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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화 그대로 얼어 죽어라 (1) (238/481)


<239화> 그대로 얼어 죽어라 (1)
2022.05.15.


산동을 떠난 천화와 설영은 어딘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하북을 거쳐 산서성으로 이동했다.

하북을 지나친 이유는 간단했다.

그곳에는 마인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개방의 본타와 하북팽가, 진주언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천화는 무엇보다 북경에 인접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마교로서도 당장 황궁까지 동시에 건드리고 상대하는 것은 부담스럽겠지.

그렇기에 최대한 빨리 무림맹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고 말이다.

덕분에 개방과 팽가, 언가는 다른 지역으로 지원을 나갈 수 있을 만큼 다른 문파들에 비해 여유가 있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산서 지방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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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염제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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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바다가 됐다더니, 진짜였네.”

그곳에는 구파일방 오대세가는 물론 지배력을 행사할 만한 강자가 없었으니까.

그나마 마교에 넘어간 감숙 지방과 산서 지방의 사이에 섬서가 버티고 있었지만, 저 깊은 산동 지방에 십마 중 하나가 출현한 것처럼 이곳 산서 지방에도 십마 중 하나인 지옥염제가 나타났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옥불을 연상케 하는 검은 불꽃을 일으키는 극양의 무공, 흑염지옥공이 지나간 자리에는 까맣게 타버린 흔적밖에 남지 않았다.

하북팽가나 진주언가, 개방의 도움?

그것도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들로서는 지옥염제를 상대하는 것이 무리였으니까. 설령 막아내거나 쫓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피해가 막심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그놈들이 이쪽으로 지원을 보낼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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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이 따로 없군.”

덕분에 천화와 설영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섬서 지방의 마을들은 불바다가 되어 갈 곳을 잃은 난민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오랜 세월 생활해 온 터전을 잃어버리고, 그나마 다른 곳으로 넘어가 정착할 만한 재물조차 건지지 못했으며, 당장 먹고 살 만한 식량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해 화전민처럼 산으로 들어가 식량을 구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산적인 녹림조차 차마 건드리지 못할 만큼 처참한 몰골로 돌아다니는 이들이 발에 채이도록 많았다.

진짜 전쟁이라도 터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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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리. 한 푼만, 아니 육포 한 조각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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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십시오. 벌써 사흘을 굶었습니다. 저는 괜찮으나 아이라도 먹을 수 있게…….”

그런 곳들을 지나니 천화와 설영에게도 많은 이들이 달라붙었다. 거대한 소를 보자 눈이 반쯤 돌아가고 침을 줄줄 흘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상대가 무림인이다 보니 함부로 덤벼들지는 못하고 식량을 구걸하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식량은 제법 되었지만 천화는 일단 그들을 밀어냈다. 소지품창에 최소 한두 달은 넉넉히 먹을 만한 식량이 있기는 해도, 그걸 모두 푼다 한들 이들 모두를 구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는 동안 곧 하오문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대규모 구휼 활동이 시작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기에, 안타깝지만 잠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지금 조금이라도 식량을 풀었다가는 몰려드는 이들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될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어차피 객잔을 찾는다 한들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빠르게 마을을 지나쳐 지옥염제의 위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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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이군.”

그와 그의 수하들이 날뛰는 곳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예 자신의 위치를 감출 생각이 없는지 놈은 마구 날뛰는 중이었고, 거대한 기파가 느껴지는 곳을 찾거나 검은 불꽃이 솟구치는 곳만 찾아도 얼마든지 추적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터전을 잃어버린 난민들이 사방을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복수를 약속하는 것만으로도 위치를 제보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며칠을 쫓자, 놈들의 현 위치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당장 달려들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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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이 기운은?”

내력을 갈무리하며 기습을 준비하던 천화와 설영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저 멀리서부터 어딘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다.

중원의 것과 다른, 이질적인 기운 두 개가 한 몸처럼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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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빠른데? 이러다 우리가 더 늦게 도착하겠군. 흑우야, 서두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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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우!!”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의 방향과 기세를 읽어내던 천화가 얼른 흑우를 재촉했다.

