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신승의 조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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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화 신승의 조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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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화> 신승의 조언 (2)
2022.04.05.
“그새 많이 늙으셨네요?”
“늙은이가 늙는 게 어디 특별한 일인가? 다 순리대로 흘러가는 게지.”
“흠…….”
소림신승.
일전에 장경각에서 마주쳤던 그는 많이 늙어있었다.
그때 이후로 시간도 제법 흘렀고, 그의 말처럼 늙은이가 주름 좀 더 생기는 것이 뭐가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공에 대해 아는 자들이라면 뭔가 이상함을 느낄 터였다.
내공의 화후가 깊어갈수록 육체는 젊음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으니까.
화경이 아니라 초절정의 고수만 되더라도 100세 노인이 5, 60대쯤 되어보이게 만들 수 있으니, 갑작스런 신승의 노화는 그에게 뭔가 이상이 생겼음을 알려주는 지표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육신의 주인이 순리를 거스르려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작용을 하는 것이었으니까.
‘천기를 거스른 부작용인가?’
다만 한 가지,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있었다.
신승이 천기를 읽고, 그것을 천화에게 발설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을 뿐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천기가 어그러졌다면 어떤 식으로든 천기를 읽은 자에게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다.
내공을 잃든, 젊음을 잃든.
어쩌면 무공 자체를 상실하거나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기에 천화는 살짝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승의 변화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어그러질 미래가 걱정되는 것이기도 했다.
“왜 자네를 대막으로 보냈는지가 궁금하겠지? 그건 죽을 때가 다 된 노인의 변덕이자 욕심이라고 해두지. 혹여 자네라면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싶었다네.”
“그래서, 제가 뭔가를 바꾼 것 같습니까?”
“글쎄.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천기의 큰 흐름은 그대로이지만 작은 물줄기 정도는 바꾼 것도 같고.”
의뭉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신승의 선문답이 조금 답답하게도 느껴졌지만, 직접적으로 뭔가를 이야기한다면 더 심한 반작용을 겪으리라는 걸 알기에 천화도 최대한 돌려 물었다.
“그럼 그 물줄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강으로, 바다로 흐르고 있는지요.”
“그건 자네가 하기에 달렸지. 하지만 명심하게나. 바다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다네.”
“……?”
또 다시 이어진 선문답.
중요 분기 임무의 결과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신통치 않았다.
결국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바다가 더 넓다는 건 무슨 말일까?
“모든 것은 자네의 선택에 달렸다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저 가능한 피를 덜 보아야 한다는 것뿐이야. 알 수 없는 천기의 엇갈림으로 자네가 알지 못하는 일들도 많이 생길 테지만, 흘린 피가 적을수록 자네와 이 무림이 감당해야 할 업보도 줄어든다는 것만을 명심하게.”
“으흠…….”
가능한 피를 적게 흘려야 한다는, 다소 꼰대 같은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 말을 하는 것이 천기를 읽은 신승이기에 그저 평범하게 들리지 않았다.
특히나, 신승이 천기를 누설해서라도 암시하려 무언가가 있는 듯하여 더욱 곱씹게 만들었다.
“뭔가 더 말씀해주실 건 없습니까?”
“흘흘. 이 늙은이를 아예 죽일 참인가? 아쉽지만 당장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인 듯하군.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 이해해주게.”
“쩝. 할 수 없죠.”
목숨을 걸고 이야기하는 이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신승 역시 자신에게 바라는 바가 있으니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일 터였다.
그가 천기를 통해 읽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겠지.
“그럼 나는 이만 사라지도록 하지.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네만, 부디 자네가 대의를 위해주기를 바라네.”
“벌써 가십니까? 꼭 그 얘기가 아니더라도…….”
마치 다시 볼 일이 없는 것처럼 던진 마지막 말과 함께 신승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화경이 아니었나?’
그 말이 찝찝하기도 했지만, 천화는 자신조차 감지하지 못한 신승의 기운을 다시금 떠올리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미 한 차례 현경의 경지를 밟아보았기에, 같은 화경의 고수들 중에 자신보다 더 기를 민감하게 느끼고 다룰 수 있는 이가 없다고 자부하건만, 조금 전 마주한 신승의 경지를 읽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마지막에 보여준 경신술 또한 마치 축지법을 보는 것 같았다.
