응에 놀란 설영이 얼른 가까이 붙었지만 천화는 여전히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전서응이 전해준 내용은 한 가지가 아니었지만, 어느 하나 혼란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첫 번째 소식은 북해빙궁의 습격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이미 석 달쯤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천화가 대막으로 출발하기 이전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뜻이다. 북해빙궁이 괴집단에게 습격을 당했고,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그 피해 규모나, 그들이 무엇을 위해 북해빙궁을 습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습격으로 인해 북해빙궁주는 격노했고, 흉수를 찾기 위해 중원으로 나설 계획까지 세웠다고 했다. 그것을 미리 알아차린 정파 연합에서 중원의 혼란을 막기 위해 빠르게 사절단을 보내 그들을 달래었다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그 시기가 천화가 대막으로 떠난 것과 거의 맞물린다. 정파 연합에서 의도적으로 천화에게 북해빙궁의 소식을 숨겼다는 뜻이었다. 아마 북해빙궁주와의 친분이 있으니 그쪽으로 달려가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겠지. 화령검왕의 행방불명을 조사할 인원도 필요했겠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북해빙궁과의 관계를 좀 더 다져보겠다는 의도인 것이 분명했다. 지난 사절단의 방문에서는 정파 연합에 대한 호감도보다 천화 일행의 호감도만 잔뜩 올라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다시 천화에게 그 일을 맡기는 것이 부담스러웠겠지.
‘여기서도 나온다고?’
그것까지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다만, 그 일을 벌인 괴집단에 대해 하오문이 조사한 바가 더 크게 눈에 들어왔다. 흉수는 붉은 머리를 한 괴인과 그 수하들. 대막에서 일을 벌이고 사라졌다는 자들의 특징과 일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