이쪽도 가까웠지만 저들이 좀 더 빠르게 지옥염제의 무리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지옥염제라 하더라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이들이겠지만,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합류할 필요가 있었다.

저렇게 힘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또 다른 십마 중 하나가 힘을 감추고 함정을 판 것일지도 몰랐으니까.

흑우가 속도를 올렸다.

천화와 설영이 언제든 전투에 돌입할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키며 놈들을 향해 짓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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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르륵!

검은 불꽃이 사방에서 솟아올랐다.

내공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거대한 불꽃이 마을을 부수고 시신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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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흐흐! 더 고통스러워해라! 힘이 없음에 절망해라! 이 불꽃이 모든 것을 태워 무(無)로 돌릴 것이다! 새로운 세상의 토대를 새로 닦을 것이다!!”

그 속에서 광기어린 눈빛을 한 마인들이 날뛰고 있었다.

모두가 같은 무공을 익혔는지 그들 또한 크기의 차이가 있으나 꺼지지 않는 검은 불꽃을 일으켰고, 그 불꽃에 닿는 모든 것들이 한 줌 재가 될 때까지 타올랐다.

물을 부어도, 모래를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길이 모든 것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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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약해빠진 놈들 때문에 그 오랜 세월을 저 척박한 땅에서 살아온 것이 우습구나. 우리가 느꼈던 고통을 몇 배로 되갚아주마!!”

광기어린 외침에는 깊은 울분이 담겨 있었다.

제1차 정사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저 첩첩산중 속 십만대산에 숨어 살아야만 했던 한이 폭발한 것이다.

먹을 것도 부족하고 편의시설도 부족한 그곳에서 무공 수련보다 힘든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던 교인들의 처절한 생활을 떠올렸다.

그동안 위선과 기만을 일삼으며 풍족한 생활을 누리던 중원인들에 깊은 분노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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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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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슈슉-!

그때, 허공을 뒤덮은 화살비가 그들을 덮쳤다.

비교적 무공이 약한 이들이 방심하고 있다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아니, 일류급의 마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숨에 목숨을 잃은 자는 적었지만, 보고도 피할 수 없는 화살세례에 상처를 입고 비틀거렸다.

요혈이 뚫리는 것은 피했지만, 다행히 화살촉에 독이 묻어있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긴장했다.

이만한 궁술을 펼칠 수 있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소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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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설마 황제의 군사들인가?”

지옥염제가 빠르게 수하들을 불러모았다. 방진을 짜고 다시 날아오는 화살들에 대비하게 하며 상대의 정체를 살폈다.

고작 궁병 따위가 이만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리는 없지만,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림인들은 궁술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런데 이만큼이나 많은 화살이 쏟아진다? 그것도 잘 보이지 않는 먼 거리에서?

푸슈슈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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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겁화!!”

화르르륵!!

재차 날아드는 화살세례를 짜증스레 바라보던 지옥염제가 이번에는 먼저 힘을 썼다.

검을 불꽃을 구름처럼 일으켜 화살들을 부수고 태워버린 것이다.

불꽃이지만 그와 동시에 강기였기에, 날아드는 수십 수백 발의 화살을 분쇄하는 것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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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불태워주마!!”

거기서 그치지 않고 허공에 머무르던 화염들을 쪼개 불의 비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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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개하라!!”

하지만 상대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주변을 돌며 화살을 쏘아내던 기마병들이 놀라운 기마술로 화염을 피해 흩어졌고 불의 비를 피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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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이이잉!!!”

하지만 지옥염제도 만만치 않았다.

떨어지는 화염의 경로를 임의로 조정하자 몇몇의 말들에 불이 붙었고, 기마병들이 그것을 꺼트려 보려 했으나 오히려 옮겨붙기만 한 것이다.

쩌저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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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순간, 기마병들의 뒤에 타고 있던 무인들이 힘을 썼다.

