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기연 쇼핑 (1)2020.11.26.
[월음보양단][희귀] 잘 배합된 약초를 연단하여 만든 영약. 전신 혈맥을 튼튼하게 만들어 몸을 보하고 내기가 더 잘 통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달의 음기를 머금어 음 속성을 지녔으나 딱히 상쇄할 다른 영약을 함께 섭취하지 않아도 흡수율에 차이가 있을 뿐, 위험하지는 않다. - 섭취 시 축기 및 내기 순환 속도 20% 증가 - 섭취 시 체력 + 20 - 섭취 시 오성 + 10 - 섭취 시 감각 + 10 - 섭취 후 운기를 통해 최대 5년 내공 흡수 가능
“좋군.”
천년하수오나 만년설삼 따위를 섞어 빚은 것도 아닌, 흔해 빠진 약초들을 빚어 만든 영약임에도 성능은 꽤나 훌륭했다. 부스러기만 주워 먹을 수 있었던 무신지로에서는 이것의 2할이나 됨직한 효과를 얻었을 뿐이었지. 그나마도 원래 이것을 복용할 예정이던 인물의 상태가 썩 좋지 못해 양을 조절해야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화는 체질 개선과 내공 증진을 위해 이것을 흡수하지만 원 주인은 그저 병의 호전을 위해 사용했을 뿐이니까.
‘아픈 사람 걸 뺏어먹는 것 같지만…… 그 녀석에게는 이 정도야 간식이니까.’
게다가 만약 이 영약이 꼭 필요하다면 약초꾼 노인이 순식간에 채집을 해올 테니 그 또한 걱정 없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상당한 약초꾼 노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정체는…….
“여기면…… 괜찮겠지.”
그 뒷사정까지 알고 있기에 천화는 양심의 가책 따위는 버리고 온전히 그것을 취하는데 집중했다. 스르르륵- 영약을 획득한 천화는 미리 보아둔 안전한 동굴로 들어가 곧장 월음보양단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음……. 맛 보정도 사라지지 않는 건가.’
영약을 입안에 넣자마자 청량감이 돌며 솜사탕처럼 저절로 녹아 사라진다. 다만 묘한 것은 그 맛이 민트초코라는 것이다. 하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맛인 까닭에 개발자가 악취미라는 말이 한참 돌았었지.
‘아니면 이게 진짜 맛인 건가.’
헌데 현실이 되고도 비슷한 걸 보니, 아무래도 원래 맛이 이런 것 같았다. [삼재심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운기조식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틈이 없었다. 천화는 즉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영약은 섭취 직후 운기를 하지 않으면 전신 세맥에 그 기운이 흩어져버려 말 그대로 보양식 정도의 효과밖에 내지 못하는 것이다. 운기를 통해 영약의 기운을 최대한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된다.’
보통의 내공심법을 익힌 상태였다면 음기가 강한 까닭에 일부의 힘만을 취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음기공을 익혔거나 다른 양기 충만한 영약을 함께 취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천화는 자신만만했다. 월음보양단의 힘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자신이.
‘무신지로가 불친절한 게임이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
삼재심법의 포용력은 여기서도 발휘되는 것이다. 삼재심법은 순수한 자연지기를 모으는 심법이었다. 때문에 도가에서 흘러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 축기 속도가 극악할 정도로 느렸기에 외면 받아 지금은 무공 입문을 위한 기본공 정도로 여겨지는 심법. 하지만 이처럼 특징 있는 영약을 만났을 때만은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천화는 이미 기를, 내공을 다루는 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이가 아니던가? 시원하다 못해 몸속이 시린 느낌이 들기 시작할 무렵, 삼재심법의 흐름을 따라 진기가 유도되자 다시 서늘한 정도로 바뀌었다. 삼재심법의 내공이 영약이 가진 음기를 포용하고 정화해낸 것이다. 그나마도 천화가 미리 삼재심법의 경지를 올려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천화의 내공을 다루는 솜씨가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월음보양단의 효능이 크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희귀가 아니라 유일 등급의 영약쯤만 되었더라도, 최소 7성 이상의 삼재심법을 익히지 못했다면 감당해낼 수 없었겠지. 다른 심법들과 마찬가지로 영약의 기운을 온전히 취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축기 속도가 느려, 극소량의 내공만을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천화의 몸이 영약이 가진 효능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었다. [운기조식을 마치셨습니다.] [삼재심법의 사용이 종료됩니다.] [체질이 일부 변화했습니다. 혈맥이 더욱 튼튼해집니다.] [체력이 20만큼 상승했습니다.] [오성이 10만큼 상승했습니다.] [감각이 10만큼 상승했습니다.] [내공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시스템의 알림과 함께, 천화가 내면의 관조를 위해 잠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몸 상태가 느껴졌다. 체력 수치가 늘어난 까닭도 있지만 변화의 핵심은 역시 내공의 변화였다. 5년 내공. 천화는 이미 월음보양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의 내공을 흡수한 상태였다. 음 속성의 내공을 다루는 심법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삼재심법과 천화의 높은 내공에 대한 이해가 그것을 해낸 것이다.
