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돈 놓고 돈 먹기 (1)2020.12.27.
[비무행. 삼류 무인. 추혼검 일호. 도전 비용 동전 500문. 승리 시 3배 금액 보상] [비무행. 일류 무인. 옥면공자 화영. 도전 비용 은자 2냥. 승리 시 2배 금액 보상] [비무행. 이류 무인. 귀주잠룡 무언곽. 도전 비용 은자 1냥. 승리 시 2배 금액 보상. 일류 이상의 도전자는 정중히 사양합니다.] 천화의 말처럼 공터에 자리 잡은 무인마다 주변에 작은 깃발을 꽂고 있었다. 유려한 필체로 적힌 것부터 괴발개발 비뚤한 글씨까지. 고수일수록 힘이 담긴 멋들어진 필체를 자랑한다는 말도 있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었다. 당장 천화만 하더라도 악필 중의 악필이 아니던가.
‘어쩌면 짝퉁 혈마신공의 비급도 그래서 못 미더워했는지도 모르겠군. 쩝.’
때문에 도전자들은 능력껏, 상대의 수준을 가늠할 필요가 있었다.
“흐음. 정말 괜찮겠어?”
그런 그들을 돌아보며 설영이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돈 놓고 돈 먹기라며, 아주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라며 좋아하길래 당연히 자신을 시켜 비무를 하도록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천화가 자신이 나설 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이다. 아무리 방심한 상태였다지만 내공을 제한한 상태에서 자신을 이기고, 혈마검을 이용해 무려 일류급의 고수인 괴인까지 처치한 전적이 있는 천화였지만 제대로 실력을 본 적은 없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칫 혈마기를 드러내거나 상대의 실수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만 하더라도 큰 문제가 생길 테니까.
“걱정 마. 걱정 마. 아무렴 저런 허접한 놈들에게 내가 지겠어? 많이 해봤으니까 거기서 보고만 있으라고.”
너도 무공 수위는 삼류잖아……. 설영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애써 삼켰다. 하지만 천화는 자신 있었다. 비무행 중인 무림인들의 주머니를 털어먹는 것은 무신지로를 플레이할 당시 그가 개인방송에서 즐겨 써먹던 콘텐츠였으니까. 그냥 때려잡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武) 선생’이라는 콘셉트로 상대의 무공을 파훼하다 못해 낱낱이 해부하는 것을 즐겼던 것이다. 그 덕분에 모르는 무공이 없을 만큼 천화의 무공에 대한 지식도 방대해졌고, 동시에 필요한 부분들을 걸러 흡수하며 천화의 독문무공이 완성되기도 했다. 그런 천화인 만큼, 고작 귀주성 한 귀퉁이 마을에서 비무행을 벌이는 중인 무림인들을 털어먹는 것쯤이야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눈감고 승리하기 미션이 꿀이었는데. 흑우맨, 아니 미션맨이 큰 손이었지.’
이제 추억이 된 그때를 회상하며 천화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공터의 곳곳에서는 이미 비무가 한창이다. 깃발을 꽂아넣은 이들도 무공에 자신이 있겠지만, 도전자들도 자신이 넘쳤으니까.
“어디보자…….”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졌지만 천화는 그들의 무위를 그리 주의깊게 보지 않았다. 어디 호랑이가 사냥감이 흰색 토끼인지 갈색 토끼인지를 따지겠나. 설영의 생각처럼 천화의 내공 수위는 고작 삼류 초입에 불과했지만 경험과 실력만은 여기 있는 누구와 겨루어도 지지 않을 만큼 고이고 고인 것이다.
‘저 녀석이 좋겠군.’
거의 보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스윽 주위를 훑은 천화가 첫 번째 상대를 정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앞으로 가, 한편에 놓인 주머니에 도전 비용 200문을 지불했다.
“……정말 여기라고?”
그 모습에 설영의 눈동자가 또 한 번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천화가 고른 상대는 이 중에서 가장 약체라고 볼 수 있는 삼류급의 무인이었으니까. 이겨도 얻을 수 있는 돈이나 명성이 크지 않은 상대였기에 구경꾼들조차 그다지 눈길을 주지 않는 어리숙한 상대를 고른 것이다.
‘돈이 부족한가? 아까 분명…….’
때문에 설영은 도전 비용이 부족한가 하는 생각까지 했지만 딱히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어제 객잔을 나선 뒤,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렸다 하더라도 아침에 벌어들인 수입이 있지 않은가? 제법 넉넉하게 차있던 전낭을 몇 개나 얻었으니 은자 한두 냥 정도 되는 비용도 너끈히 지불할 수 있을 텐데?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천화가 이야기한 것처럼 일단은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몸을 풀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자신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 벌써 이류나 일류급에 도전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기행을 일삼는 천화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는 이제 막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는 강호초출의 삼류 무인인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혈마검도 아닌 일반 철검을 든 상태. 혈마검을 사용했다간 실력과 관계없이 어지간한 검쯤은 두 동강을 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인지, 귀주삼호라는 놈들에게서 빼앗은 철검 중 하나를 손에 쥐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천화의 상식을 벗어난 행동과 무위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을 뿐, 이게 정상이니까.
