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삼류인데, 고인물입니다 (4)2020.12.24.
[내공 활용의 폭이 넓어집니다.] [내공의 운용이 한결 편해집니다.] [적당한 계기 또는 공부를 통해 내공을 활용하는 새로운 수법들을 익히실 수 있습니다.] 삼류 무인, 혹은 삼류 무사라고 불리는 작은 문턱을 넘어서자 이전보다 한결 내공의 운용이 편해졌다. 그동안에야 천화가 말 안 듣는 놈 멱살 잡듯 내공을 억지로 끌고 움직였다면, 이제는 타이르는 대로 움직이기는 해주는 정도랄까? 언뜻 생각하면 별것 아닌 변화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저 움직이기만 할 수 있던 상태에서 뜻대로 힘에 강약을 주거나 모아서 집중시킬 수 있게 바뀌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미였다. [내상 기능이 해금됩니다.] [무림인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삼류 무인으로 등극한 것에 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공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게 된 대신 내상이라는 것을 입을 수 있게 되면서, 마구잡이로 싸우다간 싸울 수 있는 시간보다 요양을 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 내공이 미약한 만큼 내상을 입을 일도 많지 않을 테고, 천화씩이나 되는 인물이라면 내상을 피하는 방법쯤은 도가 텄지만 말이다. [전장 이용이 가능해집니다.] [반려동물 기능이 해금됩니다.] [귓속말 기능이 해금됩니다.] [기관진식 기능이 해금됩니다.] [술법 기능이 해금됩…….] 그밖에도 수많은 기능들이 해금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해금이라고는 하지만 고작해야 입문 정도의 수준일 테니까. 몇 가지는 바로 써먹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 뒷배도, 영향력도, 자금력도 없는 삼류 무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겠나? 특히 기관진식이나 술법 등은 지식으로서는 써먹을 수 있겠지만 직접 만들고 펼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로는 좀 가셨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알림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을 추린 천화는, 다음으로 고서점에서 구입해왔던 책들 중 일부를 꺼냈다. 이번에 해금된 기관진식 등에 대한 책들도 있지만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지능 수치를 올리고 능력화시키기 위한 것으로만 쓰일 것들은 일단 미루어두고 당장 활용이 가능한 것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기술 점혈을 확인했습니다.] [무공 육합권을 확인했습니다.] [무공 천근추를 확인했…….] 그중 가장 기대가 되는 것은 역시 점혈이다. 내공을 끌어모아 상대의 혈도에 밀어넣고 응집시켜 신체의 기능 일부를 제한하는 기술. 일종의 요령과도 같았기에 무공이 아니라 기술로 분류되는 것이다.
‘이것만 있어도 꿀 좀 빨 수 있겠지.’
섬세한 내공 운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삼류 무인이 되었다고 아무나 막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막상 점혈 자체에 들어가는 내공의 양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천화에게는 아주 유용한 능력이었다. 그밖에 시작 마을에서 구할 수 없던 기본공들까지 익히니 마음이 넉넉해졌다. 이거라면, 당분간 설영에게 맡기려고 했던 일들을 자신이 대신하고 이득을 챙길 수 있지 않을까?
“으으으, 이제 자자!”
1차적으로 목표했던 책들을 모두 읽어낸 천화는 그제야 간신히 마음을 놓고 몸을 뉘었다. 침대처럼 푹신하고 편안하지는 않지만 간만에 누워보는 제대로 된 잠자리에 히죽 미소를 띠며 깊은 잠에 빠졌다. @
“어떤 놈이 내 동생들을 건드렸어? 얼른 튀어나와!!!”
콰앙!!!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입맛까지 쩝쩝 다시며 간만에 꿀잠을 자고 있던 천화를 깨운 것은, 뭔가 깨져나가는 듯한 거친 난동의 소리였다.
“아이고, 대협. 이런 이른 아침부터 어인 일이십니까.”
“어인 일? 내 의제들이 간악한 수에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지금 그따위 소리가 나오느냐!”
객잔이 부서질까 잽싸게 튀어나온 점소이가 그를 말려보려 하지만, 이미 흥분한 상대는 대화를 할 생각 따위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길게 상처가 난 험상궂은 얼굴로 노려보자 가슴이 찔끔한 점소이는 불똥이 튈세라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고, 평온이 깨진 객잔의 방에서 하나둘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무림인도 아닌 이들을 힘으로 위협하다니, 그게 무림인으로서 할 짓인가요?”
그런 구경꾼들의 사이에서 채비를 마치고 나온 설영이 앞으로 나섰다. 사경을 헤맬 만큼 상처를 입힌 적도 없지만 으레 이런 자들은 자신의 피해를 부풀리기 마련이기에, 그가 찾고 있는 인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대형, 저년입니다. 면사로 얼굴을 가렸지만 확실합니다!”
‘이류 중하급 정도인가?’