“후. 간에 기별도 안 가네.”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내었지만 천화는 만족할 수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천화가 지니고 있던 내공에 비하면 티도 나지 않는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절대량으로 본다 해도 볍씨만 하던 것이 콩알만 해진 게 전부였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그러나 없는 것보다는 백번 나은 일이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내공으로는 무형보조차 제대로 펼치기 어려웠으니까.
“어디 보자. 이제 남은 시간이…… 이제 이틀뿐인가? 서둘러야겠군.”
자리를 털고 일어난 천화는 시간을 셈해보았다. 이제 이틀 뒤면 귀주혈겁이 시작된다. 그 전에 해두어야 할 일이 있기에 서둘러 마을로 내려갔다. 전낭을 끌러 충분한 식량과 모종의 작업을 위한 재료들을 구입하고, 이틀 동안 산에 틀어박혀 어떤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틈틈이 피로를 날려버리기 위해 운기조식을 취했을 뿐, 무공 수련마저 멈추고 무언가에 매진했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내공을 더해 발을 내딛고는 있지만 내 의지로 걸음이 나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속도에 떠밀려 멈추지 못하고 계속 달리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걸음을 내디뎠다. 시야가 빠르게 변하고, 공간이 성큼성큼 다가왔지만 몸의 주인은 이미 의식이 흐릿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까닭이다. 이미 말라붙은 피가 옷의 색깔마저 변화시키고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린 것인지도 짐작키 어려웠다. 벌써 며칠째 쫓기고 있는 것일까. 쫓기기 시작한 이후로 며칠째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몰랐다. 상처에 가지고 있던 금창약을 덕지덕지 바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치료 따위는 기대도 하기 어려웠다.
“허억, 허억…….”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다. 내공은 바닥이 났고, 체력은 고갈된 지 오래였으니까. 굳건했던 정신력도 오랜 추격전에 마모되어 허물어지려 하고 있었다.
‘숨을 곳을 찾아야 해.’
피로 얼룩진 옷을 입은 곱상한 사내의 눈알이 빠르게 굴러갔다. 안색이 창백해진 것인지 원래의 피부인지 모를 하얀 피부가 그를 더 위태롭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수풀? 오두막?’
하지만 몸을 숨길 수 있어 보이는 곳은 없었다. 수풀에 몸을 숨겨볼까? 아니다. 완벽히 흔적을 지울 만큼의 여력도 없었고, 자신을 쫓는 자들은 이미 추종술의 달인들이니 그 정도 눈속임으로 속여 넘기기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저 작은 오두막에 몸을 숨겨보는 것. 사람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운이 좋다면 몸을 숨길 비밀 공간 따위가 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산중에 위치한 오두막에는 산적 등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 공간이나 통로가 있기도 하니까.
‘이건 절대 빼앗길 수 없어……!’
혈의인은 마지막 기력을 짜내, 오두막으로 몸을 날렸다. 끼이익- 최대한 흔적이 남지 않도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옵쇼!”
“……?!”
그 안에는 그를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반기는 인물이 있었다. 휘익- 퍼억! 추격자일까? 당황하며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보다 천화가 검면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치는 것이 먼저였다. @
“이런, 너무 세게 때렸나?”
귀주혈겁의 이벤트가 시작되는 지점인 숲속의 한 오두막. 산을 넘어 다른 마을로 이동하는 상인들이나 약초꾼들의 쉼터인 그곳이 장차 귀주혈겁, 또는 수건돌리기 이벤트라 불릴 사건의 시작점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천화가 준비를 마치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상이 나타나는 순간, 냅다 머리통을 후려쳤다. 정식으로 싸운다면 일초지적도 되지 못할 테지만, 상대는 이미 지치고 기력이 빠진 상태였기에 때려눕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들었던 것보다 상대의 상태가 안 좋았는지, 죽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 상태가 좋지 못했다.
“쩝. 어쩔 수 없지.”
원래대로라면 상처 입은 이자와 실랑이를 좀 해야 했다. 아무리 기력이 다한 상태라고는 하나, 일반 유저들이 상대하기에는 턱 없이 수준이 높은 고수였기에 맞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 역시 만나는 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에, 그와 마주친 유저는 간단한 협상을 통해 거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래를 마친 유저는 그를 대신해 추격자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지.
“뒤져서 찾아가면 그만이니까.”
그 모든 사정을 알고 있기에 천화는 쓰러진 그의 몸을 질질 끌고 와 오두막 안의 침상에 눕혔다. 굳이 그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다. 깨어나면 자신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의 시나리오에서도 유저와 거래 후 뒤쫓아온 이들과 겨루다가 사망했으니 굳이 자신의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자를 죽임으로서 막대한 경험치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추격자들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줄 이가 사라지게 되는 것도 문제였다.
“혈마의 비급 정도면 뭐, 탐을 낼 만하긴 하지.”
