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마교의 습격 (1)2022.03.24.
‘북해에서 대막으로 건너간 건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군.’
시기상으로 보자면 그들이 북해를 공격한 것이 먼저였고, 그 다음 곧장 대막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였다. 세외만 노리는 것일까? 대체 무슨 이유로? 북해빙궁주를 만나 이야기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러기엔 너무 멀었다. 다시 북해에 다녀오려면 최소 두세 달은 걸릴 테고, 그 사이 뭔가 일이 터질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천화는 전서구를 이용하거나 그들과 거래를 트기 시작한 만금상단을 통해 정보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북해의 일을 파악하는 것도, 붉은 머리와 그 수하들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큰 일이 터졌으니까.
“마교가, 준동을 했다고?”
천화를 대신해 그것을 소리내어 읽은 설영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마교의 준동. 스스로를 마교도라 밝힌 이들이 중원의 전역에서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지역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천화와 설영이 대막으로 향한 거의 직후부터 마교도들이 여러 중원 문파들을 습격했고, 멸문을 시키거나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채 도주한 사건들이 즐비하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들 중에는 정파의 귀감이 된다고 여겨지던 협객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지금 중원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인적이 드문 청해성을 넘어 사천이나 감숙에 들어서면 천화 일행도 알게 될 테지만, 지금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 조심하라는 추가연의 걱정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
‘벌써 이 정도까지 한다고?’
여러 변수들을 만들어내며 정사대전이 앞당겨지도록 유도한 천화였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 앞당겨질 것이라고는 그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간을 보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전면전을 하겠다는 의미였으니까. 당장 정파 연합이 무림맹으로 몸집을 키워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고, 마교가 정식으로 발호한다 하더라도 놀랍지 않을 수준이었다.
“개판이란 소리군.”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수작을 부리는 이들이 대거 나타났다. 서신에는 흉수를 알 수 없는 공격을 받는 문파들이 급격히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마교가 아닌 사파나 정파의 무리들일 터였다. 마교들이 대놓고 자신들의 짓이라고 공표하는 사건들이 많은 만큼, 평소 눈엣가시 같던 문파들을 은밀히 제거하고서 마교의 탓으로 돌리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더라도 정파 연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제한적이다. 그런 뒷공작을 펼치는 이들 중 정파 연합에 소속된 이들도 제법 있기 때문이다.
“대혼란 사태, 라는 건가?”
누구는 묵인하고 누구는 잡아들인다? 당연히 반발이 일어날 터였다.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 한데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각 문파들이 반목을 일삼는다면, 서로를 견제하느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마교 쪽에 붙어버리는 자들이 대거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해도 망하고, 저렇게 해도 망할 것이라면 문파를 살릴 수 있는 쪽으로 붙는 것이 무림인들이니까. 만약 마교가 오랜 세월 쌓아둔 힘을 발휘하고, 그것이 현 중원 무림을 압도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들의 편에 설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밖에도 몇 가지 소식이 더 적혀있긴 했지만 예상하던 바였다. 무신지로에서도 마교가 발호할 때 나타나던 현상이기도 했고, 관에서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 또한 충분히 예상하던 바였으니까.
“소림으로 가야겠어.”
“소림?”
천화가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했다. 일단 신승부터 만나봐야겠다. 하오문에서 전해준 소식에 혈마의 복권에 대한 말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비틀린 미래에 대해 그는 뭔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 빨리 달려! 뒈지기 싫으면!”
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흑풍사를 재촉하여 이동속도를 높였다. @
“오늘은 이곳에서 쉬어가시죠. 근방에 정파 연합에 소속된 비사문이 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한걸음에 소림이 있는 하남성까지 달려가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무리였다. 이미 청해성을 조금 무리해서 지나온 까닭에 말, 아니 흑풍사의 비적들도 많이 지친 상태였고 일행도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기에 감숙성의 한 마을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이참에 영양가 없는 흑풍사 놈들은 비사문에 맡기고, 새로 말을 구해 갈아타며 이동을 할 참이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천화와 설영, 그리고 구파의 네 고수들이었기에 다른 표사며 쟁자수들 역시 이쯤에서 헤어져도 문제는 없었고 말이다.
‘모산파의 고수들까지는 데려가야 하나?’
술법가로서의 의견을 물을 지도 모르니 그들까지는 데려가야 할지 모르겠다. 당문악? 결국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내고 돌아온 녀석이야 알아서 집에 가겠지. 어차피 사천 땅은 이곳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이니 말이다.
“이리 오너라!”
비사문에 가까워지자 구파의 고수들이 슬쩍 천화의 눈치를 보며 체면을 차렸다. 벌써 소문이 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미 강호에서 쌓아놓은 명성이 있다 보니 남의 이목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어차피 천화야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그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목청을 높여 주인을 부르는 객의 모습을 보았다. 끼이이익-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명호 도장님이 아니십니까! 어서 들어오시지요!”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주인이 튀어나왔다. 비사문의 문주가 한눈에 그를 알아보고 반색하여 맞이했다. 그 모습에 체면을 차렸다고 생각을 한 것일까? 천화를 힐끗 돌아본 명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앞장서서 안으로 한걸음 성큼 내딛었다.
“모두 모여.”
그 사이, 천화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며 나머지 인원들을 뭉치게 만들었다.
“헛?”
심지어, 혈도를 제압해놓았던 흑풍사까지 해혈을 해주었다. 그들의 무공 수위로 볼 때, 아무리 수레를 끄느라 힘이 빠졌다 해도 천화만 없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 수준임에도 그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의아한 일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일까. 이래놓고 도망치면 뒤통수치려는 건 아니겠지? 이미 오는 동안 복수의 기회를 주겠다며 해혈을 해주고, 덤비면 해죽으로 만든 타구봉으로 신나게 두들겨 팼던 기억이 있기에 흑풍사는 제압된 혈도가 뚫리고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천화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크지 않게 장원을 가득 메웠다.