또한 상대의 수준도 곧장 파악했다. 일류 이상의, 자신의 내공과 기파를 갈무리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면 대략적인 가늠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외공을 중심으로 익혔다면 가늠한 것보다 고수일 수도 있지만, 그런 변수를 모두 감안하더라도 상대의 수준은 이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외공을 중심으로 익혔다는 것을 전제로 해도 이류 중하급 정도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호오, 네년이 힘을 좀 쓴다 이거지? 흐흐. 이 귀주패력 두치님이 확인해 주마! 어디 앙앙거려 보거라!!”
‘검기라도 뽑아냈다면 달랐을까.’
고작 그 정도 수준인 주제에 자신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덤비다니? 아무래도 일류 고수의 상징과도 같은 검기를 내보이지 않은 탓에 무시를 당한 모양이었다. 귀주삼호인지 귀주삼묘인지 하는 놈들의 수준으로는 설영의 수준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기에 꼴랑 이류밖에 되지 않는 놈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겠지.
‘이렇게 되면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주는 수밖에.’
면사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순간 설영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뭐? 귀두가 두 치(6cm)밖에 안 된다고? 어후. 그걸로 남자 구실이나 하겠냐?”
그때, 설영의 뒤편에서 구경꾼들을 가르고 누군가 먼저 나섰다. 시정잡배들이나 내뱉을 만한 말로 두치를 도발하면서.
“네놈이 저년의 기둥서방이구나!”
그러자 발끈한 두치가 성질을 부리며 천화를 노려본다. 이미 귀주삼호에게 들어 천화의 존재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섣부르게 덤벼드는 일도 없었다. 설영의 무위가 삼류급이라고는 하나 아우 셋을 동시에 상대할 정도나 된다는 것도 들은 데다, 검을 차고 있을 뿐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없다고 했던 것과 달리 태양혈이 불룩 솟은 것이 천화 역시도 무인으로서의 기세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공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다른 특징적인 기세를 풍기는 내공심법이 아닌, 평범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삼재심법을 익힌 데다 천화가 내공을 잘 갈무리하고 있었기에 놈의 수준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수준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설마 고수인 건 아니겠지?’
이쯤 되자 처음부터 천화가 월등한 고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멍청한 아우놈들이, 아니 그 병신 새끼들이 고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시비를 털었던 것은 아닐까? 겉으로는 멀쩡한 척 했지만 알고 있던 정보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두치는 큰 혼란을 겪는 중이었다.
“이 새끼가 언제 봤다고 반말을 하고 지랄이야? 강냉이를 털어서 마작패로 써버릴라니까. 거기다 뭐? 사경을 헤매? 너 이 새끼들 자해공갈단이냐? 아니면 진짜 사경을 헤매는 게 어떤 건지 알려줘? 엉?”
주르륵 천화가 흑도에 속한 자신만큼이나 걸쭉한 입담을 늘어뜨리며 눈알을 부라리자 두치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맺혔다. 그가 이끌고 온 수하들은 왜 저런 폭언을 대형이 참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듯 얼른 베어버리라느니, 저런 놈쯤은 두치에게 한 주먹거리도 안 된다느니 하는 소리 따위를 늘어놓고 있었지만, 정작 두치는 정신이 아득해져오는 공포를 느끼는 중이었다.
[살기를 습득하셨습니다.] [살기 집중을 습득하셨습니다.] 달달달달.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기 못하는 것이다. 전장의 악귀와도 같은 천화의 살의가 고스란히 두치에게도 집중된 까닭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두치에게만!
“……아닙니다.”
“뭐? 소리가 작아서 안 들리는데?”
“아닙니다!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대, 대형?”
갑작스런 태세전환에 수하들이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객잔 안에 있던 구경꾼들과 곁에서 지켜보던 점소이도 마찬가지다. 이 새끼가 이럴 놈이 아닌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의심의 눈초리로 놈을 바라보았지만 두치는 그런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군기 바짝 든 신병처럼 자세를 바로 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시정? 뭘 시정할 건데?”
“그놈들, 아니 그 새끼들을 제가 제대로 사경을 헤매게 만들어주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네 아우들이라며?”
“아닙니다! 저는 외동입니다!”
아주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소리치는 모습에, 한바탕 칼부림을 벌이려던 설영까지 당황할 정도였다.
“좋아. 그럼 지켜본다?”
“감사합니다!!!”
조금 못마땅하지만 한번 믿어보겠다는 듯한 천화의 말에 두치의 눈빛에서 희망이 솟았다.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잠깐!”
그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 얼른 몸을 돌려 달아나려는 순간, 천화가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설마 그냥 가게?”
“예? 아……! 여기 있습니다!! 뭐해? 너희도 어서 내놔!”
쩔그렁 그래도 아주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니다. 아우인지 그 새끼들인지 아무튼 놈들에게 들은 것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오래된 흑도의 짬밥에서 나온 눈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제 전낭과 수하들의 전낭을 닦달해 모은 뒤 가만히 탁자에 올려놓고 도망친 것이다. 그 모습을, 정확히는 가지런히 모인 전낭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천화. 다른 이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천화는 늘상 있던 일이라는 듯 휘적휘적 걸어나가 그것들을 챙겼다. 아예 일어난 김에 그 자리에 앉아 점소이를 불렀다.