그들이 이자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혈마의 비급이었다. 전성기 시절의 무공 실력을 기준으로 볼 때 천마와도 비교가 되던 혈마의 독문무공. 그것이 이자의 품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은밀하게 그를 쫓아 비급을 취하려 드는 것이고, 무신지로에서 유저들이 NPC들에게 쫓기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혈마의 비급을 유저들이 손에 넣었기 때문에.
“그 난리가 났어도 처음에는 비급을 한번 가져보려는 놈들이 넘쳐났으니까.”
처음 이 이벤트를 시작한 유저는 막상 거래를 할 때는 좋아했지만 거래 후에는 크게 후회했었다. 이제 고작해야 삼류 무인에 들까 말까 한 이들이 유저 중 최고수라 하는 수준인 상황에서 일류 이상의 무인들이 추격하고, 그 뒤로 하이에나 떼 같은 이류 이하 무인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으니 어찌 따돌릴 수 있겠나? 이 이벤트가 귀주혈겁이라는 이름 이외에 수건돌리기라는 별칭을 가진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나중에는 서로 안 가지려고 던지고 다녔지만.”
빼앗아 가지고 도망치는 것이 목적이라면 술래잡기라 하겠지만 수건돌리기, 아니 폭탄 돌리기에 가까울 정도로 남에게 던지고 도망가는 일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혈마의 비급을 취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일이지만 혈마의 비급을 소지한 채 사망할 경우 정파 쪽 지역에는 발을 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악명이 높아지고, 사망 시 100% 확률로 혈마의 비급이 드랍되는 것이다. 죽어서 잃어버리더라도 모두 읽고, 외우고, 혈마의 무공을 익히고 난 뒤 사망하는 것이라면 어떤 유저가 싫어하겠냐마는, 혈마의 무공은 일반적인 무공들과 궤를 달리하는 것이니만큼 절대 시간 내에 익힐 수가 없었다.
“아니, 시간이 있었어도 익힐 수 있었을 리가 없지. 이게 없는데.”
그때를 추억하며 천화가 집어든 것은 비급이 아니었다. 그가 꼭 쥐고 온 한 자루의 검. ‘진짜 혈마의 비급’이었다.
“혈마검.”
평범한 장검처럼 보이지만 그가 가진 이 검의 정체는 다름 아닌 혈마검이었다. 혈마가 직접 사용하던 검이자 아주 특별한 기능이 붙어 있는 절세의 보검 중 하나. 그리고 혈마의 비기가 숨겨진 검이기도 했다.
[힘을 원하는가?]
혈마검을 들어올려 스윽 살피자 머릿속에 울리는 묘한 목소리가 있었다. 사람을 홀리듯 요사스러운 그 음성에 천화가 눈을 부릅떴다.
“너랑 놀아줄 시간 없으니까 일단 들어가 있어.”
휘익- 그리고는 냅다 소지품 창에 던져 넣었다. 영성을 가진 무기. 혈마검은 스스로 자아를 가지고 있는 기물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놈에게 홀리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놈이 준다는 그 힘이라고 해봤자 전성기의 자신에게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했기에 흥미가 식었다. 물론 이놈을 이용해 힘을 회복할 생각이긴 하지만, 그것이 놈에게 휘둘린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자, 그리고…… 일단 비급도 챙겨놔야겠군. 별 필요는 없지만.”
다음으로 챙길 것은 역시 혈마의 비급이다. 서책의 형태로 되어 있는 혈마의 무공 비급이 저 품 안에 들어있을 터였다. 그게 진짜인지, 혹은 완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격자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비급을 불태우든, 소지품 창에 넣어 감추든 상관없다.
‘혈마의 무공이야 대충 알고 있으니까.’
이미 서책, 죽간, 쪽지 등 다양한 형태로 비슷한 물건이 이 근처에 수십 권 이상 뿌려져 있는 상태이니까. 모두 천화가 이틀 동안 고생해서 만든 것들이었다. 오래 되어 보이게 물에 적시거나 약초즙으로 간단한 약품을 만들어 바르기도 하고, 불에 살짝 그슬리는 등 다양한 형태로 찍어낸 혈마의 비급을, 보물찾기 게임을 준비하는 유치원 교사처럼 곳곳에 숨겨 놓았다. 내용이 한두 군데씩 달라서 뭐가 진짜인지를 찾기 어렵겠지만, 사실 낮은 경지까지는 그대로 익혀도 무방할 만큼 그럴싸한 놈들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화가 만져 놓은 비급들이니까. 이렇듯 혈마의 비급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는 상황에서 천화가 굳이 그의 품에서 비급을 빼내려는 이유는, 추격자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함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흠, 어디에 있으려나?”
비급을 찾기 위해 천화가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피가 진득하니 말라붙어 떼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과감하게 찢어내며 앞섶을 열어젖히자 붕대로 둘둘 감아 감추어놓은 혈마의 비급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붕대로 압박해 감추려 했으나 봉긋하게 솟아 숨길 수 없는 가슴이 함께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