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마교의 습격 (2)2022.03.27.
‘빠르군. 그것도 아주 많이.’
하오문의 서신을 통해 조심하라는 경고는 들었지만, 천화조차 이렇게 노골적이고 급진적으로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표정을 굳혔다. 일행들을 한곳에 모으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독은?”
“하독한 흔적은 없습니다.”
“진법이나 술법은 어떻습니까?”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것이 없더라도 우리를 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놈들이 독을 풀거나 진법 따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문악과 모산파의 고수들이 확인한 것이니 확실하겠지. 그렇기에 오히려 위험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것이 없어도, 무려 백대고수 중 넷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니까. 그들이 천화와 설영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초절정 고수 여섯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전력을 데리고 왔다는 소리였기에 모두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모두 물러나세요.”
“으흠…….”
그들의 등장에 구파의 고수들이 긴장하며 눈알을 굴렸다. 아마도 판단을 하는 것이겠지. 이곳에서 싸우는 것이 옳을지, 자신들만이라도 길을 뚫고 도망을 치는 것이 맞을지. 스스로의 무력에 대해 높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지만,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할 만큼 멍청이들은 아니었기에 눈알을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냥 둔다면, 자신들만이라도 도망치려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이미 짐작하는 듯싶었으니까. 객관적으로 따져보더라도 그들이 이곳에서 죽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은 일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 한들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또한, 간신히 도망쳐 목숨을 부지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퍼지면 정파의 사기는 떨어지고, 다른 이들을 버리고 떠난 그들에게 비난이 쏟아지겠지. 그 모든 것이 눈덩이처럼 굴러가 나중에는 큰 영향을 끼칠 터였다.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는 정파라면 필요가 없으니까. 차라리 마교에게 투항하여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테니까.
“어디 보자……. 별호가 뭐더라? 탑골마왕이던가? 이제 뼈마디도 성하지 않으실 텐데 멀리도 나오셨네!”
그렇기에 천화가 대신 나섰다. 구파의 고수들에게 전음을 날려 방진을 짜도록 만들고, 자신이 마교의 우두머리를 상대하기 위해 앞으로 나선 것이다. 탑골마왕 인가충. 그는 영물의 뼈로 만든 거대한 봉을 사용하는 전대의 고수였다. 멀리서 보면 작은 탑처럼 보일 만큼 커다란 무기인 데다 여느 보검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내구력까지 지녀 타격계의 무공에서는 손에 꼽히는 강자였다. 그리고 무려 화경의 경지에 든 강자이기도 했다. 천화가 그러했듯, 구파의 네 고수가 동시에 덤빈다 한들 감히 제압할 수 없는 강자 중의 강자. 마교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인 그가 기선제압을 위해 먼 걸음을 한 것이다.
“어린놈이 방자하구나. 뼈마디가 분질러지고도 그딴 소리를 할 수 있을지 어디 보자꾸나.”
천화의 도발에 그가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무시하는 듯 보이지만 솜털 하나까지 바짝 선 것이, 그 역시 천화의 무위를 가늠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니까.
‘화경의 고수는 오랜만이군.’
인간을 초월하여 신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 칭해지는 경지의 두 고수가 기세를 발산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영감이나 조심해요. 그 나이에는 뼈도 잘 안 붙는 거 알죠?”
츠츠츠츠츠츳- 퍼엉! 펑! 펑!! 둘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기파가 중간에서 충돌하며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일류 이하의 무인들이라면 그들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강력한 파장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아직 두 사람 모두 제대로 힘을 쓰지 않은 것이라는 것에 있었다.
“제법이군.”
화경의 경지를 드러내며 자연지기와 내기를 동화시키던 인가충이었기에 즉시 천화의 경지를 알아보았다. 화경의 기운을 맞대응할 수 있는 것은 같은 화경의 고수뿐이었으니까.
“여기서 죽이지 않으면 곤란하겠어.”