“돈도 생겼으니 오늘 조식은 푸짐하게 먹어볼까? 여기 주문!”
“옙? 옙! 갑니다요!!”
별난 아침이 시작되었다. @
“고작 살기만으로 그놈이 물러난 거라고?”
다행히 유혈 사태 따위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기에, 객잔의 1층에 위치한 식당에는 곧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어째서인지 천화와 설영의 근처 자리가 비긴 했지만, 아침을 거르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럴 수 있지! 개의치 않고 이번엔 요리까지 시켜 한껏 입안에 밀어넣은 천화가 설영의 물음에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오히려 무림인이라기보다 뒷골목에 어울리는 놈들이었으니까. 그런 놈들이 원래 제 목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키거든.”
만약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무림인이었다면, 하다못해 규모가 있는 정파 계열 문파만 되더라도 패배를 각오하고 싸우려 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흑도라 불리는 사파 무림인이기에, 그것도 뒷골목 건달패처럼 작은 마을 하나에서 으스대는 놈들이기에 제 목숨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무림이라는 곳은 단 한 번의 판단 미스로 목이 달아나는 곳이었으니까.
“흐음…….”
그 말에 설영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뭔가 한 수 배웠다는 표정인 것이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뭐 상관없겠지. 설영은 여차하면 상대를 무력으로 찍어누르거나 어렵지 않게 몸을 빼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후아! 배부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렇게 식사를 마치자 설영이 은근한 기대를 담아 천화에게 물었다.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올 정도로 음식을 쓸어담은 천화와 달리, 무인으로서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새 모이만큼 입에 넣었을 뿐인 설영이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기운찬 모습으로 눈을 반짝이는 것이다.
“뭘?”
“오늘부터 제대로 돈벌이를 할 거라고 했잖아. 여기가 어디니 하면서. 뭘 할 셈이야?”
얼마인진 몰라도 제법 묵직한 전낭을 얻었으니 당장 돈 걱정은 없겠지만, 어제 분명 오늘부터 제대로 된 돈벌이를 할 것이라 선언했으니까.
‘며칠 더 놀고먹을까 했는데 저 눈빛 때문에라도 안 되겠네.’
면사를 뚫고 나오는 듯한 그 눈빛 공격에 천화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거야 간단하지. 따라와.”
“……?”
점소이에게 셈을 치르고 객잔을 나선 천화는 무인답지 않은 휘적 걸음으로 마을 어딘가를 찾아 이동했다.
“자, 여기야.”
“여기라고?”
어미를 따르는 병아리처럼 뒤를 졸졸 쫓아오던 설영에게 천화가 소개한 곳은, 마을 한편에 자리 잡은 공터였다. 아무런 건물도 없이 텅 비어있는 그저 넓은 땅덩어리. 하지만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림인도, 일반인도 있었지만 무림인으로만 따져도 수십은 족히 되어보였다. 대체 여기는 뭐하는 곳일까? 왁자지껄하기까지 한 그곳을 보고도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만 껌벅거리는 설영을 향해 천화가 씨익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귀주성의 특징이 뭐야?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같은 지배적인 영향력을 지닌 문파나 세력이 없다는 거지. 그래서 수많은 중소방파와 떠돌이 무인들이 모여들기도 하고. 그 사람들이 여기 모여서 뭘 하겠어?”
“어……. 수련? 아니면 비무?”
“오? 아주 바보는 아닌데?”
“뭐얏?!”
천화의 칭찬 아닌 칭찬에 설영이 발끈했지만 다행히 칼부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직 궁금한 게 많았으니까. 그런 설영에게 천화가 마저 설명을 이었다.
“비무행. 네 말처럼 비무를 통해 서로 겨루고, 배우며 실력을 높이는 거지.”
“그거랑 돈 벌이랑 무슨 상관인데?”
하지만 설영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을 요구했다. 비무를 하며 무공을 교류하는 것과 돈을 버는 것이 어떤 연관이 있단 말인가? 어쩌면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천화의 시각은 전혀 달랐다. 이런 좋은 돈벌이 수단을, 노다지를 못 알아보다니? 이러니까 무림 경제가 발전이 없지!!
“생각해봐. 저 사람들이라고 돈이 썩어 넘쳐서 맨날 칼질만 하겠어? 돈을 벌어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좋게 포장을 하면 무공 교류지만, 결국 힘이 있으면 과시하고 싶어 하는 법이거든. 그러니 내기를 거는 거지. 도전 금액 얼마, 승리하면 몇 배 보상! 이런 식으로 말이야.”
“아……!”
그제야 설영도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패배했을 때 토해내야 할 금액이 만만치 않을 수 있지만, 연거푸 승리할 자신만 있다면 아무 투자나 밑천도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표물 운송 따위처럼 오랜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이!
“흐흐흐. 그러니까 여기는, 호구들이 가득한 무림인들의 노름판 같은 곳이라는 거지. 우리가 돈을 긁어모을 곳이기도 하고.”
이제 알겠냐는 듯 천화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설영과 무림인들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