“어휴, 저 화상들. 그저 조금만 우쭈쭈 해주면 정신이 나가서 호랑이굴인지도 모르고 기어들어가네.”
“……예?”
작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그 말에 모두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은, 이곳이 호랑이굴이라는 소리였으니까.
“?!”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곳은 정파 연합의 한 지부로 인정을 받을 만큼 이름난 명문인 비사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호랑이굴이라니? 천화가 뭔가를 잘못 안 것은 아닐까? 내가 여기 문주랑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어? 쐐애애액-
“피하시오!”
채앵-!! 화산의 명호 도장이 눈을 껌벅거리는 사이, 정적을 꿰뚫고 날아온 검을 풍진자가 대신 막아내었다. 풍진자 역시 무려 초절정의 고수로, 무림 백대고수 중 하나였지만 막아선 손이 파르르 떨려올 만큼 막대한 공력이 담긴 한 수였다.
“네놈, 비사문주가 아니구나!”
비사문주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막강한 공력에 호통인지 비명인지 모를 외침을 내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칼침이었다. 지독한 악의였다.
“흐흐흐. 다른 문파의 무인들이 자신보다 강할 리가 없다는 오만함은 여전하군.”
그것은 비사문주가 맞았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힘을 얻었을 뿐이었고, 그 힘은 무려 초절정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모두 뭉쳐! 이미 포위됐다!”
간신히 비사문주를 밀어내며 표정을 굳히는 구파의 고수들과 달리, 천화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냉정하게 일행을 지휘했다. 도망치려 한다면 어떻게든 뚫어낼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표사들과 쟁자수들은 반드시 죽고, 모산파의 고수들 역시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런 인도적인 차원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이들도 아닌 백대고수가 무려 넷. 그들이 올 것을 알고 함정을 판 놈들이기에, 도주만을 택한다 해도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명문 정파로 분류되는 비사문마저 넘어갔다면, 주변 다른 문파들 역시 마교에 넘어갔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화경급이라도 온 건가.’
아직 감지되고 있지는 않지만 마교 측에서 화경급의 고수 하나를 붙여줬거나, 그들에 필적하는 고수 여럿을 붙여주었을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마공……!”
뒤늦게 비사문주에게서 피어오르는 기운의 특징을 알아차린 명호 도장이 노성을 터트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이었다.
“정공이 무엇이고, 마공이 무엇인가? 너희들보다 나으면 마공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마인이 되리라.”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말들. 사실 무신지로에서 저런 자들은 차고 넘쳤다. 정파가 득세하는 기존 중원에서는 그들의 뜻에 따라 비위를 맞춰가며 움직였지만 가슴속에는 작지 않은 한을 품은 자들이다. 새로운 강자가 나타날 때마다 사공이니 마공이니 몰아가며 찍어누르던 구파일방, 그리고 오대세가의 업보이기도 했다.
“정파인의 긍지를 팔아넘긴 자의 말은 듣고 싶지 않다! 내 오늘 너를 죽여 본보기를 보이리라!”
하지만 명호 도장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자신들의 과오가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에 지배당하는 것을 정당화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 마공이라고 모두 악독한 방법으로 연공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마공은 사용자의 정신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보다 폭력적으로 변하고, 화를 참지 못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니까.
“죽음으로 속죄하거라!!”
강기로 그려진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백대고수라는 말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하듯, 화산 무공의 정수라는 매화가 허공을 가득 채웠고 매화향이 진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비사문주가 아무리 마공으로 급격한 경지 상승을 맛봤다고는 하나, 명호 도장은 이미 오래 전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명문 중의 명문인 화산 검공의 정수를 담아 검을 떨치니, 일격에 죽이지는 못해도 채 50합을 버티지 못할 것이 자명해보였다. 부아아앙-!!
“!!”
명호 도장의 검 끝에서 피어난 매화들이 비사문주를 노리려는 순간, 그들의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져내렸다. 마치 누군가 탑을 뽑아 던지는 것처럼 크고 묵직한 무언가가 달려들던 명호 도장을 짓이길 듯 쏘아진 것이다. 콰아아앙!! 다급히 강기의 방향을 틀어 방어해보지만, 피어난 매화꽃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중첩된 강기가 힘을 잃고 흩어졌고, 간신히 막아낸 명호 도장의 검이 부러질 듯 휘청거렸다. 겨우겨우 검이 부러지는 것은 막았다지만 핏물을 왈칵 토해내며 깊은 내상을 입고 말았다.
“그놈 참 잡스러운 짓을 하는구나.”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거구의 사내. 백발이 성성한 것과 다르게 그 어떤 외공의 고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우락부락한 덩치를 자랑하는 이가 터벅터벅 걸어와 자신의 병기를 회수했다. 새하얀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봉을 가볍게 쑥 뽑아냈다.
“그거 잘됐군. 우리도 너희를 죽여 본을 보이려 했음이니.”
“네놈은?!”
쿨럭거리며 죽은 핏물을 뱉어낸 명호 도장이 상대를 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일단의 무리들이 장원을 에워싸듯 포위하며 나섰다. 마교. 이미 그들은 마기를 감출 생각 따위를 하지 않았다. 이곳에 나타난 이유 자체가 스스로를 밝히고 정파의 대표 고수들을 죽여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마교의 발호를 알리는 신호탄. 그것에 불을 붙이는 땔감으로 이들을 사용할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