그렇기에 더욱 살의를 피워올렸다. 반로환동이 아닌 이상, 천화의 나이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30대였으니까. 내공의 화후가 깊은 고수들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지만, 아무래도 그 경계는 있었다. 천화처럼 20대 초반처럼 보이려면 아무리 어려도 30대 중후반쯤의 나이 정도여야만 하고, 60이 넘어가는 이들은 화경의 경지에 오른다 해도 자신처럼 4~50대처럼 보이는 정도가 한계였다. 그러니 무조건 이 자리에서 죽여야만 했다. 저만한 나이에 화경에 올랐다면, 더 나이가 들고 성장한다면 대업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으읏?”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일까? 장원을 둘러싼 마인들이 진형을 갖추었다.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마기를 일으키며 압박을 시작한 것이다.
‘이놈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천화는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이미 마교의 발호는 기정사실화되었다. 설령 정파의 고수들을 꾀어내어 처치하는 계획이 틀어진다 하더라도, 그들이 다시 십만대산으로 숨어들어갈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천화도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탑골마왕은 지금 상태에서 가장 상대하기 쉬운 화경의 고수 중 하나였다. 적어도 천화에게는.
“한 가지만 물읍시다. ‘붉은 머리’를 알고 있습니까?”
한바탕 맞붙기에 앞서, 천화는 마지막으로 놈에게 물었다. 백대고수인 그들을 노리고 있다는 건 알지만, 흑풍사도 함께 압송 중이다 보니 혹여 그들을 죽여 증거인멸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붉은 머리? 염령마녀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허나 놈의 입에서는 다른 이름이 튀어나왔다. 마교에서 적발로 유명한 것은 상대의 혼을 태워 죽인다 하여 염령마녀라 불리는 이였고, 자연스레 그녀를 떠올린 것이다.
‘마교가 아닌 건가?’
화령검왕을 죽일 정도의 고수를 보유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자를 먼저 떠올려야 할 텐데 말이다. 더구나 이제는 마교의 힘을 감출 때가 아니라, 드러낼 때가 아닌가?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화령검왕을 죽였다고 내세우고 다녀도 모자랄 판이었기에 천화는 짐작했다. 붉은 머리라는 녀석과 그 일행들은 마교와는 또 다른 집단이라는 것을.
“흠. 나이가 들어서 오락가락하시는 건 아니죠? 뭐, 그렇다면 굳이 고문해서 정보를 캐낼 필요까지는 없겠네요.”
“더 이상 못 들어주겠군!”
콰앙!!! 먼저 움직인 것은 놈이었다. 마치 당연한 일이라는 듯 이야기하는 천화의 말에 발끈하며 거대한 봉을 휘둘렀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가? 성격도 급하시네!”
콰앙!!! 검과 봉이 부딪혔다. 쇠와 뼈가 부딪힌 것이건만 이미 무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경지의 두 사람이었기에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윽, 하여간 힘만 좋다니까!’
단순한 휘두르기 같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실로 막대했다. 내공을 응축시킨 정도가 아니라 봉을 중심으로 자연지기가 공명하여 회전했고, 그것과 부딪히자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천화가 아니었다면, 무명검이 아니었다면 그 일합을 버티지 못하고 무기를 놓치거나 머리가 터져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천화가 전력으로 놈과 부딪힌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고고, 죽겠다. 팔이 떨어지겠군.”
일단은 자신의 현 상태를 가늠해보기 위함이었다. 내공 운용 능력이라면 시험이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통제를 하는 중이었지만, 육체 능력은 비교 대상이 필요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장을 해왔고 역근경을 통해 커다란 육체 능력의 상승을 보였지만, 화경의 고수들 중에서도 괴력으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탑골마왕을 통해 현 상태를 점검해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만족했다. 힘을 분산시켰기게 버틴 것이지, 그냥 정면으로 부딪히려고만 했다면 밀렸을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탑공마왕의 일격을 버틸 정도라면 그럭저럭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힘에서 밀려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잠깐 타임!”
“……?”