그와 함께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만 같던 검은 불꽃들이 힘을 잃었다.

불꽃이 꺼져버린 것은 물론, 불탄 자리에 외려 서리 같은 하얀 기운이 내려앉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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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턴 우리가 맡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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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하겠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날아올랐다.

그저 주변을 빙빙 돌 뿐이던 기마병들에게서 벗어나 지옥염제와 마인들이 날뛰는 마을 한복판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온통 불타올라 멀리서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그곳으로 들어섰다.

치이이이이익-

그러나 그들이 발을 내딛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닥을 달구며 열기를 일으키던 잔불이 저절로 꺼지고, 주변이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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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옷과 냉기라……. 북해빙궁인가?”

그들의 정체를 지옥염제가 바로 알아보았다.

중원에서 저런 차림을 하고 다니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저들을 태우고 온 놀라운 궁술을 지닌 무인들의 정체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신경을 쓸 겨를도 없다.

세외사궁 중 하나인 북해빙궁의 출현만으로도 충분히 경악스러웠으니까.

절정급이 아니고서는 대처가 쉽지 않은 저들의 궁술도 놀라웠지만, 그래봤자 궁술이다.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고, 위협적이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는 판단이었다.

불과 얼음의 대결.

지금은 그것에 더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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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북해빙궁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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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불장난은 끝이다.”

치이이이이익!!!

그저 마주선 것뿐인데 둘 사이에서 수증기가 격렬하게 피어올랐다.

지옥염제가 내뿜는 화기와 북해빙궁주가 내뿜는 한기가 만나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뒤로 각자의 수하들이 도열했고, 언제든 서로를 향해 뛰어들 수 있도록 채비를 마쳤다.

이쯤 되면 정사대전과 별개로 자존심의 싸움이기도 했다.

서로 상극이라 할 수 있는 무공을 익혔으니까.

유치하지만 불이 강한지, 얼음이 강한지를 판가름하는 자리가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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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던 구파 놈들은 아니지만, 이거 대어를 낚았군.”

정적 속 눈싸움이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 지옥염제의 곁에서 빙긋 웃으며 나섰다.

존재감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북해빙궁주 단철우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느끼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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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아니라 둘이었군.”

또 다른 십마 중 하나.

소수마녀 월옥교.

극성으로 익히면 모공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손이 희고 매끈해지며 보검으로도 상하게 만들 수 없다는 소수마공을 익힌 화경의 고수였다.

더구나 소수마공은 빙백신장과 같은 음기공이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빅뱅신장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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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얼려버리면 그만이니 상관없지.”

하지만 자신감을 잃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무려 화경의 고수 둘을 앞에 두고도 단철우는 전혀 주눅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강하게 음한지기를 내뿜어 주변의 화기를 잠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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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기 전에 하나만 묻지. ‘붉은 머리’를 한 마인을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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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리? 이거 우습군. 붉은 머리 앞에서 또 다른 붉은 머리를 묻는다니 말이야.”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단철우는 오히려 여유를 부렸다.

북해빙궁을 습격했던 ‘붉은 머리’에 대해 물었다.

다만 기묘한 것은 지옥염제야말로 마교를 대표하는 붉은 머리, 적발적미(赤髮赤眉)의 사내라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앞에서 다른 이를 찾으니 지옥염제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불쾌감을 가득 담아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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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는 건가 모르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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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곧 뼛가루도 남기지 못하고 불타 없어질 놈에게 들려줄 말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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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그럼 살려둘 이유가 없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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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쩌저저저저적-!!

그 순간, 단철우의 몸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한기가 뿜어졌다.

뱀처럼 바닥을 타고 기어간 한기가 지옥염제의 발목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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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얼어죽어라.”

다급히 검은 불꽃을 일으켜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압도적인 한기가 놈을 얼음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같은 화경의 고수끼리 이렇게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고?

지옥염제가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제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고, 입술을 질끈 깨문 소수마녀 월옥교가 단철우를 향해 짓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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