이형환위 따위가 아니라 그냥 순간이동이라 표현을 해야 할 것 같은 그것은 보고도 믿기 힘든 수준이었으니까.
“설마, 아니겠지?”
그렇기에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현경의 경지라면 신승이 혼자 나서더라도 마교를 때려잡고 정사대전을 막아내는 것쯤은 간단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굳이 자신에게 맡긴다?
왜?
뭔가 이유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2회차라고 지옥불 난이도라든가……?’
몇 가지 끔직한 상상이 떠올랐지만,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다.
천화는 얼른 생각을 흩어버리며 전각을 빠져나왔다.
소림에서 제공하는 숙소에 머물며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선불 요금인 대환단이 전달되기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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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신승과의 면담을 마친 천화는 그 길로 숭산을 내려갔다.
대환단을 선불로 당겨 받기로 하긴 했지만, 내부 절차를 밟는다는 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물론 백연 대사가 강력하게 주장을 할 테고, 어쩌면 신승이 거들어 금방 끝이 날지도 몰랐지만 그렇다 한들 적어도 한두 달은 걸릴 것이 자명했다.
만약 바로 가져가라는 연락이 온다면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고 말이다.
‘백연 대사도 당분간 꽤 바쁠 테고.’
애초에 백연 대사부터가 당장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 그렇게 빠르게 챙기지 못할 가능성도 높았다.
기존 협력 체계를 강화하는 데 그치던 정파 연합을 파하고 무림맹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신설하는 일은, 그저 하겠다고 공표하는 것으로 금방 처리될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구파일방 오대세가는 물론 중원 곳곳에 있는 대문파에게 동참 의사를 받아야 했고, 절차에 따라 각 조직에 맞는 인원들도 뽑아야 했으며, 그것을 위해 간단한 시험도 준비해야 했다.
시간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구파일방 오대세가가 일방적으로 선출하고 자리를 차지한다면 반발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비무와 시험을 통해 인원을 선별하여 직책을 맡겨야 하고, 그들에 대한 뒷조사를 통해 간자는 아닌지 선별해야 하니 시간과 인력, 자금이 엄청나게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백연 대사는 초대 무림맹주의 자리를 거절한 대신 무림맹이 체계를 갖추기 전까지 맹주 대행을 맡기로 했기에, 이리저리 불려 다니고 회의를 하는 등 일들이 넘쳐났다.
그러기 위해 잠시 소림을 벗어날 필요도 있었고.
때문에 천화는 대환단의 지급 시기를 대충 마교의 개파식 직전으로 잡았다.
이동하는 시간도 있으니 약 한 달 전쯤에 지급해주겠지.
먹고 소화시키기 빠듯하긴 했지만, 그래도 흑우가 있으니 이동 시간은 어찌어찌 맞출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동안, 잠시 외유를 다니며 모종의 작업들을 해놓을 참이었다.
“이 정도면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고 봐야겠는데?”
하오문으로부터 받아든 정보들을 함께 받아본 설영이 가볍게 혀를 찼다.
마교의 개파식 이전까지 잠시 소강상태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잠잠해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미 마교에 투신했음을 밝힌 이들이 제법 되었기에 그들을 공격하는 정파 세력들이 있었고, 새롭게 마교도임을 밝히며 기존의 앙숙들을 제거하려 드는 이들도 있었다.
마교가 직접 나서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상 마교와의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아니,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지.’
또한 그렇게 튀어나온 마교 투신 세력들에는 은밀히 녹아든 마교의 마인들도 힘을 보태고 있었으니, 전면전만 하지 않을 뿐 국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 탓에 하루에도 수많은 전투 소식이 있었고, 벌써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더불어, 새롭게 명성을 떨치는 이들도 나타났다.
“얘가 여기서 왜 나와?”
명성을 얻는 것은 정파 소속의 인물들만이 아니다.
악명을 떨치는 마인들도 다수였기에 하오문조차 매끄럽게 정리하지 못할 만큼 새로운 고수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중이었고, 그중에서도 천화의 눈길을 끈 인물이 있었다.
검귀 소운휘.
귀신같이 검을 다룰 뿐 아니라, 마인들을 악착같이 따라붙어 쓰러뜨린다는 신진 고수의 이름이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천화 자신이 비형검법을 전수한 아이였으니까.
“운휘? 그 애가 벌써 고수가 됐다고? 그것도 절정 이상?”