“시작할까요?”
혈마검을 쥐지 않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없거나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비무를 지켜보았다.
“먼저 갑니다. 차핫!”
“……?”
허나, 비무가 시작된 순간 설영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허술했으니까. 너무나 허술했으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천화와 같은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허술한 몸놀림으로 상대에게 검을 휘둘러 간 것이다.
‘무슨 생각이지?’
과하게 자신감 넘쳐 보이는 천화의 모습에 인정하기 싫은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내심 무공에 대한 천화의 재능은 인정하고 있던 설영이었다. 그런데 저건 무슨 추태에 가까운 행동이란 말인가? 보법은 매끄럽지 않았고 전신에 빈틈이 있었으며 공격은 뻔하고 단조로웠다. 간단한 변화조차 섞지 않은 전형적인 무공 초짜의 느낌.
‘혈마검이 없어서?’
손에 쥔 것이 혈마검이 아니라서일까? 혈마검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천화였으니 그가 가르쳐주는 검로와 발의 위치를 몽땅 까먹은 것일까? 당혹스럽기까지 한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상대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다행이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상대도 비무를 몇 번 해보지 않았는지 잔뜩 얼어있지 않았다면 순식간에 공격이 막히거나 흘려지고 요혈을 베였을 테니까.
‘흐, 흥! 저런 녀석 어디 한번 혼쭐이 나봐야지!’
첫 번째 격돌이 끝나고 가슴을 졸이며 안도의 한숨을 쉬던 설영이 혼자 화들짝 놀라며 삐죽한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두 눈은 초조하게 한시도 둘에게서 떼지 못했다.
“얼씨구? 이건 거의 막싸움이잖아? 어린애들 칼싸움도 아니고 원…….”
까앙 까앙 깡 깡. 허접하기 짝이 없는 공방은 몇 번이고 이어졌다. 어찌나 허술하고 어설픈지 주변에서 지켜보던 몇 안 되는 이들마저 비웃음을 흘리며 등을 돌릴 정도다.
“져, 졌습니다.”
그렇게 몇 초나 더 이어졌을까.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었지만 상대가 먼저 패배를 인정했다. 그 이상 겨루었다가는 상처를 입을 것이라 겁을 먹은 것인지 주춤거리며 천화에게 도전 비용의 두 배를 보상하는 것으로 첫 번째 비무가 끝이 났다.
“……괜찮아?”
어렵사이 번 동전 400문을 전낭에 챙겨 넣는 천화에게 설영이 조심스레 다가가 슬쩍 눈치를 살폈다. 보통 강호초출이나 삼류 무인들의 경우 강적을 만나거나 허접한 상대를 쉽게 제압하지 못하며 무력함을 깨달았을 때, 크게 낙담하고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것을 달래줄 요량으로 조심히 말을 걸었지만 천화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응? 뭐가?”
“그…… 어렵게 이겼잖아? 상대가 고수도 아닌데.”
“풉.”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의아하게 묻는 천화에게 되묻자 돌아온 것은 폭소였다.
“크크큭. 너 방금 그걸 진짜로 믿은 거야?”
“뭐?”
“쯧쯧. 이렇게 상술이 없어서야. 처음부터 센 놈을 골라서 간단히 이겨버리면 어디 다른 놈들이 붙으려고 하겠어? 당연히 힘든 척, 어려운 척하면서 약한 놈 뚝배기부터 깨야지. 그래야 한 번이라도 더 싸우고, 돈도 더 벌 거 아니야? 뭐, 시작은 푼돈이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지. 기대치를 낮춰두면 써먹을 데가 있기도 하고.”
“……하?”
설영의 눈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좀 전의 그게 다 연기였다고? 아니, 갑자기 실력이 떨어진 게 이상하긴 했지만 너무 감쪽같은 모습이라 듣고도 믿기 어려웠다. 아무리 연기를 하더라도 습관이나 본능적인 움직임 같은 것이 있으니 보통은 어느 정도 티가 나기 마련인데, 이건 누가 봐도 무공 초짜의 모습이 아니었나? 속았다는 황당함과 속였다는 꺼림칙함에 설영의 고운 아미가 꿈틀거렸지만 천화는 씨익 웃으며 손사래를 칠 뿐이었다.
“걱정했냐?”
“아니! 아니거든! 걱정은 무슨! 누가 너 따윌……!”
“그러니까 이제 맘 편히 보고 있어. 이 오라버니께서 후딱 해치우고 잔뜩 벌어 올 테니까.”
“흥! 그렇게 거만 떨다가 확 져버려라!”
설영의 귀여운 악담에 천화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지고 싶어도 도저히 질 수가 없으니까! 정확히 그 다음으로 약한 상대를 찾아 비무를 신청했다.