일합의 겨룸. 단 한 번 부딪힌 것치고는 후폭풍이 만만치 않아 내공이 약한 이들은 몸이 밀려날 만한 충격파가 일어났지만 둘은 서로를 인정했다. 그리고 다시 본격적인 무공을 펼치려는 순간, 천화가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이 잠시 멈추라는 것임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탑골마왕은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그 말에 따라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만한 상대를 만나는 것은 무인으로서도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곳에서 죽여야 할 상대라지만 가급적 오랫동안, 전력을 다해 부딪치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기다려준 것이다. 적어도 천화가 도주를 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또한 천화가 무슨 짓을 하든 승리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상태창.”
“무슨 짓이지?”
그런 탑골마왕의 머뭇거림을 보고 천화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또 다시 자신만 알 수 있는 말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좋았어.”
아껴두었던 여유 능력치를 투자한 것이다. 내공이 상승하고 레벨이 상승하며 자연히 육체 능력이 상승하지만, 무신지로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천화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충분한 기운을 다루기 위해서는 충분한 육체의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공만 상승해도 육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기에 순수한 육체 능력을 갈수록 무시하거나 등한시하기 마련이지만, 보다 높은 경지에 오를수록 육체와 내공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친 상태에서도 강해질 수는 있지만, 일정한 벽을 넘기 위해서는 정기신의 조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경지를 넘는다면, 몸이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릴 수도 있을 터였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그렇게 짧은 순간 강화를 마친 천화가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해야 약간의 육체적 강화일 뿐이다. 그가 가진 능력에 비하면 보잘 것 없고, 내공에 비한다면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미력한 힘이었지만 하나의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이 중요했다. [별호 : 괴력난신을 획득하셨습니다.] 자신이 가진 여유 능력치의 상당 부분을 [근력]에 투자한 결과, 새로운 별호와 함께 추가 효과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힘은, 그가 가진 근력을 일정 비율로 상승시켜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검무한.”
천화가 가만히 검을 들어올렸다. 자연지기와 하나가 된 그의 내공이 주변을 압도하며 무한히 커져나갔다.
“헉?!”
“피, 피해라!!”
이번만은 천화도 위력을 제한하지 않았기에, 주변에서 느끼는 압박감은 실로 대단했다. 최소 절정 이상의 무인들이건만, 천화가 일으키는 기운의 여파만으로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걸음을 떼어 물러난 것이다.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죽음을 피하고 싶은 본능이 먼저다. 설령 천화가 겁을 주고 도망을 치려하는 것이라 한다 해도, 지금의 공격은 절대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좋구나! 천양무궁!”
그 압박감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오직 같은 화경의 고수인 탑골마왕 인가충뿐이었다. 거대한 골봉을 붕붕 돌리는 놈의 몸뚱아리가 자연지기와 동화되었다. 하늘이 되고 땅이 되어 그 어떠한 힘에도 변하지 않는, 자연 그 자체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응. 다음 샌드백.’
그것이 실수였다. 화경급의 고수들이 자주하는 실수 중 하나이기도 했다. 같은 경지의 고수들과 겨루어 볼 일이 없기에, 경지가 늘고 사용할 수 있는 힘의 한계가 어마어마하게 확장되었음에도 이전과 같은 방식의 전투를 펼치는 것이다. 일단 방어를 굳히고, 그 다음 반격을 노린다.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방식이지만, 그것을 일반적인 무공의 겨룸에서나 통용되는 일이었다. 주변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경급의 고수가 굳이 그런 선택을 한다는 것은 독이었다.
“?!?”
“늦었어, 임마.”
콰앙! 쾅! 쾅! 쾅!!! 장원 전체를 뒤덮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내리쳐진 천화의 검이 인가충의 골봉을 내리찍었다. 영물의 뼈로 만든 봉쯤은 금방 부러뜨릴 수 있는 무명검이지만, 자연지기를 빨아들이며 방어를 굳힌 덕분에 파괴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공격 후에 자연스럽게 따라와야 할 빈틈이 천화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운의 발출은 하나의 흐름이고, 일격이든 연격이든 한바탕 공격을 퍼부은 이후에는 마땅히 흐름이 끊기는 부분이 있어야 하거늘, 천화의 공격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무한히 이어질 것 같은 연격, 아니 폭격이 그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말했잖아. 일검‘무한’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