설영이 얼떨떨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당장 자신들이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무공을 전혀 모른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가 아니지 않았나?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지만, 내공은 하루아침에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적힌 설명을 보자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도왕이 가르쳤단 말이지?”
어머니의 요양을 위해 하오문에 맡겼던 것이 나비효과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도왕 역시 아내의 치료와 요양을 위해 하오문에게 의탁을 한 모양이었고, 천화라는 접점을 찾은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결국 도와 검이라는 상이한 무기를 사용함에도 사승관계를 맺었고, 도왕이 소운휘를 단숨에 고수로 만든 것이다.
“이러면 말이 되지.”
그렇다 한들 이전이었다면 어려웠겠지만, 도왕 역시 천화와의 만남에서 얻은 깨달음을 이제는 완전히 수습했다고 한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천하십대고수의 중하위에 속해있던 그였지만,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면 능히 상위에 두어 마땅할 테니 소운휘를 단숨에 키워낸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부족한 내공? 굳이 격체전공 따위를 할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하오문이 알아서 긁어모아다 주었을 테니까.
어쨌든 하오문에 의탁한 둘이 아니던가? 그들에게 은혜를 입힌다면 나중에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계산을 마쳤을 테니, 그들을 마치 하오문의 고수 대하듯 우대해주었을 터였다.
굳이 어머니와 아내라는 인질을 잡지 않더라도 그 둘이 은혜를 모르는 척할 이들이 아니라는 것도 파악했을 테고.
소운휘로서는 기연의 기연을 거듭해서 만난 셈이다.
“쳇. 누구는 개고생을 해서 꾸역꾸역 경지를 올리는데, 누구는 인맥빨로 단번에 고수가 되네.”
“……그거,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천화의 신세 한탄에 설영이 눈을 흘겼지만, 천화는 못 들은 척 나 때는 어떻고 하는 둥의 꼰대 같은 말들을 한참이나 늘어놓았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는 건데?”
“음, 수금하러?”
대략적인 정보들을 확인한 천화는 그 정보와 자신의 기억이 일치하는지를 확인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다른지를 확인한 뒤, 그것이 일으킬 변수까지 세세하게 파고들었다.
천하의 어떤 정보 조직도 불가능할, 오직 천화이기에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그것에 따라 행보를 일부 수정해야 할 수도 있었지만, 다행이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마교가 더 심하게 치고나와준 덕분에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먼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만금상단.
금무성을 만나 그동안 쌓인 자기 몫의 돈을 챙기는 것이 먼저였다.
정사대전으로 인해 만금상단이 어찌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악착같이 돈을 모아온 이유가 이때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같이 벌었으니, 이제 정승같이 쓸 차례였다.
이미 돈 쓸 계획을 쫙 세워둔 천화는 약속된 장소로 이동해 금무성을 만났고, 그에게 여러 사업을 밀어준 대가로 받기로 한 자기 몫의 수익을 확인했다.
“여기 있습니다. 형님.”
“오!!!”
백지전표.
오랜만에 다시 만난 금무성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백지전표였다.
소수민족과의 교류, 초원과 북해를 잇는 상행, 해남파를 통한 소금 판매와 남만과의 교역까지.
천화가 연결해준 사업들로 몇 달 만에 벌어들인 돈은 만금상단이 기존 몇 해간 벌어들인 돈보다 많았다.
하나같이 작은 사업이 없었기에, 이것들에 집중하기 위해 기존 사업 중 일부를 접어야 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만금상단이 얻은 이익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고, 이 정도 규모라면 능히 천하십대, 아니 삼대상단에 이름을 올려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천화 몫으로 배분된 돈 역시 어마어마했다.
천화가 얼마를 백지전표에 적어넣든 모자람이 없을 만큼.
“얼마나 필요하실지, 또 얼마짜리 전표로 쪼개드리는 것이 좋을지 몰라 준비해봤습니다. 원하신다면 작게 쪼개서 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내가 원하는 만큼 적어넣으면 된다는 말이지? 진짜? 괜찮겠어? 후회할 텐데?”
“어……. 그게, 일반적으로는 그렇기는 한데…….”
물론 천화를 몰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이긴 했지만 말이다.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는 금무성과 달리, 천화는 무엇을 떠올리는지 기괴한 웃음을 계속 흘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