“저 친구 좀 전에도 고전하지 않았어?”
“그러게. 간신히 이기는 것 같던데?”
“영 검을 휘두르는 게 어설프긴 한데, 그래도 어떻게 비등하게는 겨루네.”
“호오, 그 사이 성장한 건가? 운이 좋군. 아무리 하수들의 싸움이라지만 비무를 통해 바로바로 배우는 게 있다니.”
한 번, 두 번. 승리가 거듭될수록 처음에는 천화를 거들떠도 보지 않던 이들이 슬슬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가 치르는 비무에 흥분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더 약해 보이는 이에게 아등바등 이기는 것 같던 천화가 연달아 비무를 행하고도 어찌어찌 승리를 이어가자 흥미를 느낀 것에 불과했다. 연승을 거두고 있다고는 하나 벌어들이는 것은 푼돈이요, 비무 내용 역시 신승이라 부를 만큼 간당간당한 승리였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처럼 아슬아슬한 승리를 연출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상대의 힘과 내공, 그리고 검로까지 모조리 꿰뚫고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류급의 고수인 설영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한 그것을 고작 구경꾼들이 알아차릴 리 없었다.
“역시 노가다 할 땐 이게 꿀이라니까.”
그러나 그들의 말도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삼재검법(6성)의 숙련도가 0.3만큼 상승했습니다.] [무형보(6성)의 숙련도가 0.2만큼 상승했습니다.] 비무가 거듭될수록, 천화의 무공 숙련도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으니까. 무공을 수련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미 익힌 무공에 대한 숙련도를 높이는 방법 중 최고는 역시 실전인 것이다. 물론 비무행에서야 완전히 비등한 실력에서 실수가 아닌 이상 상대의 목숨을 빼앗아갈 필요도 없고, 그러려고 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때문에 실전에 준하는 것으로 인정되며 숙련도 상승에 이점이 붙었고, 천화는 아주 쉽고 빠르게 숙련도를 채워갈 수 있었다. 그렇게 천화의 돈벌이, 아니, 비무행 격파는 첫날부터 공터에 모인 삼류 무인들 중 절반에게서 승리를 따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조금 오버하긴 했지만…… 뭐, 상관없겠지.’
본래는 3분의 1 정도만 정리하고 차근차근 진행을 하려 했지만, 자신에게도 와달라고 말하는 듯한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을 보고 있자니 차마 지나칠 수 없던 것이다. 공터에서 비무행 깃발을 꽂고 있는 삼류 무인쯤이라면 보통 극성까지 익혀봤자 삼류를 벗어나기 힘든 수준의 무공을 익힌 것이 보통인 까닭이다. 그러니 비무행을 통해서, 남과 겨루어서라도 스스로 발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그것이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기니 제 아무리 천화라 할지라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주머니를 털었고, 그들 중 일부는 무슨 짓을 해도 통하지 않는 자신의 검에 절망하며 손에서 검을 놓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 그러면서 크는 거니까.’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천화는 닭다리를 크게 뜯었다. @ 다음 날, 그다음 날도 천화의 비무행 격파는 계속되었다. 상대가 바뀌었고, 사용하는 무공 또한 바뀌었지만 비무의 내용은 항상 비슷했다. 아슬아슬하게 상대를 이기는 것. 그러자 처음에는 그저 요행이거나 조금 재능이 있는 청년쯤으로 생각하던 구경꾼들이 슬슬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류 이상의 무인들의 관심을 사기에는 아직이었지만. 그리고 나흘, 닷새가 되는 날. 드디어 이류 수준의 무인들도 천화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흘이 되는 날 공허에 남아있는 나머지 삼류 무인들을 모조리 꺾은 천화가 닷새째부터 이류 무인들에게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하루에 3분의 1씩 꺾었으니 단순 계산을 하면 삼 일이면 충분했지만, 천화의 소문을 들은 것인지 사흘째 되는 날 새로운 삼류 무인들이 잔뜩 몰려들은 탓이었다. 결국 그들 모두를 꺾은 천화가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이류 무인에게 첫 도전을 했다.
“흥. 그래 봤자 삼류지.”
‘뭐래는 거야? 지도 꼴랑 이류밖에 안 되면서.’
짤랑. 이제는 은자 단위로 바뀐 도전 비용을 지불하자 상대가 코웃음을 치며 천화를 노려보았다. 삼류와 이류의 격이 분명하거늘, 감히 자신에게 도전장을 내민 천화가 아니꼬운 것이다. 더불어 자존심도 상했다. 왜 하필 자신이란 말인가? 여기 모인 이류 무인들만 해도 수십은 될 텐데! 요 며칠 간 천화가 벌여온 행보가 가장 약한 상대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이었기에, 자신을 최약체로 보았다는 소리와 진배없었다.
‘감히 나를 처음으로 지목하다니. 본때를 보여주마!’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봐주지 않겠다고 이를 갈며 비무를 시작했다.